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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화. 칼라인은 타시르가 신기하다 (351/367)


350화. 칼라인은 타시르가 신기하다
2023.07.05.



“자.”

퍼리스 황자는 어머니가 건넨 선물 상자를 받아 안았다. 두꺼운 리본을 감아둔 상자는 그리 무겁지 않았다.


“무엇인가요?”

상자를 흔들자 안에서 부스럭 작은 소리가 났다.


“폐하께서 임신하셨다더라. 크리안스 직물에 직접 자수를 놓아 만든 아기용 손수건이다. 가져다드리고 축하한다 말씀드려라.”

웃음기 섞인 다정한 목소리에 퍼리스 황자는 얼굴이 붉어졌다.


“폐하께 드리는 선물인데. 손수건만 드려도 괜찮을까요?”

“탄생 선물은 어차피 따로 드릴 거잖니. 그때 드릴 값비싸기만 한 선물은 뭘 드려도 묻혀서 티가 안 나. 진심을 담은 선물은 따로 드리는 게 좋다.”

퍼리스 황자는 어머니의 손가락에 감긴 붕대 몇 개를 보고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순박한 아들의 목소리에 나샤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샤는 선황제의 후궁 중 하나로, 지금은 관례에 따라 별궁 중 한 곳을 받아 그곳에서 아들과 지내고 있었다.

나샤는 허둥지둥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걱정스레 입을 다물었다.

퍼리스 황자는 좋게 말하면 순박하고, 나쁘게 말하면 조금 둔하고 무딘 편이었다. 이 때문에 아무도 그와 나샤를 경계하지 않았고 지지하지도 않았다.

안전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었지만, 문제는 대외적으로 그가 바보니 아둔하니 소문이 나 사교계에서 우스갯거리 취급을 받고 있단 점이었다.

한숨을 내쉰 나샤는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님, 제게 기대세요.”

“수도까지 다녀오려면 몇 시간은 걸릴 테니 나는 조금 쉬고 있어야겠다.”

“네. 침실로 모셔드릴게요.”

 

* * *

어머니가 자신을 보고 무슨 고민을 했는지 모르는 퍼리스 황자는 오랜만에 궁전에 들어가야 한단 이야기에 허둥지둥 갑갑한 옷을 입고 머리를 단장하고 아픈 신발을 신는 둥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표정에 맥이 빠져 있자, 시종은 옷 입는 걸 도우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궁전에 가시는 데 기쁘지 않으세요?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잖아요.”

퍼리스 황자는 주저하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난 누나 폐하가 무서워.”

“왜요?”

“그냥. 눈이…….”

“그래도 폐하는 이복형제자매들 중엔 황자님을 제일 괜찮게 여기시잖아요. 그러니 별궁 중에서 제일 좋은 궁전을 나샤 님과 황자님께 주신 거고요.”

“그런가?”

“그럼요.”

그러면 좋을 텐데. 목이 잘려 죽었던 이복형을 떠올린 퍼리스는 무서워서 떨리는 손을 억지로 감추었다.

생일에 누나 황제가 선물이라며 보내준 마차를 탄 퍼리스는 선물을 주면서 해야 할 말을 머리로 하나하나 다 떠올리면서 달달 떠느라, 마차가 움직이는 줄도 몰랐다.

그러다가 쾅 소리가 나며 마차가 거세게 흔들린 후에야 퍼리스는 놀라서 옆으로 엎어졌다.


“뭐, 뭐야? 왜 그래?”

퍼리스는 머리가 띵해서 고개를 젓다가, 허둥지둥 마차 문을 열었다.

마차는 멈춰 있었다.

마차 밖으로 나가자 마부가 건너편 마부와 삿대질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 게 보였다.

호위가 퍼리스를 발견하고 달려와 알려주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다른 마차와 부딪친 모양입니다.”

“어, 누, 누나 폐하한테 가야 하는데.”

“마차를 바꿔 타고 가야겠습니다, 황자님.”

고개를 끄덕인 퍼리스를 시종이 얼른 부축해주었다. 그런데 떠나려는 그들을 건너편 마차에서 내린 여자가 애타게 불렀다.


“우리 아가씨 좀 도와주세요!”

퍼리스가 그쪽을 쳐다보자, 마차에서 내린 여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훌쩍이며 애원했다.


“아가씨께서 다리를 다치신 거 같아요!”

“아…….”

퍼리스는 주저하다가 호위의 팔을 두드렸다.


“가봐.”

호위가 건너편 마차로 가는 것 같더니, 잠시 뒤. 그가 망토를 입어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는 여자를 어정쩡하게 안고 다가와 말했다.


“황자님. 이 레이디가 기절한 것 같습니다. 어쩌지요?”

충돌이 일어난 곳은 별궁 근처로, 바로 뒤가 황자의 궁전이었다. 퍼리스는 주저하다 지시했다.


“우선 안쪽으로 데려가고 의사를.”

“예.”

 

* * *

호위는 기절한 여인을 1층에 있는 손님방에 눕혔다. 여자의 시녀로 추정되는 여자는, 여자가 눕자 다급히 허리끈을 풀고 신발을 벗기고 망토 모자도 벗겨주었다.

퍼리스는 얼른 돌아서며 말했다.


“의사를 불러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러고서 나가려는데, 갑자기 낯선 맑은 목소리가 “안 돼요.” 하고 그를 붙들었다.

힘없는 목소리였으나 퍼리스는 멈추어섰다. 돌아보자 기절해 있던 여자가 가까스로 상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간절한 얼굴로 애원했다.


“의사를 불러오면 안 됩니다.”

“하지만 레이디, 다리가…….”

“전 밀로의 공주 자리폴시입니다.”

옷차림이나 마차를 보고 귀족일 거란 짐작은 했으나 설마 공주일 줄은 몰랐던지라 다들 놀라서 수군거렸다.

여자는 슬픈 눈으로 퍼리스를 응시하며 부탁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전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해요. 의사를 부르지 말아주세요. 제발요.”

  



* * *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날 때마다 귀가 간지럽다. 라나문은 소파에 앉은 채, 라틸이 진지한 눈길로 종이 넘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원래 하렘 안에서도 황제에 대한 소식은 자주 듣게 되었고 황제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나누게 되었지만, 가짜 임신 후로 그 빈도가 확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인가. 실제로 황제와 마주 앉아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음. 아기 아빠?”

그 기분은 황제가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순식간에 옆으로 밀려났다.


“예.”

라나문은 허리를 조금 앞으로 숙여서, 황제가 보고 있는 서류를 같이 보았다.

그건 라나문이 써 온 보고서로, 곧 있을 가을 축제에 대한 안건이 쓰여 있었다. 황제는 그걸 확인하던 참이었고.

황제가 시선을 들어 자신을 보자, 라나문은 그녀의 눈빛을 살폈다. 잘 했다고 부른 건가, 못 했다고 부른 건가.


“이거 직접 쓴 거 맞지?”

다음 말을 듣고서도 알 수 없었지만, 라나문은 일단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그 말에 황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라나문은 황제가 잘했단 뜻으로 부른 게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라틸은 “어…… 그게 말이지.” 하고 말을 끌면서 보고서를 몇 장 더 넘겨보다가, 괜히 자기 머리카락과 귀 사이를 긁적였다.


“마음에 안 드시는군요.”

라나문이 이를 눈치채고 중얼거리자, 라틸은 보고서를 덮고 무릎 위에 손을 올리며 멋쩍게 웃었다.

사실 입 밖으로 나오려고 한 말은 ‘넌 국서 자리에 안 어울리나 보다’였지만, 사기극 공범인 그와 굳이 싸울 필요는 없기에 참았다.

라나문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앞에 5페이지랑 뒤에 5페이지 빼고 다.”

“앞에 5페이지는 공백이고 뒤에 5페이지도 공백입니다.”

“……맞아. 거기를 얘기하는 거야. 공백을 제외하고 다.”

“!”

  

* * *

왜 다 마음에 안 든다는 거지? 라나문은 보고서를 들고 걸어가며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가 혹시 일부러 시비를 거는 건 아닐까. 그를 괴롭히기 위해서 일부러 일을 늘리는 건 아닐까.

어쩌면 따로 원하는 게 있어서, 그런 모양이 나올 때까지 그를 괴롭히려 하시나. 그러면 그냥 말로 표현하시는 게 낫지 않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다 들어서, 라나문은 무거운 걸음으로 옮겨갔다.


“라나문 님. 대체 안에 무슨 내용을 넣었기에 폐하께서 다 싫다고 하세요?”

“가을다운 것을 넣었는데.”

“어떤 거요?”

“가을이니 낙엽 진 단풍나무 아래에서 풍취 좋게 책을 읽자고. 단체로.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면서.”

“어후!”

“별로인가?”

“낭만적일 거 같아요, 도련님. 축제가 아니라면요.”

“!”

그런데 가을 축제에 대해 이야기하며 걸어가고 있자니, 하렘 출입구 부근에 꼴 보기 싫은 얼굴이 보였다.

칼라인이었다. 밤중에 자신과 나란히 누워 충격을 주고 간 인물. 곁에는 타시르도 있었지만, 라나문의 눈엔 그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라나문은 칼라인을 발견하자마자 반사적으로 멈춰 서고 말았다.

칼라인 역시 미간을 찡그리고 타시르가 떠드는 걸 듣다가, 라나문을 보자 표정을 굳혔다.


“으. 옆으로 피해 가요.”

카르둔은 얼마나 싫은지, 라나문에게 작게 요구했다.

아직도 카르둔은 방문이 열리고 난데없이 칼라인이 거기서 나올 때의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나문은 피하면 진다는 기분에, 칼라인을 피하는 대신 당당하게 곁으로 다가갔다.


“?”

그러고는 칼라인을 한 번 쳐다보고서 휙 돌아서서 가려는데, 칼라인이 그를 불렀다.


“사람을 보면 인사란 걸 해야지?”

타시르는 라나문에게 웃으면서 말을 걸려다가, 칼라인과 라나문의 분위기가 묘하자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을 번갈아 보았다.


“싸웠어요? 분위기 왜 이렇지?”

라나문은 타시르에게만 고개를 까딱해 인사하고는, 칼라인을 힐긋 서늘하게 보고서 돌아섰다.

인사하란 말을 들었지만 정면에서 무시하고 가겠단 태도에, 타시르가 “와.” 하고 작게 감탄했다.


“앞에서 무시했어. 굳이 앞으로 와서 무시하고 있어.”

반면 칼라인은 안 그래도 저놈과 게스타 때문에 화가 이마까지 치밀어 있는데, 타시르의 말처럼 라나문이 ‘굳이’ 앞으로 와서 무시하고 지나가자 더욱 기가 막혔다.

저 낯짝을 싫어하는 건 라나문이 아니라 자신이 더할 텐데. 지금 저놈이 뭐 하는 거란 말인가.

하지만 칼라인은 인내심을 발휘해 그를 잡지 않았고, 라나문은 카르둔을 데리고 지나갔다.

라나문이 멀어지자 타시르가 히죽 웃으면서 칼라인에게 물었다.


“안 그래도 나쁘던 사이가 왜 더 나빠졌습니까?”

“있다. 그런 게.”

“그런 게 뭘까요?”

타시르가 호기심에 더 눈을 빛내자, 칼라인은 관심을 끄라고 그의 눈꺼풀을 아래로 내려버렸다.


“이러고 있으니 설레네요.”

하지만 타시르가 웃으면서 속삭이자, 칼라인은 소름이 돋아서 도로 손을 떼야 했다.


“혹시 라나문 님이랑도 이러다가?”

“죽여버리는 수가 있다, 인간.”

타시르는 히죽 웃으면서 칼라인을 보다가, 그의 눈동자가 불그스름하게 변해 있자 두 손을 수달처럼 모으고 비는 흉내를 냈다.


“정체를 알게 됐다고 이젠 뭐 감추는 것도 없으시네. 죽이지 말고 살려주시지요. 전 인간입니다. 유리처럼 연약하다고요.”

능청맞은 모습에 칼라인은 치밀던 화가 허무해지는 느낌이 들어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됐고. 아까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봐라. 신전이 뭐 어떻다고?”

“별일이 아니라면 아닐 수도 있는데요.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말입니다.”

“일단 얘기해 봐.”

“신전 몇 군데에서 성기사단들이 단체로 이동을 했습니다. 동시에 이동한 건 아닌데, 비슷한 시기에 이동한 건 맞아요.”

“성기사단이.”

“그래서 가장 먼저 출발한 성기사단의 이동 거리와 가장 나중에 출발한 성기사단의 이동 거리, 중간쯤 있는 성기사단의 이동 거리 등을 비교해서 그 사람들이 같은 날에 모이게 된다면 어느 부근에서 만나질까를 계산해 보았는데요. 이게 공식이…….”

“결론만.”

“수학 못 하시는구나.”

“…….”

“하하. 못해도 되죠. 뱀파이어신데. 어쨌든 결론을 내니 한 군데 위치가 잡혔습니다. 그쪽에서 성기사단들이 단체로 모인 걸까요?”

타시르가 웃는 낯으로 칼라인을 바라보자, 칼라인은 감탄 반 의문 반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요? 별론가? 그리 중요한 정보가 아닙니까?”

그 오묘한 눈빛에 타시르가 웃으면서 묻자, 칼라인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중요한 정보 같은데. 별개로 궁금해서.”

“뭐가요?”

“우리는 선택권이 없다 치고. 너는 왜 이렇게 열정적으로 주인을 돕는 거지?”

“폐하의 후궁이잖아요.”

“하지만 사람이지. 보통은 주인을 받아들여도 그저 침묵하거나 모른 척하는 데서 끝날 텐데. 왜 이렇게 열심히 주인을 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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