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3화. 데려와봐요. 직접 물어보게. (354/367)


353화. 데려와봐요. 직접 물어보게.
2023.07.16.



 


“뭐?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야! 누굴 무슨 변태로!”

라틸은 기겁해서 부정하다가, 곧 서늘하게 물었다.


“누구야? 누가 너희한테 그딴 말을 했어?”

라틸의 후궁들은,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안타깝다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라틸이 느끼기에도 밤일에 관한 경험과 지식이 자신과 수준이 비슷비슷했다.

전생의 자신과 아이도 낳았던 기르골이나, 전생의 자신과 세기의 사랑을 했던 칼라인은 경험이 있는 듯하니 예외.

타시르는 말을 너무 잘하는데다 능구렁이 같아서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이 안 가서 예외라 치더라도, 일단 대신관과 클라인은 라틸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 확실하다.

그런 대신관과 클라인이 난데없이 저런 의혹을 제기할 리 없으니, 누군가 옆에서 삿된 생각을 불어넣은 이가 있을 게 분명했다.

한 침대에 여럿을 두다니! 한 침대에 클라인과 대신관과 라나문을 두다니! 아주 좋군!


‘아니, 이게 아니지.’

라틸은 잠시 새어나간 생각을 가까스로 다잡고서 클라인과 대신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누가 그런 이상한 말을 했어? 오늘 소풍 가서 이상한 말 들은 거 아냐?”

클라인과 대신관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쩔쩔매자, 라틸의 의혹은 더욱 깊어졌다.

그때. 대신관이 쩔쩔매며 입을 열려 하고, 클라인이 그의 옆구리를 찌르고서 고개를 젓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라틸이 목소리를 높이자, 문밖에서 “백화입니다.” 하는 공손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풍을 갔다가 무슨 일이 있던 건지, 클라인이 갑자기 도끼눈을 떴다.

같이 갔다가 중간에 사라져버린 백화로 인해 벌어진 소동이 떠올라서였으나, 라틸이 이런 사정을 알 수 없었다.


“들어와.”

라틸이 허락하자, 바로 문이 열리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백화가 안으로 들어왔다.

라틸은 클라인과 대신관의 표정이 둘 다 이상하단 걸 눈치챘다. 아무래도 밖에서 백화와 관련해 무슨 일이 있던 듯했다.

하지만 백화는 그런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대신 라틸에게 공손히 물었다.


“폐하. 급히 중요한 보고를 드려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표정이 유난히 진지해서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여기서 하겠느냐. 아니면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백화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폐하께만 들려드리겠습니다. 폐하께서 듣고 판단하여 주시지요.”

  

* * *



“자이신 앞에서도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위험한 일인가 보구나?”

라틸은 백화를 데리고 하렘 안의 빈방으로 가 물었다.

백화는 라틸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말씀드려도 될 일 같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 판단은 제가 내리는 게 아니니까요.”

라틸은 백화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백화의 영리함도, 재빠른 눈치도 마음에 들었다. 심지어 그가 후궁이 아니란 점도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오로지 단 하나. 그가 성기사란 것뿐이었다. 그것도 성기사단장.

사실은 이 점도, 그의 성기사단장 위치를 이용해 여러모로 득을 보고 있으니 아주 단점은 아니지만.


“그래. 이야기해 봐.”

“실은 카지노에 갔을 때, 어떤 자들이 수상한 대화를 하는 걸 들었습니다. 레안 황자님 이름이 나오고 있었지요.”

“카지노?”

“예, 하지만 위험한 일에 후궁님들을 데리고 갈 순 없으니, 눈치를 보다 저 혼자 그자들을 쫓아가 보았습니다.”

“카지노?”

“예. 두 명이었는데, 둘 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서…… 어쩔 수 없이 한 명을 쫓아갔습니다. 한 사람은 수상한 부탁을 하고 있고 한 사람은 난처해하며 부탁을 받고 있었는데, 제가 쫓아간 건 부탁을 하던 쪽이었죠.”

“그러니까, 카지노에서?”

“예. 레안 황자에게 들어가는 식료품이요. 허락을 받고 정식으로 들어가는 식료품 말입니다. 그 사이에 허락받지 않은 무언가를 끼워 넣으려는 것 같았습니다. 부탁하는 쪽은 별문제 없는 물건이라 둘러대는데, 부탁을 받는 쪽은 혹시나 싶은지 난처해하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카지노에서.”

“예.”

라틸은 입을 다물고 관자놀이를 눌렀다.

자기 후궁들의 소풍 장소가 카지노라는 데 놀라야 할지, 백화가 한 레안 황자 이야기에 놀라야 할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백화는 라틸이 연거푸 카지노에 대해 물은 걸 뒤늦게 인지한 듯, 좀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클라인 님께서 대신관님이 카지노에서 딜러 일 한 게 궁금하다고 보고 싶다 하셔서요. 아시다시피 대신관님은 사람이 좋으셔서 그런 일을 잘 거절하지 못하시지요.”

“아, 클라인이.”

그래. 클라인이라면 그럴 수 있지. 라틸은 후궁들이 소풍 삼아 도박하러 갔단 충격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계속 말해봐. 수상한 자를 따라가서 어쨌지?”

“따라갔지만 헤어져 집에 들어간 후로는 아무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일부러 밤까지 숨어서 지켜보았지만 수상한 행적이 없어서, 우선 돌아왔습니다.”

“네가 쫓아간 걸 들켰을 가능성은…….”

“대화를 엿듣다가 잡히긴 했습니다. 둘러댔지만 경계심이 높다면 그래도 그 일을 그냥 지나치진 않을 겁니다.”

“계획을 변경할 수도 있겠군.”

신중한 사람이라면 그럴 것이다. 라틸이 만약 그런 입장이었더라도, 계획을 바꾸었을 것이다.

누군가 엿들어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짜여져 흘러갈 계획이 아니라면.


“그렇지요.”

‘흑림 암살자들을 보내서 지켜봐야겠다.’

“그 저택 위치가 어디지?”

백화는 품에서 지도 일부를 꺼내 내밀었다. 거기에는 그자의 집 위치가 동그랗게 표시까지 되어 있었다.

라틸은 지도를 받으며 흐뭇해져서 백화를 칭찬했다.


“자넨 정말 능력 있어. 대단해.”

“감사합니다.”

겸양하는 대신 백화는 기쁘게 칭찬을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잠시 라틸을 살피다가 비장하게 덧붙였다.


“전 폐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라틸은 ‘신을 배신하는 거라도?’라고 물을 뻔한 걸 참았다. 그건 당연히 아닐 테니. 그는 대신관을 지키되 따르지 않는 성기사이지 않는가.

라틸은 대신 감동받은 척 웃으면서 물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기쁘군. 혹시 뭐 가지고 싶은 거라도 있는가?”

질문을 던지면서도 라틸은 백화가 별 대답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도와서 기쁘다, 이 정도로 말하겠지. 아니면 신전에 좀 더 힘을 써달라 하거나.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러면 폐하. 대신관님의 방에서 하루를 보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라틸은 눈썹을 치켜뜨고 백화를 보았다. 백화는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성기사처럼.

그 모습을 보다가, 라틸은 자신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백화 경. 혹시 기분 나빠하진 말고. 뭐 하나 물어도 되나?”

“무슨 질문을 하시려고 미리 경고를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물으셔도 됩니다.”

“왜 굳이 성기사가 되었나?”

성기사가 되어서 백랑화술이라는 큰 집단의 단장 자리에 오른 걸 보면 상당히 능력 있긴 하지만, 다른 데 있으면 더 높은 자리에 올랐을 사람 같은데.

성기사단장이란 게 물론 아주 높은 자리인 건 맞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자리인 것도 맞지만, 그에 따른 부와 권력은 없는 자리 아닌가.

라틸의 질문에 백화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와 명백히 다른 표정이어서, 라틸은 자신이 그의 신앙심을 너무 무시하고 질문했나 싶어 미안해졌다.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그대가 대신관을 위해 하는 일들이 신기했을 뿐이라. 좋은 뜻으로.”

“괜찮습니다.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으니까요.”

말과 달리, 백화의 표정은 평소보다 좀 더 가식적이었다.


“전 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 * *



‘백화가 신앙심이 생각한 것보다 깊지 않다면, 내 편으로 완전히 끌어들일 수 있을까?’

백화가 돌아간 뒤. 라틸은 홀로 빈방에 남아 생각에 잠겼다. 하는 행동을 보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하지만 백화는 분명 어두운 존재들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신앙심은 모르겠어도, 어두운 존재에 대한 적개심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니 세속적이라는 점만 보고서 함부로 끌어들였다가는, 말 그대로 칼을 쥔 적을 품 안에 끌어들이는 꼴이 될 것이다.


‘음. 일단 잘 생각해보자. 서두르다가는 될 일도 망치기에 십상이니.’

 

* * *

다음 날 아침.

라틸은 타시르를 불러 백화가 해준 이야기를 알려준 뒤, 레안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려 한 그자에 대해 조사해보고, 또 행동을 계속 주시하라 지시했다.


“이쯤 되면 저는 관직을 하나 받아도 될 것 같은데요.”

“사랑해, 타시르.”

“하지만 아이는 다른 분과 만드셨죠.”

“그대는 별로 충격받지도 않았잖아?”

“그야 전 알고 있으니까요.”

“알다니?”

“전 세계에 호색한으로 알려진 폐하께서, 사실은 아무에게도 곁을 안 주시고 있단 걸?”

“!”

 


라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타시르가 방긋 웃고서 라틸의 이마에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뗐다.


“그래서 아직은 질투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만 방치된 건 아닌 거 같아서요.”

“하지만 그대는 진짜였더라도 질투하지 않았을 거 같은데.”

“필요하다면 합니다.”

“감정조절이 쉽게 되는 편인가 봐?”

“드러내는 건 잘 조절하는 편이지요.”

씩 웃은 타시르가 지도를 돌돌 말면서 밖으로 나가자, 라틸은 그의 입술이 다녀간 이마를 괜히 어색하게 문질렀다.

그러다 라틸은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서넛을 보았다.

서넛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서서 책상 위에 놓인 문서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걸 보자 라틸은 전에 시녀와 서넛이 주고받은 대화가 떠올랐고, 곧 역시 서넛의 말처럼 애런델이 오해를 한 거라 확신했다.

라틸을 사랑해서 온 게 아닌 후궁들도, 라틸이 다른 후궁을 더 아끼는 모습을 보이면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사랑이 없어도 질투는 가능하다.

하지만 서넛은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 * *

며칠 뒤. 드디어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 소식은 라틸이 기다리던 레안 황자에 관련된 소식이 아니었다.


“폐하. 퍼리스 황자님과 마차 사고가 난 상대 말입니다. 사고 이후에 퍼리스 황자님의 궁전에 머무르는 사람이요. 아무래도 밀로에서 온 사절단 일행 같답니다.”

“정말입니까?”

“네. 밀로 사절단이 몇 시간 내로 오갈 수 있는 옆 마을에서 머물고 있답니다. 일부러 사람들 시선을 피해 그곳에 있는 듯합니다.”

라틸은 인상을 찡그렸다.

밀로 공주. 단순히 국혼을 하고 싶어서 계속 사절단을 보낸 게 아니었나?

국혼을 거절당하자마자 마차 사고를 내서 황자의 곁으로 가다니.


‘역시 공주로서가 아니라 성기사단 단장으로서 계속 국혼을 시도한 건가.’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전에 온 단백 쪽은 차라리 처음부터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서 상대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저쪽은 둘러 둘러 접근하고 있으니, 오히려 의도를 알아내기가 어렵다. 저쪽 역시 둘러 둘러 접근하는 게 피곤하긴 매한가지일 텐데.


“접근…… 혼인 관계를 통해서 접근하려 든다……?”

“사적으로 접근하려 든단 건, 사적으로 캐낼 게 있단 뜻일까요?”

서넛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리 있는 말이라 여겨지는 듯, 퍼리스 황자에 대해 알려준 시종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퍼리스 황자 곁에 머무는 사람이 일반 사절이 아니라, 공주 본인일 수도 있겠네요. 사절단이 근처에서 못 떠나고 있는 점도 그렇고. 그 겁 많은 퍼리스가 내게 공주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 것도 그렇고.”

시종장과 서넛이 둘 다 입을 다물고 라틸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동자가 라틸을 표정 변화를 집요하게 뒤쫓았다.

약 15분 정도 후.

생각을 마친 라틸이 지시했다.


“데려와봐요. 직접 물어보게.”

‘그 속내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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