356화. 가지 말라는 곳엔 안 가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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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화. 가지 말라는 곳엔 안 가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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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화. 가지 말라는 곳엔 안 가는 게 좋다
2023.07.26.
“오. 이겁니까?”
필적 위조 전문가는 칼라인이 건네는 편지를 받으며 신이 나 히죽거렸다.
“이게 그 대신관님의 편지?”
뱀파이어인 자신이 대신관의 편지를 입수하게 된 게 신기한 눈치였다.
칼라인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장난친다고 허술하게 해선 안 된다. 주인을 위한 일인 걸 명심해라.”
“아아, 알지요, 알지요.”
뱀파이어는 대답하면서도 낄낄 웃으면서 신이 나 편지를 뜯었다.
“자, 봅시다. 과연 고귀한 대신관님은 어떤 식으로 편지를 쓰시나.”
그러다가 뱀파이어는, 칼라인이 휙 돌아서는 걸 보고 물었다.
“응? 단장은 같이 안 볼 겁니까?”
“안 본다.”
“안 궁금하세요?”
“전혀.”
단호하게 말한 칼라인이 문으로 걸어가자, 뱀파이어는 입술을 삐죽였다.
“재미없으시긴. 이런 거 볼 기회가 몇 번이나 온다고.”
하지만 혼자 봐도 재밌으니 괜찮다. 뱀파이어는 히죽 웃고서 봉투를 뜯고 편지를 빼냈다.
칼라인은 그런 뱀파이어를 속으로 비웃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뒤에서 ‘쾅’ 하고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자 칼라인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
뜻밖에도 뒤에는 뱀파이어가 의자째 뒤로 넘어가 있었다.
“왜 그러지?”
혹시 그놈이 편지에 성수라도 뿌려두었나? 놀란 칼라인은 황급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뜻밖에도 뱀파이어는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가 돌처럼 굳어 있고, 소리를 참느라 얼굴이 벌게지긴 했지만.
칼라인은 뱀파이어가 뒤로 넘어지면서도 쥐고 있던 편지지를 낚아채 내용을 보았다.
중간 부분이 대번에 눈에 들어왔다.
-제 나신을 보는 폐하의 눈길에서 저는 열망을 읽었습니다.
칼라인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 사이 뱀파이어는 의자 옆으로 굴러서 몸을 일으키며 히죽거렸다.
“폐하가 로드라 하셨죠? 우리 로드는 로드이면서 대신관한테도 구미가 당기시나 봐요?”
칼라인은 입을 꽉 다물었다. 조금 더 시선을 내리자, 편지에 그의 이름도 나와 있었다.
-근육은 칼라인 님도 라나문 님도 므라딤 님도 훌륭하지만, 역시 제 근육을 따라올 사람이 없습니다. 칼라인 님 근육은 솔직히 좀 얇지 않습니까?
“…….”
-폐하와 입을 맞추었을 때, 저는 세상에 이런 감각이 있다는 데 놀랐고, 폐하를 존재하게 한 신에게 감사드렸습니다.
칼라인은 편지를 와그작 구겨버렸다. 신? 500년에 한 번씩 어둠과 함께 깨어난단 이유로 사람들에게 적대 받는 운명을 가진 로드에게 신?
“아이고 단장님!”
뱀파이어가 황급히 편지를 가져가지 않았다면, 칼라인은 편지를 찢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근육, 이거 근육 얘기 보고 화나서 그러십니까? 뭐 이런 데 열 받고 그러십니까?”
“그 부분에 화난 게 아니다.”
“계속 여기만 보고 계시던걸요 뭐.”
혀를 찬 뱀파이어는 칼라인이 다른 편지까지 찢어버릴까 염려되는 듯 주섬주섬 다른 편지들도 모두 챙기며 부탁했다.
“단장님 계시면 방해됩니다. 그냥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세요. 저녁때까진 완성할 테니까요.”
* * *
“벌써 완성됐어?”
라틸은 칼라인이 건네는 위조 부적을 받으며 기뻐 웃었다.
“네.”
칼라인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라틸은 좋아서 웃다가, 칼라인의 표정이 평소보다 좋지 않단 걸 눈치채고 슬그머니 물었다.
“혹시 이거 만드는 게 많이 힘들었나?”
“아닙니다.”
칼라인은 바로 대답했다. 하지만 말과 달리 표정이 굳어 있어서, 라틸은 위조 부적과 칼라인을 번갈아 살폈다.
칼라인은 억지로 웃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 부적을 계속 쳐다봐서 그런 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부적을 위조하기 위해 라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대신관의 부적을 빌려주었다. 상자에 넣어서 빌려주었는데, 뱀파이어가 그걸 어떻게 샅샅이 보고 위조했는지는 라틸도 몰랐다.
하지만 칼라인의 표정을 보니 쉽지 않은 절차였던 듯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주인.”
라틸이 걱정스레 바라보자, 칼라인이 그제야 아까보다 한결 풀린 미소를 지었다. 라틸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해.”
“일은 아니지만, 주인. 그러면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뭐든지 해. 뭔데?”
“대신관같은 체형을 가장 좋아하십니까?”
“?”
“필요 이상으로 근육이 덕지덕지 붙어서 별로지 않습니까?”
라틸은 떨떠름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중요해?”
* * *
“중요해. 그러니 절대로 들켜선 안 돼.”
칼라인에게 부적을 받은 라틸은, 이후 타시르를 불러 가짜 부적을 건네며 지시했다.
“완전히 똑같이 생긴 부적이라, 부적을 바꿔치기하러 간 사람도 헷갈릴 수도 있어. 안 섞이게 조심하고.”
타시르는 상자를 열어 그 안에 담긴 부적을 보고 감탄사를 뱉었다.
“정말로 흡사하게 생겼네요. 자세히 봐도 알아내기 어렵겠습니다.”
“헷갈리면 안 돼.”
“그럼요. 그러니까 이걸, 밀로 공주가 이쪽으로 올 때 바꿔치기했다가, 나갈 때 도로 바꿔치기하란 말씀이지요?”
“어. 안 들키게. 뱀파이어들에게 시킬까, 생각하긴 했는데. 그자들은 진짜 부적을 못 건드리잖아.”
타시르는 자신만만하게 웃고서 부적만 꺼내 챙긴 다음, 상자는 도로 라틸에게 내밀었다.
“쉽습니다.”
* * *
이후 라틸은 자리폴시 공주를 초대한 다음, 그녀가 왔을 때 서넛에게 급한 보고가 있다며 들어오게 시켰다.
서넛은 라틸이 지시한 대로 했다. 라틸이 공주에게 궁전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제안하고 있을 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손님이 와 계신데 죄송합니다, 폐하. 급히 가보셔야겠습니다.”
라틸은 공주에게 친근하게 궁전 구경을 시켜주겠다, 하렘에도 데려가 주겠다, 어쩌면 인척이 될 수도 있지 않으냐 등등의 말을 하다가, 서넛이 들어오자 바로 탄식했다.
“이런. 그 일 때문인가.”
“그 일이라니요?”
밀로 공주가 호기심을 보였지만, 라틸은 웃으면서 선을 그었다.
“미안하네. 말해주면 좋은데, 기밀이라.”
그러고서 라틸은 서넛과 공주를 번갈아 보며 생각하는 척하다 지시했다.
“음, 서넛 경이 공주를…… 아니다. 그러면 공주가 불편하려나.”
“?”
“공주, 서넛 경이 공주를 안내하면 불편하겠지?”
“아, 저는 괜찮…….”
“불편할 거야. 서넛 경은 쑥스러움이 많거든.”
“아. 그쪽이 불편…….”
“뭐. 괜찮겠지. 공주, 내가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찾아갈 테니, 자유롭게 궁전 안을 둘러보게.”
라틸의 파격적인 제안에 공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유롭게요? 아무 데나요? 괜찮으신가요?”
“출입금지 구역 앞엔 어차피 경비병들이 있으니 괜찮네.”
라틸은 한쪽 눈을 깜빡였다.
“어쩌면 공주는 나와 인척 관계가 될지도 모르지 않나.”
라틸은 공주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라틸의 생각처럼, 공주는 바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저야 좋지요. 유명한 타리움 궁전을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으니까요.”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먼저 일어나라 손짓했다. 공주는 눈치 좋게 바로 일어나며 꾸벅 인사했다. 그 모습을, 라틸은 서류를 보는 척하며 지켜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밖으로 나가던 공주가 뜻밖에도 손수건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본인은 모르는 듯 계속 걸어갔다.
근처에 있던 서넛은 그걸 보고서 공주를 불렀다.
“공주님. 손수건을 떨어뜨리셨습니다.”
그러고서 서넛이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주우려 하는 순간. 라틸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저 공주? 설마 부적을 손수건 안에 넣어 왔나?’
라틸은 순간 달려가 손수건을 대신 들어줄 뻔했다. 하지만 그건 서넛이 부적을 잡았다가 기절하는 것 이상으로 수상쩍은 장면일 터였다. 라틸은 서넛이 손수건 집는 모습을 보면서도 달려갈 수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서넛은 예상외로 덤덤히 손수건을 집어 공주에게 전해주었다. 공주는 서넛이 손수건 집는 걸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웃으면서 인사했다.
“고마워요. 친절하네요.”
시간이 한순간 굉장히 느려지는 것 같았는데. 다시 원래 속도로 돌아왔다. 라틸은 움켜쥐었던 의자 손잡이를 놓았다.
공주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라틸은 그녀가 나가자마자 서넛에게 오라 손짓하고서 다급히 물었다.
“안에 뭐가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빳빳한 재질의 손수건이라 구분이 잘 안 되긴 한데. 안에 뭐가 들어 있었습니다.”
라틸은 한숨을 내쉬었다.
“철저하네요. 아니, 공주도 공주인데. 타시르는 저걸 어떻게 알고 바꾼 건지 모르겠습니다.”
* * *
“예? 그야 부적을 떨어뜨리고 집어달라 하지 않을 거잖아요? 그렇다고 부적을 직접 남의 남편 몸에 가져다 대려 하지도 않을 테고. 그러면 뭐가 가장 자연스러울까, 생각해보니 손수건이 나왔지요.”
그래도 혹시나 싶어 타시르를 불러 묻자, 타시르는 손수건 안에 든 부적을 교체한 게 맞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라틸은 타시르를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고 말았다.
* * *
한편, 공주는 신이 나서 궁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손수건을 떨어뜨리거나 대어 보았다.
시녀는 너무 이러고 다니다가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공주는 단장 자리에 오를 정도로 실행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하렘 안에 들어갈 때는 주춤하긴 했으나, 달리 막는 사람이 없자 용기를 가지고 들어갔다.
“윽. 여기 들어오니 짙은 세속의 향이 절 흔드네요.”
사방이 남자들뿐인 공간을 걸어가며 시녀가 많이 흔들리는 듯 보이긴 했으나, 공주는 사람에겐 관심이 없었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다음에 다시 태어난다면 라트라실 황제 폐하의 시녀로 태어나겠어요.”
“……꿈이 너무 현실적일 만큼만 높은 거 아니야?”
“경쟁률이 낮은 곳을 노리는 거예요. 치밀한 거라고요.”
시녀와 한두 마디씩 말을 주고받으며 공주는 원하는 대로 시험을 마음껏 했다.
몇몇 눈치 좋은 하인들은 웬 귀족 여자가 지나치게 손수건을 자주 떨어뜨리며 돌아다니는 걸 눈치채고 의구심을 품긴 했으나, 다들 어련히 허락을 받고 왔겠거니 싶어 막진 않았다.
그러다 공주는 대신관을 마주쳤다. 백화랑술의 성기사단장 백화도.
대신관과 백화까지 굳이 시험할 필요는 없기에, 이번에는 공주도 손수건을 떨어뜨리진 않았다.
대신 그녀는 존경심과 경애심을 담아 대신관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런 곳에서 대신관님을 뵙게 되다니. 너무나 영광입니다. 형룡술의 성기사단장 형룡입니다, 대신관님.”
“근골이 뛰어나군요. 신의 축복을.”
“예?”
하지만 대신관은 바쁜지 그녀와 오래 대화를 나누지 않고 다른 곳으로 바로 가버렸다.
얼핏 뒤를 따라가는 시종이 ‘클라인 님이 대신관님이랑 백화님이 거짓말을 했다고 화나셨대요. 죽여버릴 거라던대요’라고 말하는 게 들려왔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 생각하다가 공주는 일단 백화에게도 꾸벅 인사를 건넸다.
어쨌든 이걸로 라트라실 하렘 안이나 라트라실 황제의 근위병, 시녀들 중에 뱀파이어가 없단 건 확인했다.
인어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쪽은 말 그대로 인어인 데다 호수 안에서 지내고 있기에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런데 돌아가려는 그녀를, 대신관을 따라가지 않고 지켜보던 백화가 불렀다.
“얘기 좀 할까요?”
공주가 말해보라는 뜻으로 웃어 보이자, 백화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에는 단백 경이 그러더니. 이제는 그쪽이 와서 폐하가 로드인가 아닌가 확인한답시고 헤집고 돌아다니는군요.”
공주는 백화가 자신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리자 조금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저희가 할 일이니까요.”
“내가 여기서 지내고 대신관님이 여기서 지내시는데 폐하를 의심하는 건, 나와 대신관님을 무시하는 처사 아닙니까.”
“누구라도 실수할 수 있지요. 대신관님이나 백화 경이라 해도요.”
공주가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에, 백화의 입술 끝이 위로 뒤틀려 올라갔다.
그는 더 차가운 소리를 하는 대신, 공주에게 가까이 오라 하고서는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공주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정말입니까?”
* * *
“덕분에 구경을 잘했습니다, 폐하.”
라틸이 집무실에 있자니, 생각보다 빨리 구경을 마친 공주가 돌아와 인사를 올렸다.
라틸은 잘 구경했냐고 웃으면서 물으려다가, 공주의 다급한 표정을 보고서 질문을 거두었다.
뭐지. 누가 정체를 들켰나? 공주는 황망한 표정이었다.
“공주? 괜찮은가?”
“네? 네. 이제 그만 가보려 합니다. 너무 오래 나와 있어서요.”
라틸의 불안한 마음은, 자신을 보는 눈에 아무 감정이 없는 공주의 눈동자를 보자 조금 가라앉았다.
뱀파이어가 누구인지 알아내고서 저러는 건 아닌 듯했다. 그러면 왜? 왜 저러지?
의구심을 풀기도 전에 공주는 황급히 라틸에게 인사를 올리고서 말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구경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퍼리스 황자는-.”
“오늘 내로 그 집에서도 나올 생각입니다. 황자님께도 감사하다고 나중에 전해주세요.”
뭐야? 왜 직접 말 안 하고? 황망해 하는 라틸을 두고 공주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라틸은 그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다 고개를 기웃했다.
* * *
공주의 태도 변화에 놀란 건 라틸뿐만이 아니었다.
“단장님? 왜 그러세요?”
시녀 역시 느긋하게 라트라실 황제의 측근들을 살피고 다니던 공주가 갑자기 서둘러 이동하자, 일단 따라가면서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마차를 타고 왔으면서, 돌아갈 때는 말만 빼서 타고 가다니?
“백화 경이 대체 뭐라 한 거예요?”
“로드 위치를 알려줬어.”
“네? 그걸 백화 경이 어떻게 알아요? 아니, 안다고 쳐도, 저희끼리 지금 거기 가는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아니.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는 했는데.”
공주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어떻게 안 가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