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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화. 대신 화내줘 (349/367)


348화. 대신 화내줘
2023.06.28.


이런 문제엔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라틸은 클라인에게 해줄 대답이 궁해서 곤란해졌다.

실제 그런 이유가 있다면 몰라. 그런 것 따위 없으니까. 라틸은 누구와도 동침하지 않았다. 라틸이 클라인과 동침하지 않는 건 모두와 동침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틸이 대답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클라인의 표정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대답하기 곤란할 정도로 큰 차이가 있는 겁니까?”

“아니.”

“그럼요?”

“음…….”

결국 라틸은 대답을 옆으로 돌리기로 했다.


“내 생각에 클라인. 이건 네가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거야.”

“제가 말입니까?”

“그래. 누가 이런 걸 직접 말하겠어. 네가 연구해야 해.”

자신이 말하고도 너무 헛소리 같아서, 라틸은 슬그머니 클라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클라인은 꽤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 모습에 조금 미안해져서, 라틸은 괜히 다 식은 커피를 홀짝였다.

* * *



“라나문. 클라인과 사이가 많이 나빠?”

클라인과 좀 더 시간을 보낸 라틸은 명목상 ‘아이 아버지’인 라나문에게 찾아가 물었다.

라나문이 아이 아버지가 되었으니, 라나문과 보내는 시간을 좀 더 늘리는 게 남들 눈에 자연스러워 보일 거란 계산 아래 한 행동이었다.

라나문은 소파에 앉은 라틸의 뒤에서 굳은 어깨를 눌러 주다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전 바보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하.”

라틸은 그 대답에 무언가를 깨달은 듯 탄식했다.

라나문은 라틸의 목덜미를 눌러주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뜻이십니까. 그 아하?”

“깨달음을 얻은 표시?”

“뭘 깨달으셨는데요?”

“클라인이 왜 널 싫어하는지?”

“!”

라틸은 탁자에서 동그랗고 바삭한 이름 모를 과자를 집어 먹으면서 웃다가, 라나문이 맞은편으로 와서 앉는데 그 표정이 좋지 않자 과자를 도로 내리고 물었다.


“왜?”

좋지 않은 표정이라 해도 라나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오래 봐서인가. 기분 상해 한다는 정도는 좀 알아볼 수 있었다.

라나문은 단호하게 설명했다.


“어차피 후궁들은 다 제 적입니다. 폐하께서만 절 싫어하지 않으시면 상관없습니다.”

클라인이 자기를 싫어하는 건 아무렇지 않아 하더니. 라틸이 그 이유를 알겠다고 하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라틸은 웃음을 터트렸다.


“난 그댈 좋아해 당연히.”

“!”

“싫어하는 수준이 아니지.”

라나문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라틸은 그 휘어진 입매를 보며 아까 먹으려다 멈춘 과자를 입에 넣고 씹었다.


“그러면 상관없습니다. 누가 절 싫어해도.”

“하지만 라나문. 국서를 노리는 거라면 후궁들을 싫어해도 다 적대하진 않아야 할걸.”

“……타시르나 대신관 정도라면 친하게 지냅니다.”

라나문이 변명하기 위해 내뱉는 말에, 라틸이 다시 과자를 집으면서 또 아까와 같은 소리를 뱉었다.


“아하.”

그러더니 눈썹을 한 번 위로 올렸다가 내리면서 히죽 웃는다.

라나문은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황제의 태도가 마치, 이해 안 가는 생명체를 애써 이해해 보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 * *

그 시각. 므라딤은 충격에 젖어 흐느적흐느적 걸어가고 있었다.


“폐하의 아이라니. 폐하의 아이라니.”

그가 중얼거리면서 호수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동안, 티투는 그 뒤를 조급히 따라가며 재촉했다.


“지배자님. 지배자님. 얼른 되새김질하세요. 이건 까먹으면 안 됩니다.”

“잊어버리고 싶다, 티투야.”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어버리면 안 되는 일이잖습니까. 서약식 일처럼 잊어버리셨다가 또 붕어 취급을 당하신다고요.”

“서약식이라니? 내가 서약식을 했던가?”

“……얼른 되새김질하세요.”

므라딤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되새김질을 위해 잠시 멈추어서는 순간.

티투가 원치 않던 방해꾼이 나타났다.


“아가, 바빠?”

기르골이었다. 게다가 건들건들 다가오면서 입꼬리가 히죽 올라가 있는 걸 보니, 므라딤이 지금 뭘 하려는지 알고 고의로 오는 게 분명했다. 되새김질을 방해하려고!


“나랑 놀까?”

기르골이 와서 도발하자, 므라딤이 대번에 되새김질하려던 걸 멈추고 기르골을 노려보았다.


“왜 온 거냐!”

그러고는 무어라 말하려는 걸, 티투는 다급히 끼어들었다.


“빨리 되새김질하세요 지배자님. 그리고 너는 꺼져 기르골!”

다른 후궁의 시종이라면 아무리 뒷배 없는 기르골이라 해도 반말하며 꺼지란 소리는 할 수 없었겠으나, 피인어들에게 기르골은 공공의 적이었다.

게다가 티투는 자신들도 기르골도 인간이 아니란 걸 알기에, 인간들의 체계는 인간들 앞에서만 지키면 된단 생각이었다.

기르골 역시 티투가 자기에게 꺼지라고 하자, 화를 내기는커녕 더욱 유쾌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여기 아가가 놀아주려고?”

티투는 뾰족한 이를 드러냈다.


“우린 당신 아가가 아니야!”

“음…… ‘애기’라고 하면 너무 가깝게 들리지 않나? 우리 사이에?”

하지만 기르골이 불쾌해하는 내색은커녕, 떼쟁이 아이를 앞에 두기라도 한 듯 난처한 척 달래자, 티투는 더욱 화가 나서 고함치고 말았다.


“꺼지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꺼져버린 건 므라딤의 머릿속에 간신히 발을 걸치고 있던 임신 이야기였다.
 

 
기르골은 므라딤의 눈동자에 깃든 슬픔이 사라지며 눈빛이 맑아지는 걸 눈치채자마자, 손가락으로 그걸 가리키며 푸하하하 웃어댔다.


“하하하하! 저 붕어가 또 까먹었어! 하하하하!”

그 즐거워하는 모양새에 므라딤이 바로 인상을 구겼지만, 이미 기르골은 원하는 걸 얻은 뒤였다.

티투는 지배자가 모욕을 당한 데 분노해 얼굴이 새빨개졌으나, 기르골은 이제 볼일이 다 끝났는지 돌아서 가버리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노려보며 티투는 이를 악물었다.


“전 저놈이 정말 싫습니다! 정말로요!”

“그래. 나도 저놈이 싫다.”

므라딤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다가 티투에게 물었다.


“그런데 내가 뭘 까먹었단 거지, 티투?”

“…….”

 

* * *

그 시각. 대신관 역시 나름대로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은 채 멍하게 입을 벌리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난데없는 임신 소식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임신은 기쁘고 대단한 소식인데. 황제가 라나문과 아이를 가졌다고 하니 그리 기쁘지가 않았다. 기뻐해야 하는데.

아니, 기뻐해야 하는 게 맞나? 대신관으로서는 기뻐해야 하지만, 그 역시 후궁이었다. 후궁의 입장에서는…… 하지만 그는 대신관이고…….

머릿속에서 대신관의 자아와 평범한 사람의 자아가 치고받고 몸싸움을 시작했다.

백화는 대신관의 그 울적해 하는 모습을 보며 차를 마시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대신관의 맞은편 소파에 가 앉으며 말했다.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대신관님. 그렇게 속상해하고 할 때가 아니라고요.”

“어? 예?”

“폐하께서 아이를 가지셨다면서요. 그래서 시무룩해 계신 거 아니십니까?”

“예. 맞습니다. 좀……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좀 그러네요.”

“그러니까요. 시무룩해 있을 때도 속상해할 때도 아닙니다, 대신관님.”

“예?”

“분발해야지요.”

백화가 허리를 굽히고 두 손을 깍지 끼면서 눈을 빛내자, 대신관은 멍하게 있다가 자세를 바로 하며 물었다.


“예?”

그 얼떨떨한 모습에, 백화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이건 밀림입니다, 대신관님. 여긴 밀림이라고요. 뭐 하시는 겁니까. 정신 차리세요. 아예 후궁이 안 되셨으면 모를까, 여기 들어오셨으면 이런 건 각오하셨어야지요.”

“!”

“이렇게 된 이상 절대로 라나문 그자가 국서가 못 되게 막아야 합니다, 대신관님. 첫 아이의 아버지인데 국서까지 된다면 대신관님은 완전히 옆으로 밀려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대신관은 멍하게 눈을 끔뻑였다. 백화는 답답한지 제 가슴을 두드렸다.

대신관의 수행사제 구벨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백화 경은 너무 세속적인 거 같아.’

 

* * *

게스타는 창틀에 한쪽 다리만 걸친 채 창문에 이마를 대고 앉아 있었다.

카드를 만지작거리면서 마음을 좀 가라앉히려 했는데. 기르골이 카드를 뺏어가 버렸다.

그렇다고 카드를 새로 만들자니, 지금은 그럴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게스타는 마음을 정돈하기 위해 애썼으나, 웃으면서 라나문과 눈을 마주치던 황제가 자꾸만 떠올라 속이 아려왔다.

황제의 다정한 눈빛도 힘들었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라나문이 황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라나문은 황제를 사랑하지도 않고 그저 권력 때문에 여기에 온 자인데. 황제와의 사이에서 아이까지 두었다.


“전 정말 라나문이 싫어요.”

트리가 툴툴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쑥스러운 척 말릴 기운조차 나지 않아서 게스타는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그 대적자. 역시 죽여버렸어야 했을까.


“도련님……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라나문은 다른 매력은 없잖아요. 얼굴뿐이에요. 곧 폐하께서도 질리실 거예요. 그자는 성격도 차가워서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데, 어떻게 오래 총애하시겠어요?”

“…….”

“도련님. 머리 스타일을 좀 바꿔 볼까요? ……라나문 님이랑 비슷하게요?”

그런데 트리가 열심히 이런저런 말을 하는 사이로,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트리는 입을 다물고 게스타를 보았다.

게스타가 가만히 있자, 트리는 직접 나가서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문을 조금만 열고 고개를 내밀자, 뜻밖에도 칼라인이 서 있었다.


“게스타는?”

트리는 칼라인을 보자 흠칫했지만, 그가 칼라인을 멋대로 무를 권한은 없었다.


“잠시만요.”

트리는 어쩔 수 없이 게스타에게 가서 칼라인이 방문했단 이야기를 해주었다.


“돌려보낼까요, 도련님?”

그러고서 트리는 슬쩍 소원을 담아 게스타에게 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게스타가 창문에서 이마를 떼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니. 들어오라고 해.”

“네? 네.”

의외이긴 했으나 트리는 놀라지 않았다. 게스타는 워낙 착해서, 싫어하는 사람이 와도 거부하지 않고 되도록 다 만나주니까. 그 연장선이겠지.


“들어오시지요, 칼라인 님.”

트리가 문을 열자 칼라인이 들어왔다.

트리는 차를 타오려 했으나, 칼라인이 들어오자마자 게스타가 트리에게 나가보라 손짓했다.


“지금이요?”

트리는 차 한 잔도 손님에게 대접하지 않는 게 신경 쓰였지만, 칼라인의 표정도 차를 마시고 싶은 표정은 아니었기에 “예.” 하고 순순히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게스타는 창틀에서 일어나 커튼을 확 쳐버리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지금은 좀 바빠서…… 개인적인 부탁이라면…….”

“개인적인 부탁인데.”

“그러면 가시지요, 칼라인 님. 제가 지금은 누구 부탁을 들어줄 마음이 없어요…….”

그러나 칼라인은 가버리는 대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내게 해준 거.”

“예?”

“좀 뛰고 싶어서. 전에 네가 사막에 떨어뜨렸던 그거. 한 번 더 해줬으면 하는데.”

게스타는 의외인 부탁에 미간을 찡그렸다가, 곧 중얼거렸다.


“하긴. 뛰고 나면 마음이 좀 풀리겠지요.”

그러고는 이번에는 칼라인의 발밑이 아니라, 세 걸음 앞부분에 여우굴을 만들었다.


“고맙군.”

칼라인은 덤덤하게 인사하고서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방금 게스타에게 한 말은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사막에서부터 여기까지 전속력으로 하루 종일 뛰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질투심이 풀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질투심이 풀리지 않으면, 라나문, 대적자인 그 인간에게 무슨 화풀이를 하고 싶어질지 몰랐다.

칼라인은 엄청난 속도로 여우굴을 내려가며 정신을 최대한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애썼다.


“?”

그런데 평소보다 여우굴이 좀 짧게 느껴졌다. 그리고 여우굴 밖으로 온몸이 튕겨 나온 순간.

그는 어깨에 닿는 푹신한 감촉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놀란 칼라인은 눈을 그렇게 뜬 채로 앞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침대였다. 낯선 침대. 그리고 앞에 누워 있는 건…….


“칼라인?”

라나문이었다.

칼라인은 인상을 구겼다. 게스타 그놈이!


“칼라인? 그쪽이 왜 내 침대에 누워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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