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라나문과 그들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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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화. 라나문과 그들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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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화. 라나문과 그들의 차이
2023.07.09.
타시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신기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전 결혼으로 빼도 박도 못하게 폐하의 편이 되었잖아요.”
“너무 적극적인데.”
“제가 수상합니까?”
타시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수상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적극적인 이유도 있고요.”
“이유? 뭐지?”
“들으면 기분 나쁘실 텐데.”
“말해봐라. 듣고 기분 나쁜 게 뭔가 궁금해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
“음. 그게요.”
타시르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지자, 칼라인은 이유를 듣기도 전에 기분이 나빠졌다.
“찾아보니, 로드들은 대대로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패배만 했더라고요. 그래서 나서는 겁니다. 뱀파이어들만 믿고 가만히 있자니 불안해서.”
“!”
과연 타시르의 예고대로 칼라인은 기분이 확 나빠졌다.
하지만 타시르의 의견은 그럴듯했다. 누구라도 자기가 몸담은 자리가 위태로울 것 같다면 손을 보태고 싶을 것이다. 타시르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결국 칼라인은 타시르를 빤히 쳐다보다가 수긍했다.
“네가 말한 그 위치엔 사람을 보내 확인해보지.”
“보내는 게 사람은 맞습니까?”
“확인하고 싶다면 너한테도 불러주고.”
“하하. 됐습니다.”
보나 마나 뱀파이어겠지. 손을 내저은 타시르는 여유롭게 뒷걸음질 치다가,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칼라인은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 * *
퍼리스 황자가 도착한 건 저녁이었다.
“퍼리스가?”
라틸은 막 집무실 밖으로 나가려다가 시종장에게서 그 보고를 들었다.
“예. 폐하의 임신 축하 선물을 들고 왔는데요. 선물만 놔두고 가라 할지, 아니면 만나보실지…….”
라틸은 잠시 생각하다 결정했다.
“같이 식사나 하고 가라 해요. 아, 라나문도 데려오고요.”
“괜찮을까요?”
“라나문은 아기 아빠니까. 이런 시간 가지는 것도 괜찮겠죠?”
“아니요.”
시종장은 빠르게 고개를 젓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퍼리스 황자님이요. 체하지 않으실까요?”
* * *
‘체할 것 같아…….’
퍼리스 황자는 시종장이 들어와 황제가 저녁 식사를 하고 가라 했단 말을 전하자 기절할 뻔했다.
눈만 마주쳐도 무서운데 같이 식사라니!
황제의 후궁 중 하나이자 아트락시 공작의 장남인 라나문도 함께 식사할 거란 말을 들었을 땐 차라리 나았다. 누나와 둘만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셋이서 식사를 하게 되자, 퍼리스 황자는 라나문이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가 되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속이 안 좋아. 벌써 체한 거 같은데.’
누나도 누나지만, 라나문은 정말로 차갑고 냉정하고 말이 없고 불편한 사람이었다.
외모는 저절로 탄식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그런 모습으로 서늘하게 쳐다보자 더 무서웠다.
“퍼리스. 퍼리스.”
“네, 네, 누나 폐하!”
“별궁에서 지내는 건 좀 어때?”
“좋, 좋아요!”
“부족한 건 없어?”
“없어요. 없어요. 정말로 괜찮아요.”
“내가 선물한 마차. 안 타고 왔더라?”
“죽을죄를 지었어요! 죄송해요!”
“…….”
그 탓에 퍼리스는 평소보다 배로 긴장해서, 라틸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겁에 질려 대답하고 말았다.
라틸은 그 마차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마차를 보내줄까, 물으려다가 퍼리스가 사색이 되어 외치자 머쓱해서 “그래.” 하고 중얼거렸다.
“화나서 한 말 아니니 식사해.”
“네. 네!”
* * *
결국 꽉 체한 채 집으로 돌아간 퍼리스는 가슴을 두드리면서 마차에서 내리며 시종에게 지시했다.
“약 좀 가져다줘.”
“폐하를 보고 오실 때마다 체하시네요.”
시종은 걱정스러워 중얼거렸다.
그런데 퍼리스가 느릿느릿 집 안으로 들어서고 있으려니, 낮에 본 다리 다친 공주가 다가오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퍼리스는 황급히 가슴에서 손을 떼고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네. 네.”
“감사 인사를 드리려 찾았는데 안 계셔서요.”
퍼리스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고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 누나 폐하를 뵈러 갔다 오느라고요. 누나 폐하께서 저기, 임신, 임신하셔서요.”
“임신했다고요?”
공주의 질문에 퍼리스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저기, 누나 폐하랑, 아, 아기, 아버지인 라나문 님이랑 같이 식사를…….”
퍼리스는 중간에 왜 자기가 이렇게 구구절절 말하고 있나 자책하고서 시종에게 도움의 눈길을 청했다. 퍼리스는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기에, 시종은 익숙하게 황자와 공주 사이로 쏙 들어가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황자님은 지금 속이 안 좋으셔서요.”
자리폴시 공주는 눈치 좋게 뒤로 물러나며 웃었다.
“그래요. 그럼 인사는 나중에 할게요.”
이윽고 시종이 황자를 부축해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공주는 눈을 빛내며 바라보다 고개를 기웃했다.
‘라나문이라면 대적자 아닌가? 황제가 대적자와의 사이에서 아기를 가졌다고? 로드……라면 그게 가능한가?’
* * *
한편, 클라인은 라틸이 한 말. ‘라나문은 품고 자신은 품지 않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알아내라 한 말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고민했다.
“바닐. 라나문에겐 있고 내겐 없는 게 뭐냐.”
“그런 게 있나요?”
“전 압니다, 전하. 이성이죠.”
“넌 닥쳐, 악시안.”
“하나 더 압니다, 전하. 아기입니다.”
“닥치라고!”
하지만 바닐과 악시안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바닐은 너무 편파적으로 클라인만 좋게 보아서 도움이 되지 않았고, 악시안은 그냥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클라인은 고민 끝에 가장 적절한 대답을 해줄 만한 사람을 찾아갔다.
“야 근육.”
대신관을.
“대신관님, 저 속세의 황자가 대신관님에게 저리 무엄하게 불러대는 걸 보니 신이 두렵지 않은가 봅니다.”
대신관과 함께 있던 백화가 스산하게 중얼거렸지만, 클라인에겐 백화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클라인 님?”
대신관은 기분이 상하지도 않은지 친절하게 웃으며 물었다.
바닐은 대신관이 화가 나서 저주라도 날릴까 걱정하다가, 가까스로 어깨에서 힘을 빼고 긴장을 풀었다.
클라인은 뚱하게 물었다.
“이봐 대신관. 나한테 이성적인 매력이 느껴져?”
“!”
그 말에 대신관은 눈을 커다랗게 뜨다가, 바닐을 쳐다보았다.
바닐은 서둘러 덧붙였다.
“대답은 해주시길 바라지만 생각하시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대신관님.”
대신관은 떨떠름하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클라인은 아까보다 좀 더 험악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라나문은?”
“그쪽도 별로.”
대신관이 이번에도 솔직하게 대답하자, 클라인이 재차 물었다.
“그럼 나랑 라나문 중에 골라야 한다면?”
옆에서 듣던 백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우리 대신관님이 꼭 그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까?”
“해야 해.”
“왜요?”
“난 지금 삼자의 치열한 시선이 필요하거든.”
“예?”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고서 털어놓았다.
“폐하께 왜 라나문…….”
“라나문?”
“라나문은 아기 아버지가 됐는데 난 못 됐냐고 물었거든? 그러니까 그 이유는 스스로 생각하라 하시더라고. 그래서 알아내는 중이야.”
백화는 인상을 구기고 단호하게 말했다.
“왜긴 왜겠습니까. 라나문 님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황자님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보다 더 강하고 똑똑할 거라 생각하셨기 때문이겠죠.”
직설적인 대답에 클라인과 대신관, 바닐, 악시안까지 얼굴이 벌게졌으나, 백화는 당당하고 태연했다.
클라인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그가 라틸에게 물은 건 ‘왜 라나문만 품고 나는 안 품으시냐’였다.
하지만 이 얘기를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 없으니 돌려서 표현한 건데. 백화가 저렇게 단호하게 나와 버리자, 꼭 자신이 부실한 사람처럼 느껴져 열이 받았다.
클라인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질문을 바꾸었다.
“폐하는 라나문을 자주 품으시지. 난 그 이유가 궁금한 거야.”
“그야-.”
백화가 또다시 세속에 물든 답변을 하려는 걸, 수행사제 구벨이 다급히 손으로 막았다.
클라인은 이번에도 사람들이 자기 말을 오해했단 걸 인지하고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꼭 자기가 밤에 엉망이라 황제가 라나문만 찾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하지만 그건 절대 아니었다. 황제와 자신은 동침한 적이 없으니, 당연히 라나문과 자신은 비교 대상도 아니다.
문제는 이를 알릴 수도 없다. 클라인은 결국 끙끙대다가 신경질이 나 외쳤다.
“그냥 난 이게 알고 싶어. 라나문의 어쩐 점이 나보다 폐하께 이성적으로 더 어필이 되는가. 더 매력적인가 하는 거!”
그 말에 대신관은 푹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저도 그걸 좀 알고 싶습니다, 황자님.”
“뭐?”
그 솔직한 대답에 클라인이 되묻는 순간. 백화가 짝 손뼉을 치고 웃으며 제안했다.
“이렇게 하지요. 같이 찾아봅시다, 그 답을.”
“뭐야 넌. 성기사단장이 왜 자꾸 이런 일에 끼어들어?”
클라인이 황당해서 시비를 걸었으나, 백화는 대답 대신 말을 이었다.
“사교계에서 바람둥이로 유명한 백작이 있습니다. 이일리스 백작이라고, 여자들이 아주 좋아하죠. 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어떻습니까?”
클라인은 자꾸 성기사단장이 끼어드는 게 짜증 났지만, 그 제안에는 솔깃했다.
확실히. 바람둥이라면 그래도 인기가 많단 거겠지. 그라면 라나문과 자신의 차이에 대해 알지도 모른다.
짧은 고민 후. 클라인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 그자가 어디 있는데?”
“저야 모르죠.”
“뭐야?”
분위기가 다시 험악해지기 전. 대신관이 주저하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사람. 제가 전에 있던 카지노 단골이었습니다.”
* * *
다음날.
대신관과 백화, 클라인, 구벨, 바닐, 악시안 이렇게 여섯 명은 바람도 쐴 겸 소풍을 다녀오겠단 서류를 올린 뒤 밖으로 나가 변복하고서, 대신관이 전에 근무하던 카지노를 찾아갔다.
“어…… 음…… 오늘 하루 딜러 일을 다시 하고 싶으시다고요?”
카지노 사장은 한때 VIP 딜러였던 대신관 겸 후궁이 찾아와 난데없는 부탁을 하자 당황해서 쩔쩔맸다.
“게다가 여기 이 초보자들을 데리고요?”
“나쁜 목적으로 온 건 아닙니다, 사장. 그냥 사람 하나를 정체를 감추고 만나서 뭘 물어보고 싶을 뿐이지요.”
“좋은 목적은 아닌 거 같은데요…….”
“사장은 그냥 못 본 척해주면 됩니다. 우리도 정체를 감추고 딜러 일을 할 테니까요.”
끙끙대던 사장의 앞에 악시안이 쓱 반짝이는 패를 보였다.
반사적으로 그 패를 본 사장은 흠칫했다. 그건 카리센 황족들의 문양이 새겨진 패였다.
그런 사람이 여기에 대신관과 함께 왔단 건…….
‘한 명은 황자구나. 카리센 황자야.’
사장은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가 거절할 수 없으리란 사실도.
* * *
“야 대신관.”
“여기선 대신관이라 부르면 안 됩니다.”
“그럼 뭐라 부르는데?”
“선배라 부르세요.”
“……야 선배. 그 바람둥이 고객이 오면 바로 나한테 말해줘야 해. 알았어?”
대신관이야 그렇다 쳐도, 초보 딜러를 다섯 명이나 넣을 수는 없다는 사장의 애원에 따라, 바닐과 악시안, 구벨은 일반 직원으로 위장하고, 대신관과 클라인, 백화 세 사람만이 딜러로 위장했다.
대신관이 익숙하게 칩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클라인은 초조하게 손님들을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온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라나문과 그의 ‘차이점’ 이란 것에 대해 알아내고 말 것이다.
“이봐. 이봐. 어디 봐? 카드 빨리 섞어서 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