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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화. 저 사람, 그 사람이야 (355/367)


354화. 저 사람, 그 사람이야
2023.07.19.



“맛과 향이 과일 주스 같은 술이 있을까? 독한 술로.”

밀로 공주를 ‘초대’해 오라 지시한 라틸은 이후 자신의 전용 주방장을 불러 물었다.

주방장의 표정이 잠시 애매해졌다. 왜 굳이 그런 걸 찾으시지……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라틸은 굳이 설명할 필요 없는 일이라 그저 웃기만 했다.

라틸은 그 달콤한 술을 밀로 공주에게 줄 생각이었다.

쓴맛이 적고 달콤한 음료수 같으면, 술이란 걸 알면서도 취할 때까지 계속 마시게 된다.

술에 취한 상대는 마음이 흐트러져서 속마음을 읽히기 쉽게 된다. 라틸이 원하는 건 그것이었다.

라나문처럼 취하자마자 잠들거나, 게스타처럼 아무리 술을 마셔도 안 취하는 경우는 예외겠지만.


“저…… 폐하. 임신 초기신데 너무 술을 많이 마시면 안 좋습니다.”

“내가 마실 건 아니야.”

주방장은 라틸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으나, 알겠다 말하고서 물러났다.

* * *



“폐하께서, 퍼리스 황자님의 저택에 밀로의 공주님이 며칠째 머무르고 계신단 걸 아셨습니다. 여기까지 온 공주님을 돌려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라며 초대하셨으니, 부디 이에 응해주시길 바랍니다.”

황궁에서 온 황제의 비서가 말하자, 퍼리스 황자는 자기가 표정이 파래졌다.

황자는 공주가 납치될 위험에 처하기라도 한 것처럼 옆에 선 공주를 보았다.

비서는 며칠 사이에 황자가 공주에게 완전히 빠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저 표정만 보아도 티가 났다.

황제의 명령에 황자가 겁먹었단 것도.

반면 공주는 처음에는 잠시 놀랐으나, 곧 태연히 웃으며 대답했다.


“초대해 주어서 고맙네. 당연히 폐하를 뵈러 가야지. 평소 존경하던 분이라 기쁘네.”

비서가 나가자마자 퍼리스 황자는 공주에게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나 폐하께선 무서운 분입니다. 정말 만나러 가실 겁니까?”

하지만 애초에 공주는 황제를, 정확히는 황제의 주위 사람을 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전 폐하를 뵐 수 있어서 영광인걸요.”

하지만 비서를 따라 황궁으로 올라가는 마차 안에서, 자리폴시 공주는 미묘하게 웃으며 시녀에게 물었다.


“황제가…… 수상한 걸 눈치챈 거 같지?”

“공주님께서 여기 머무신 걸 바로 알아챈 것만 봐도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습니다. 위협이 되지 않는 황자라도 계속 주시하고 있단 거겠죠.”

공주는 웃으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로드가 아니라면 좋겠는데.”

 


“예? 왜요?”

“나라도 별문제 없이 다스리고 있고. 그러면서도 경계심도 높고. 대신관과 백랑화술, 인어들까지 끌어들인 최고 강대국의 황제가 로드라고 상상해 봐.”

“아…… 그렇군요. 적이라면 너무 위험한 적이겠네요.”

“그러니까. 적이 아니길 바라자고.”

 

* * *



“폐하. 공주가 바로 이쪽으로 올라온 모양입니다.”

당장 데려오진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공주는 성격이 급한 모양이다.

업무를 마친 라틸은 집무실 밖으로 나가 잠시 산책을 하던 중, 그 보고를 들었다.

라틸은 하늘에 해가 어느 정도로 넘어갔나 확인하고서 서넛에게 지시했다.


“주방장한테 내가 부탁한 그 술. 만들어졌나 확인하고 와요.”

“예.”

  

* * *

라틸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공주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시중을 들 시녀 하나를 제외하고 다른 시녀들은 모두 물린 채였고, 서넛과 근위기사들은 방문 앞에 대기시켜 두었다.

그 상태로 얼마간 기다리자, 마침내 문밖에서 밀로 공주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부르신 밀로의 자리폴시 공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라틸이 앞에 놓인 탁자의 종을 한 번 두르자, ‘댕’ 하는 맑은소리가 울리며 문이 열리고 공주가 들어왔다.


“타리움의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라틸은 즐거운 기분으로 공주가 자신의 앞에서 인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국혼을 두 번이나 거절당하자 아예 직접 황자에게 접촉한 공주. 당연히 호기심이 들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보통의 왕족들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행동이니까.


“어서 오게.”

라틸은 공주가 인사를 마치고 허리를 펴기를 기다렸다가, 맞은편에 앉으라 손짓하며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


“내 동생이 마차 사고가 일어난 상대를 의사도 부르지 않고 집에 두고 있다기에 걱정이 되어서 불렀네.”

“부상이 없어서요.”

“아, 그건 당연히 들었지. 하지만 미혼인 동생이 낯선 영애에게 빠졌단 말을 들으니 불안해서.”

“황자님을 아끼시나 봅니다.”

“동생이니까.”

“폐하께선 내리사랑을 하는 분이시군요.”

이복오빠는 처형시키지 않았냐고, 공주가 돌려서 묻는 말에 라틸은 환하게 웃었다.

아까의 미소가 일부러 친절하게 지은 미소라면, 이번 미소는 재밌어서 지은 미소였다.

라틸은 이런 식으로 이를 드러내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속마음 읽기를 앞에 두고 있다면 더욱.

그건 감정이 잘 넘실댄단 거고, 그런 사람은 라틸이 속내를 읽기 쉬우니까.


“맞아. 내가 오빠들과는 좋은 추억이 없어서. 대신 동생들을 아끼거든.”

라틸이 아무렇지 않게 수긍하자 이번에는 공주가 멈칫했다.

라틸은 더 그 이야기를 하는 대신, 종을 흔들어 사람을 부른 다음 지시했다.


“공주가 여기까지 왔으니 귀한 술을 대접해야지. 술을 가져와라.”

잠시 뒤, 시녀가 달콤한 과일 향을 내는 술병을 가지고 돌아왔다. 시녀는 술병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라틸은 직접 공주의 앞에 술을 부어주었다.


“폐하?”

공주는 당황한 듯했지만, 황제가 직접 술을 따라주고서 권하자 어쩔 수 없이 한 모금을 입에 대야 했다.


“무척 맛있는 술이군요. 음료수 같습니다.”

“내가 쓴맛이 나는 술을 못 마시거든. 일부러 그렇게 만들게 했지. 괜찮은가?”

“네. 마시기 좋습니다. 아, 폐하께서도…….”

“괜찮네. 나는 임신 중이라 술을 못 마시거든.”

라틸의 말에 공주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아.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라틸은 일부러 그녀에게 술을 한 잔 더 따라 건네면서 물었다.


“그보다 공주. 내가 듣기로 공주랑 우리 퍼리스가 음……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단 말을 들었는데. 사실인가?”

라틸은 처음에는 일부러 동생 일에 관심이 많은 누나인 척 물었다.

서넛은 잠시 열렸다 닫히는 문 너머로, 라틸이 꿍꿍이를 감출 때 짓는 그 미소를 짓고 있단 걸 알아차렸다.

* * *

머리가 욱신거린다.

공주는 인상을 찡그리고서 낯선 천장을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켰다.


“이런, 공주님.”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누군가 등을 밀어주었다. 시녀이자 성기사단의 부하였다.

공주는 숙취로 욱신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아파. 술에 취한 거 같은데.”

“네. 완전히 취해서, 폐하를 붙잡고 아보카도가 왜 아보카도인지에 대해 계속 설명하셨어요.”

“뭐? 정말이야?”

“네.”

“모르는 건데.”

“술에 취하셨으니까요.”

“아니, 아보카도. 나도 모르는 건데. 왜 그런 걸 설명하고 있었지?”

밀로 공주의 질문에 시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공주는 부끄러워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발로 이불을 걷어찼다.


“미쳤어. 나 뭐 한 거야 대체?”

“술이 입에 잘 맞으셨나 봐요. 조금 얻어갈 수 있는지 물어볼까요?”

밀로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황급히 도로 고개를 젓고 물었다.


“술이 문제가 아니라. 혹시 어제 내가 이상한 말을 하진 않았어?”

술을 마시는 자리에 시녀도 곁에 있었다. 공주는 새삼 자신이 말실수를 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왜 국혼을 이렇게 열심히 시도하는지, 황제가 로드인가 아닌가 의심하는 건 아닌지 등등 말이다.

시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 깨자마자 제가 말씀드렸겠지요. 그냥…… 횡설수설하긴 하셨지만 이상한 말씀은 안 하셨어요.”

“폐하는? 폐하는 혹시 술김에 흘린 말 없으셔?”

“폐하는 임신하셨는데 술을 어떻게 드시겠어요?”

“맨정신에 이상한 말씀은 안 하시고?”

“어떤 말씀이요?”

 

* * *



‘나는 잘 돌려서 물어봤지.’

라틸은 흐뭇하게 웃고서 칼라인과 서넛, 기르골, 므라딤을 소집했다.

어젯밤. 라틸은 밀로 공주에게서 결정적인 속마음을 들었다.

공주의 시녀가 계속 쳐다보고 있어서 대놓고 ‘왜 국혼을 여러 번 시도하는 거지? 목적이 뭐지?’라고 물을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둘러서 묻는 것만으로도 공주의 속마음은 열심히 대답했다.

겉으로는 아보카도 얘기만 해댔지만.


“부르셨습니까.”

하지만 라틸의 미소는 서넛과 칼라인, 기르골, 므라딤이 모이자 바로 흩어졌다. 라틸은 그들을 앉혀놓고 걱정스레 물었다.


“밀로 공주가 왜 자꾸 국혼을 시도하는지 알았다. 내가 로드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 해. 그 방법으로, 내 주위에 뱀파이어들이 많은지 확인하고 싶어 하고. 로드 주위에 뱀파이어들이 많단 걸 아나 봐.”

무슨 일인가 싶어 모인 인외 넷의 표정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변해갔다.


“밖으로 나갔을 때 죽일까요?”

칼라인이 대번에 물었고, 기르골은 홀로 생각에 잠겨서 옆에 선 서넛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서넛은 나동그라졌고, 므라딤은 신중하게 물었다.


“어떻게 확인하려 하오?”

“대신관의 부적을 가지고 온 거 같더라고. 므라딤은 대신관 부적이 닿으면 다리가 인어 꼬리로 변하지?”

“맞소. 뭐, 그거 가지고 인어인지 피인어인지 구분이 안 될 테니 나는 괜찮소.”

말을 한 므라딤의 시선이 기르골에게 닿았다.


“하지만 뱀파이어들은 나처럼 수월하게 넘어가지 못할 거요.”

“그렇지. 그래서.”

라틸은 팔짱을 끼고서 뱀파이어 3인방을 번갈아 보았다.


“전에 칼라인은 내가 부적 목걸이만 하고 있었는데도 쓰러졌잖아.”

기르골이 ‘그런 적이 있었어?’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칼라인의 얼굴이 굳었다.

아. 혹시 이런 거 말해주면 안 되나. 라틸은 순간 당황했으나, 모른 척 심각하게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주 집요한 공주였어. 의심을 풀려면 내 측근들을 보여주어야 할 거 같은데…… 자기가 부적을 직접 대보진 못할 거고. 나한테 부적을 가져다 대는 모습을 보여 달라 할 거 같거든? 그런데 너희는 부적이 닿으면 문제가 생기니 이걸 어째야 할까.”

“역시 제가 죽이겠습니다, 주인.”

“그럼 우리가 더 수상해 보이잖아, 칼라인.”

“…….”

잠시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때, 므라딤이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좋은 생각 있어, 므라딤?”

“그 부적 말이오. 바꿔치기하면 어떻소?”

라틸은 잠시 생각하다가 되물었다.


“티가 나지 않을까?”

뜻밖에도 거기에 대한 대답은 칼라인이 했다.


“용병 중에 다른 사람 필체를 잘 위조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자에게 부적을 위조해 달라 한 다음, 부적을 두 번 바꿔치기 하면 어떨까요?”

“너희를 시험하러 오기 전에 가짜 부적으로 바꿨다가. 돌아간 다음 진짜 부적으로 바꾸라?”

“예.”

라틸은 곰곰이 생각하다 히죽 웃었다.


“그러면 되겠네.”

이렇게까지 하고 돌아가면, 이쪽에 로드가 있단 의심을 설마 더 하진 못하겠지.

* * *



-필적을 위조하려면 부적만 있어선 안 됩니다. 제대로 위조하려면 전체적인 대신관의 필체를 알아야 합니다. 대신관이 쓴 편지를 서너 통 정도 가져다주시면 좋겠습니다.

칼라인을 통해 필적 위조 전문가에게 묻자, 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했다.

대신관의 편지를 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백화와 약속한 일도 있기에, 라틸은 대신관에게 사람을 보내어 밤에 찾아가겠다 전하게 했다.

그러고서 유난히 예쁜 편지지 다섯 장을 고른 다음, 그걸 들고 대신관을 찾아갔다. 대신관에게 자신에 대한 마음을 써 달라 부탁할 생각이었다.


‘일이 잘 풀려 가는구나.’

라틸은 신이 나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신관의 방을 찾아갔다.

라틸이 온단 이야기를 듣고, 황제가 약속을 지킨단 생각을 해서인 듯 복도 저 멀리 미리 나와 있는 백화가 보였다.

라틸은 웃으면서 그쪽으로 걸어가다가, 먼발치에 선 백화의 모습에 기시감을 느끼고 멈칫했다.


‘어?’

라틸은 잠시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전에 백화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았다.

멍하게 서 있는 시야 안에, 흐릿하게 제복을 입은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잠시 라틸은 멍하게 서 있다가,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 사람…… 도미스가 죽을 때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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