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기억에 없지만 기억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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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화. 기억에 없지만 기억나는 사람
2023.07.23.
라틸은 혼란스러워졌다. 도미스가 죽은 게 한 5년 전이라면, 아니, 15년 전이기만 했어도 이 정도로 혼란스럽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미스가 죽은 건 500년 전 아닌가. 500년 전에 백화를 보았다고? 이게 말이 되나?
라틸의 머릿속에 도미스가 죽던 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성기사들이 떠올랐다.
다들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데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얼굴이 하나하나 다 떠오르진 않는다.
게다가 그 기억 속에서 중심은 도미스와 칼라인이었지, 둘러싼 이들이 아니었다.
성기사들 중에서 그나마 시선이 간 건 홀로 제복이 조금 달랐던 그 여자였다.
‘그 근처에 있었을 거야. 아니면 아예 내 기억에 안 남았을 테니까. 아니, 이것도 확실한 가설은 아니야. 그냥 그 장면에 있었단 게 떠오르는 거지, 위치를 정확히 아는 건 아니잖아.’
게다가 백화가 500년 전에 있었다면, 왜 기르골과 칼라인은 백화를 아는 것처럼 굴지 않았을까?
백화가 전생에 있었더라도, 사람들 틈에 묻혀서 기억나지 않을 만큼 낮은 위치여서?
칼라인이나 기르골이라 해도 엄청나게 많은 그 성기사들을 모조리 기억하진 않을 거 아닌가.
아니면 낮은 자리에 있지 않았더라도, 백화는 늘 떠돌아다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늘 출장을 다니는 임무를 맡아서, 기르골이나 칼라인이 얼굴을 알 수 없던 거지.
‘아니, 이것도 아니야. 그럼 기르골, 칼라인은 백화 얼굴을 몰라도, 백화는 기르골, 칼라인 얼굴을 알았어야 하잖아.’
아나? 이미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하는 건가?
‘얼굴이 같은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 아니면 500년 전 그 사람은 백화의 조상인가?’
혼란에 잠겨 있자니, 백화가 이쪽을 쳐다보며 고개를 기울인다.
“폐하?”
라틸이 걸어오다 말고서 우두커니 멈춰서 있자 의아한 듯했다.
긴장감에 라틸은 소름이 돋았다. 백화가 정말로 500년 전부터 있던 성기사라면 그는 위험한 적이었다.
기르골이 대적자의 스승이면서도 뱀파이어이고, 라틸의 전생들과 애증 비슷한 관계인 반면 백화는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저쪽은 정신도 아주 굳건해 보이고.
“아아. 아니. 뭐가 좀 생각나서.”
“?”
“오늘 밀로 공주랑 술을 마셨거든. 그런데 생각해보니, 대신관이 신관은 금주라 했단 말이야.”
다행히 잘 넘어갔는지 백화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습니까?”
“괜찮은 건가 모르겠어. 그 공주도 성기사단장이라던대.”
“아마 괜찮을 겁니다. 원칙은 금주지만, 성기사들은 신관들보다는 규칙에 덜 얽매이는 편이니까요.”
라틸은 덩달아 웃으면서 백화 쪽을 쳐다보지 않고 걸어갔다.
그에게 혹시 500년 동안 살아 있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쪽에게 전생의 기억이 있단 건 비밀이었다. 그 전생이 로드란 것도.
먼저 물어볼 수가 없었다.
* * *
“폐하?”
이렇게 혼란스러운 마음가짐으로 방 안에 들어가자, 표정에 그런 티가 났나 보다.
대신관은 저녁 식사를 차려둔 상 앞에 앉아 있다가, 라틸이 들어오자 머쓱하게 웃으면서 일어났다.
“괜찮으십니까?”
그러고서 튀어나온 말에는 걱정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괜찮다.”
라틸은 빙그레 웃고서 다가가 대신관의 맞은편에 앉아 잠시 멍하게 있었다.
“폐하?”
대신관이 맞은편에 앉으며 한 번 더 물어본 뒤에야 라틸은 아차 싶어서, 가져온 편지지를 내밀었다.
“이거 봐라, 자이신.”
“무엇입니까?”
“편지지지.”
“편지지요?”
대신관이 편지를 받아들었다.
“네가 써준 편지를 받고 싶어서.”
“예? 갑자기요?”
“다른 후궁들은 시도 써주고 편지도 써주고 그러는데. 너만 안 그러잖아.”
라틸은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거짓말했다. 사실은 시도 써주고 편지도 써주는 후궁은 아무도 없지만.
하지만 대신관은 남들도 다 해주었다니 자기도 해줘야겠다 싶은 듯,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자신 있습니다, 폐하.”
“자신 있다고?”
“네. 전 숭배하는 말을 잘하니까요! 매일매일 신에 대한 사랑을 숭배하며 살거든요. 폐하께서 10초 주시면 10초 안에 사랑을 폭풍처럼 쏟아낼 수 있습니다.”
“어…… 그럼 기대할게.”
* * *
대신관이 라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는 동안, 라틸은 다리를 꼬고 앉아 마음 편하게 계속해 백화에 대해 고민했다.
밀로 공주에 대한 일은 더는 머리를 복잡하게 하지 않는다. 잘 해결될 것 같으니. 하지만 백화는…….
‘일이 잘 해결되고 나면 밀로 공주한테 백화에 대해 물어볼까? 아. 지금 대신관한테도 물어볼까?’
라틸은 힐긋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대신관은 탁자에 허리를 굽히고서, 열심히 사랑을 담은 편지를 적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자꾸만 펜대를 깨물었다 놓았다 하는 모습을 보니, 생각처럼 뭐가 잘되지 않는 듯했지만.
라틸은 그 부분은 모른 척하고서 물었다.
“자이신.”
“네, 폐하.”
“백화랑술이 널 지켜주고 네 뜻도 따라주지만, 숭배하는 건 신뿐이라 했지?”
“네.”
“백화랑술 성기사 단장은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성기사들 중에 뽑아? 성기사들도 단체가 여러 개잖아. 그중에서 자기가 백화랑술에 들어가는지 단백술에 들어가는지는 어떻게 알아?”
“그게 궁금하십니까?”
“응. 몰라도 상관없는 내용이긴 한데. 성기사단이 여러 개 나오니까 궁금해져서.”
대신관은 펜대를 다시 깨물다가 눈동자를 굴렸다.
“저도 자세한 절차는 모릅니다.”
“그래?”
“네. 그냥 성기사단장이라고, 인사하러만 들러서 ‘아, 안녕하세요’하고 알게 된 거여서요.”
“그냥 그렇게 찾아와서 인사했는데 바로 믿었다고?”
“하하. 설마요. 힛라 노신관님 주선으로 만났습니다, 폐하. 힛라 노신관님을 믿으니까 당연히 백화 경도 믿었지요.”
“아아.”
힛라 노신관. 라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관 위치를 안다고 한 그 노신관. 기억난다.
하나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힛라 노신관에게 물어보기엔, 그는 이미 죽었기도 하고.
‘그런데 만약 백화가 전대 대적자의 편이어서 도미스를 죽이는 데 일조했다면, 왜 이번에는 라나문에게 찾아가지 않지? 아이니야 먼 곳에 있어서 갈 수 없다지만, 라나문은 가까이에 살잖아? 접근하기도 쉬울 텐데.’
또다시 깊은 생각에 빠지려는 순간. 대신관이 라틸에게 자신이 적은 편지를 곱게 접어 내밀었다.
그러고는 라틸이 그걸 펼치려 하자 “잠시만요.” 하고 붙잡았다.
“왜?”
라틸이 쳐다보자, 그는 얼른 편지지를 도로 접더니 어딘가에서 봉투를 꺼내와 담고서 웃었다.
“혼자 있을 때 보십시오. 부끄럽잖습니까, 제 앞에서 보시면.”
* * *
다음날. 라틸은 대신관이 준 서신을 건네며 칼라인에게 은근히 물어보았다.
“칼라인. 혹시 백화를 예전부터 알았어? 아, 그건 대신관이 준 편지야. 필체 확인하고 나서 돌려줘.”
칼라인은 라틸이 준 편지를 챙기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백화요? 백화랑술의 그 백화 말입니까?”
“어.”
“갑자기 그자 이야기는 왜 물으십니까?”
“아니…… 다른 성기사들은 내가 로드인가 아닌가 확인하겠다고 열심히 돌아다니는데. 제일 유명한 성기사단에선 별로 그런 데 관심도 없어 보이고 해서.”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닌 듯하지만, 일단 놀라울 정도로 이쪽에 화살은 돌리지 않고 있다.
칼라인은 “그렇군요.” 하고 중얼거렸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로 처음 보았습니다. 하지만 관심이 없다면 좋은 게 아닐까요?”
“스치듯 본 적도 없어?”
‘난 네 기억 속에서 봤는데?’
“모르겠습니다. 그자가 저에 대해 안다고 합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칼라인과 헤어진 후. 게스타에게도 백화에 대해 물어보러 가는 길에서야, 라틸은 그래도 대신관이 준 편지를 한 번 읽어볼 걸 후회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서 받아올 수도 없는지라, 그냥 가던 길을 계속 가서 게스타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게스타 역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처음 본 사람이었어요, 폐하.”
“스치듯이라도 본 적 없어?”
“백화. 잘생겼죠. 후…….”
‘왜 한숨을?’
“혹시 폐하께서 마음에 두신 얼굴이신가요……?”
“어? 아니, 아니야. 절대 아니지!”
게스타는 오히려 대답 수준을 넘어서서, 라틸이 백화를 마음에 두는 건 아닌가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라틸은 질색해서 손을 내저은 다음, 마지막으로 기르골을 찾아가서 물어보았다.
“기르골. 혹시 백화를 예전부터 알았다거나 그래?”
“아가씨. 후궁 생활은 그리 내 취향에 안 맞는 거 같아. 좀 지루하네.”
“모른단 뜻이지?”
“같이 설산에 다녀올까? 내가 산꼭대기까지 순식간에 데려다줄게.”
“모른단 대답으로 알게.”
그러나 기르골은 백화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는 수준을 넘어 마이너스로 가고 있었다.
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지낸 기르골은, 백화가 문제가 아니라 후궁 생활 자체에 벌써 권태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제일 늦게 들어왔으면서.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자신의 집무실로 걸어갔다.
‘그럼 대체 쟨 뭐지? 분명 과거에 본 얼굴인데. 왜 다 모르지?’
* * *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성기사가 조심스레 백화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왜 계속 단장님에 대해 묻고 다니실까요?”
백화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웃했다.
“그러게. 왜 나에 대해 묻고 다니시지?”
하지만 백화는 잠시 의아해할 뿐. 큰 관심은 가지 않는 듯 몸을 돌렸다.
“황제들 마음가짐이야 늘 신기하고 희한하지. 경계심도 많고. 되었다. 저러시다 어련히 알아서 적당한 데로 마음 돌리실 거다.”
“단장님은 폐하를 늘 좋게 보십니다.”
“신전에 친화적인 분이시니까. 그보다 레안 황자에 대한 건? 알아냈나?”
“예. 황자에게 접근하려던 사람에 대해 조사해 보았습니다. 예전에 식료품 반입을 책임지면서, 주기적으로 황자와 연락을 주고받은 자더군요.”
“그런데 왜 이번엔 자기가 안 하고?”
“최근에 담당자가 바뀌면서 이전 방식으론 연락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새 사람에게 임무를 넘기려 했군.”
고개를 끄덕이는 백화에게, 성기사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한층 낮추어 말했다.
“거기에 이상한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이상한 내용?”
“그들이 전에 주고받던 쪽지를 몇 개 입수했는데요. 레안 황자 쪽에서, 라트라실 황제가 로드일지도 모른단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쪽지를 어떻게 입수했데?”
“제가 능력이 좀.”
히히 웃은 성기사가 걱정스레 물었다.
“폐하께서 백화에 대해 조사하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전에 단백이 와서 한 말도 그렇고. 레안 황자 주장도 좀 그렇고. 혹시 진짜 로드일 가능성은…….”
“없다. 아예 없어.”
그러나 백화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폐하께선 로드가 아니다. 이용당하고 팽개쳐진 신전을 부흥시킬 분이시지. 남들이 뭐라고 해도 우린 폐하를 믿어야 해.”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말하던 백화는 복도 안으로 들어가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떠도는 말에 휩쓸리지 마라. ‘로드’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