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4화. 부정하는 사람 1번 (345/367)


344화. 부정하는 사람 1번
2023.06.14.



“라틸! 내 딸!”

식구들을 속인단 죄책감에 우두커니 누워 있다가, 라틸은 어머니가 다가오자 억지로 활짝 웃으며 외쳤다.


“엄마!”

하지만 그다음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라틸은 입만 뻥긋대다가 두 팔을 벌리며 또 외쳤다.


“임신!”

라나문과 가짜 임신 이야기를 나눌 때는 부끄럽고 어색하더니. 엄마 얼굴을 보며 가짜 임신 이야기를 하려니, 죄책감이 강하게 들었다.


“세상에.”

엄마가 제대로 감탄사를 하지 못할 정도로 놀라워하고 있어서 더욱 그런지도 몰랐다.


“와.”

라틸은 배 위에 다시 손을 올리고서 하하 또 어색하게 웃었다.


“어쩐지 머리가 계속 어지럽더라니. 요 며칠 막 속도 안 좋고 그랬거든요.”

엄마는 라틸의 손을 잡고 있다가 일어나서 머리를 꽉 끌어안았다. 라틸은 몸에서 힘을 빼고 엄마에게 안겨 있다가, 엄마가 놓아주자 다시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좋기도 한데. 걱정도 돼. 너무 빨리 임신한 건 아닌가 싶어서.”

“황제치고 빠른 편은 아닌데.”

“그래도. 일 년간은 행동에 제약이 생기잖니.”

엄마가 진지하게 걱정하는 모습에 더욱 죄책감이 생긴 라틸은 이번에는 시녀들을 보았다.

시녀들은 몹시 기뻐하면서도, 여기서 비명을 지를 수는 없다 보니 소리 없이 좋아하고 있었다.


“세상에, 우리 조그만 황녀님이 어느새 자라서…….”

유모는 감동적인지 눈시울이 붉어져 훌쩍였고, 시종장 역시도 얼굴이 붉어져서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는 모양이다.


‘아아. 이렇게들 좋아하다니.’

라틸은 더욱 죄책감이 깊어져서 일부러 아트락시 공작과 로르드 재상을 보았다. 두 사람 역시 입이 귀에 걸리긴 마찬가지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두 사람이 수시로 서로를 곁눈질하며 묘한 표정을 짓는다는 데 있을 것이다. 어째서인진 모르겠으나 둘 다 자기가 아이의 할아버지라 확신하는 듯했다.


‘서넛은 어디 갔지?’

그러다 라틸은 서넛이 이 자리에 없는 걸 알아차렸다. 아까 응접실에는 분명 있는 걸 봤는데.


‘여기 들어오기 불편했나?’

가족들끼리 있어야 한다고 여긴 걸까? 하지만 따지고 보면 유모까지는 가족이라 쳐도 시종장이랑 시녀들은 가족이 아닌데.

들어와서 이런저런 농담을 던지며 놀려대야 할 서넛이 보이지 않으니 좀 걱정이 된다.

하지만 서넛에게만 신경 쓰고 있기엔 주위 분위기가 너무 들떠 있었다.


“폐하.”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시녀들 중 하나가 부끄러운 듯 웃으며 물었다.


“어느 후궁께서 아기님의 아버지이실까요?”

그 질문이 나오자마자 모두가 조용해졌다.

임신하는 것까지가 라틸의 문제라면, 이후는 이제 후궁들의 문제였다.

국서가 없는 지금, 라틸이 굳이 아이를 옆에 두고 교육시키겠노라 선언하지 않는 한 아이는 아버지 쪽에서 양육하게 된다.

이 아이를 맡는 사람이 황제의 첫 번째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국서가 될 확률이 높아지며, 국서가 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국서조차 무시하지 못할 권력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르드 재상과 아트락시 공작은 긴장해서 라틸을 보았다.

아이 아버지를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서는 날짜며 아이의 얼굴, 머리색 등을 잘 살펴야 하겠지만, 사실 그런 것보다 더욱 비중이 큰 게 있었다.

황제의 선언이다.

아이가 인어로 태어나도 황제가 ‘이 애는 라나문 아이’라고 선언하면 그 애는 그냥 라나문 아이가 되는 것이었다.

일반 가정이라면 배우자의 다른 연인의 핏줄을 자기 아이로 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적겠지만, 이곳은 황실이었다.

황실에선 아이가 곧 권력이고 힘이었다. 황실에서는 자기 아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아이가 미래의 황제가 되지 못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인어가 태어나도 시기상 자신도 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 싶다면, 후궁들 역시 눈 딱 감고 자기 조상 중에도 인어가 있다고, 역시 내 애라고 우겨야 할 판인 것이다.

라틸은 로르드 재상과 아트락시 공작이 잔뜩 긴장해서 자신의 입만 쳐다보고 있자, 아이 아버지를 라나문으로 하지 말 걸 그랬나 잠시 후회했다.

하지만 라나문과 말도 맞추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내 생각엔…… 라나문 같아. 시기상.”

라틸의 말에 시녀들은 작게 비명을 질렀고 시종장과 아트락시 공작의 얼굴은 환해졌다.

어머니와 유모는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보다 라틸의 몸 상태가 더 신경 쓰이는 듯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로르드 재상은…….


‘음. 좀 미안해지네.’

하늘이 무너져 구름에 목이 졸린 표정이었다.

* * *



“참으로 다행이지 않나, 로르드.”

“전혀.”

“우리 라나문과 폐하는 둘 다 흑발이시니, 아기님도 흑발이시겠지. 자네, 우리 라나문 아기 때 보았나?”

“보았겠나?”

“못 보아서 안타깝군. 우리 라나문이 지금도 잘났지만 어릴 때도 잘났거든. 아기님이 우리 라나문을 닮았다면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아기 천사이신 거야. 얼마나 예쁠까.”

“흥. 자네 얼굴에 라나문 얼굴이 태어났듯, 라나문 얼굴엔 자네 얼굴이 태어날지도 모르지.”

“폐하를 닮아도 좋을 거 같아. 그러면 폐하와 선황후 폐하께서 아주 예뻐하시겠지. 누가 봐도 폐하의 아이란 티가 나는 아기님을 우리 라나문이 안고 있으면 얼마나 그림일까!”

“흥. 망작일걸!”

로르드 재상은 악담을 퍼부어댔지만, 아트락시 공작은 발에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붕 떠 있었다. 어떤 소리를 들어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로르드 재상은 아트락시 공작이 그렇게 굴수록 더욱 화가 났다. 라나문에게는 더더욱 화가 났다. 얼굴만 잘난 놈이 얼굴 가지고 폐하를 사로잡다니!


“자네 아들은 멍청하니까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할 거야. 자네 아들은 성격도 별로고 사교성도 없지 않나.”

“뭐야?”

“그런 성격에 아이를 제대로 기를 수가 없지. 아이가 울면 달래 주긴 하겠나? 아마 한 일 년, 아니, 육 개월 정도 아이를 기르고 있으면 폐하께서도 아시겠지. 자네 아들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단 걸! 그러면 아이 양육을 누구에게 맡길지 누가 알까!”

“이 자식이?”

그러나 아무리 기분 좋은 아트락시 공작이라도 정곡을 찔린 데는 아파할 수밖에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라나문은 굉장히 아름다웠지만 성격이 아주 별로였다. 라나문은 자기가 아이일 때도 다른 아이들을 싫어했다. 사실 아트락시 공작도, 라나문이 아이를 돌보는 건 잘 상상되지 않았다.

그 생각을 하자 아트락시 공작도 좀 초조해졌다. 로르드 재상의 말처럼, 라틸이 아이를 라나문 아이로 정하더라도 그 결정은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

나중에 라틸이 “음, 네가 친부가 아닌 거 같아.”라고 아이를 저 로르드 재상 놈의 아들에게 맡길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라나문을 친부로 두더라도, 양육은 다른 후궁에게 맡기거나!


‘절대로 안 될 일이지!’

다급해진 아트락시 공작은 황급히 하렘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왜 따라와?”

“따라오다니? 내 아들에게 가는 거네!”

“옆으로 돌아가!”

“자네야말로 돌아가게. 내 아들은 좋은 소식을 빨리 들어야 하지만 자네 아들이 들을 소식은 나쁜 소식 아닌가? 늦게 전해주는 게 좋을걸?”

“너! 이놈! 아트락시이이이이!”

 

 

* * *



“라나문! 라나문! 우리 아들! 자랑스러운 아들!”

라나문은 이젤 앞에서 호수 경치를 그리다가, 복도에서부터 들리는 요란스러운 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아버지라 해도 체통 없이 저렇게 밖에서부터 소리치자 불쾌했다. 라나문은 카르둔에게 얼른 안으로 모시고 오라 눈짓했다.

카르둔은 얼른 밖으로 나가 아트락시 공작을 방 안으로 데려왔다. 그렇게 들어온 아트락시 공작은 얼굴이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술이라도 드신 겁니까.”

그 모습에 라나문이 붓을 물에 적시며 묻자, 아트락시 공작은 껄껄 웃고서 다가와 라나문의 머리를 문질렀다.


“기특한 녀석. 나는 네가 태어난 날 알았다. 너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 될 거라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나문이 머리를 옆으로 치우며 묻자, 그 쌀쌀맞은 목소리에도 아트락시 공작은 그저 좋아하며 자랑했다.


“폐하께서 어지럼증을 느끼셔서 궁의를 불렀는데, 궁의가 진료해 보더니 그러더라. 폐하께서 임신하셨다고. 임신 초기라신다.”

라틸에게 이미 들은 바가 있던 라나문은 ‘아 그날이 오늘인가’ 싶어서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 덤덤한 표정에 아트락시 공작은 활짝 웃고서 한결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아이가 누구 아이일 거 같으냐?”

“제 아이겠지요.”

라나문이 희미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아트락시 공작은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알았어?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는데.”

“그야 최근에 폐하는 저와만 지내셨으니까요.”

“!”

라나문의 태연한 말에 아트락시 공작은 뿌듯해졌다. 이럴 수가 있나.

라틸이 라나문의 아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진 확신하기 어렵다 여겼는데. 아예 라나문과만 지내셨다고? 그러면 100% 라나문의 아이란 게 아닌가.

라나문은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자연스러울까, 생각하면서 이젤 판에 붓을 내려놓다가, 아버지가 훌쩍이자 놀라서 일어섰다.


“왜 우십니까.”

“나는, 나는 몰랐다. 내가 미래 황제의 할아버지가 될 거라고는. 그리고 내 아들은 황제의 아버지가 되는 거야.”

“아버지…….”

“이럴 줄 알았으면 네가 놀고먹게 둘 게 아니라 좀 더 공부를 시켰어야 했는데. 교양 공부라도. 난 네가…… 네가 그냥 놀고먹고 그렇게 살 줄 알았지.”

“아까는 제가 태어나자마자 대단한 사람이 될 줄 아셨다 했습니다.”

라나문은 훌쩍이는 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진짜로 아이가 생긴 게 아니란 걸 알아서일까. 정말로 묘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궁금해졌다. 언젠가는…… 이게 진짜가 될 수도 있을까?

라나문은 자신의 넓은 방 안에 작은 요람을 두고, 거기에 자신과 라틸을 반씩 닮은 아이가 누워 있는 상상을 해보았다.

황제는 업무가 끝날 때마다 아이를 보기 위해 찾아올 것이고, 그는 황제에게 국정을 팽개쳐두고 아이만 보러 오면 안 된다고 걱정하는 시늉을 할 것이다.

황제가 잠든 아이를 바라볼 동안 카르둔은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 줄 것이고, 라나문은 라틸과 대화를 나누면서 아이의 일과를 들려줄 것이다.

밤이 되면 황제는 또다시 그를 찾아올 거고, 그는 황제의 지친 하루를 위로해 줄 수 있을 텐데.

생각만으로도 심장에 눈을 채운 듯 뿌듯해져서, 라나문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들.”

그런 라나문을 대견하게 바라보다가 아트락시 공작은 진지하게 조언했다.


“지금부터 육아 공부를 해두자.”

“예?”

“로르드 그놈이, 네가 아이를 기르는 걸 보면 폐하께서 아이를 도로 데려가실 거라 하지 않냐. 솔직히 부정을 못 하겠어. 지금부터라도 연습하자.”

“!”

라나문은 미간을 조금 찌푸리고서,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다가 아트락시 공작이 방금 로르드 재상 이야기 꺼낸 걸 뒤늦게 눈치채고 물었다.


“로르드 재상도 이 일을 압니까?”

“알지.”

아트락시 공작의 입가가 만족스레 올라갔다.


“지금쯤 제 아들을 끌어안고 울고 있을 거다.”

 

* * *



“폐하께서 뭔가 잘못 아신 거다. 분명 그 애는 네 아이야. 느낌이 온다. 게스타. 아버지는 알아. 며칠 전에 네 엄마가 태몽을 꾸었거든. 태몽 아니? 화월국엔 태몽이란 게 있어서, 아이를 가지면 그 아이를 상징하는 꿈을 꾼다더라. 네 엄마가 태몽을 꿨어. 아버지는 확신한다. 그 애는 네 애다 게스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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