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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화. 놀란 사람 1번 (344/367)


343화. 놀란 사람 1번
2023.06.11.



“그럼 앞으론 계속 저와 주무셔야겠군요?”

라틸은 엉성하게 침대에 누운 채 라나문을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왜 그게 그렇게 되느냐?”

“아닙니까?”

“아닌 거 같은데.”

“절 가졌을 때, 아버지께선 일할 때와 어머니가 친구들과 어울리실 때 외엔 어머니 옆에서 다섯 걸음 이상 떨어지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전 그걸 보고 배웠습니다.”

“아니, 그때 넌 태어나기도 전이잖아. 뭘 보고 배워?”

이 사기꾼.


“배 속에서 보고 들었습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이 사기꾼. 거짓말쟁이.

라틸은 황당해서 그를 쳐다보다가, 자신이 누운 자세가 너무 엉성하고 이상해서 몸을 옆으로 돌렸다.

라나문은 라틸이 몸을 돌리자 얼결에 옆에 같이 눕게 되었다. 나란히 누워 서로의 얼굴을 보게 되자, 라틸은 아까보다 더욱 기분이 이상해졌다.

난 얘랑 애정 행각을 하러 온 게 아닌데. 거짓말을 같이하자고 온 거지. 라틸은 미간을 찡그렸다. 왜 분위기가 이렇게 됐지?

하지만 이 상황에 벌떡 일어나서 나가 버리는 것도 좀 이상했다. 부탁을 하자마자 쌩하니 나가 버리는 것만큼 기분 나쁜 일이 또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라틸이 입술을 내밀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자니, 라나문이 얼굴을 조금 더 라틸 쪽으로 붙이며 물었다.


“폐하.”

“응.”

“언젠가는…… 이게 진짜가 될 수도 있을까요?”

“!”

“그러면 기분이 이상할 거 같습니다.”

“그러게.”

라틸은 손을 자신의 배 위에 올렸다. 그러면 정말…… 그렇겠지.

라틸은 그러다 문득 라나문의 얼굴을, 완벽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한 그 얼굴을 빤히 보며 속삭였다.


“만약 우리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 아이가 널 닮았으면 좋겠다.”

“예. 저도 그렇습니다.”

“!”

먼저 말한 내용이긴 한데 설마 진짜로 동의할 줄은 몰랐다. 라틸이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라나문의 눈매가 살짝 휘어졌다.


“농담입니다.”

 

 

* * *

2주 후에 임신 발표를 하면 아마 궁전 전체가 시끄럽게 들썩일 것이다.

하지만 전국을 들썩이게 하진 않을 것이다. 발표하면서, 아직 초기이니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는 비밀로 하라 할 테니까.

비밀로 하라 해도 자기들끼리 수군수군 다 퍼트리겠지만, 전 국민이 알고서 기뻐했다가 두 달 뒤 슬퍼하는 것보단 나았다.


‘그럼 이제 문제는 밀로 공주인가.’

라틸은 손안에서 펜을 빙글빙글 돌리다 시종장에게 물었다.


“사블레 후작. 지금 밀로 사절단은 뭐 하고 지내고 있습니까?”

“폐하께서 대답을 뒤로 미루시니 좋은 상상을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렇군요.”

라틸이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장은 라틸의 책상 한쪽 옆에 서류를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폐하. 혹시라도 제안을 받아들이실 건지요?”

시종장은 아무래도 라틸이 이 제안을 거절했으면, 하는 눈치였다. 레안을 지지하다가 라틸에게로 온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리가요.”

이 때문에 시종장은 라틸이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흔쾌히 대답하자 안도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혹시라도 받아들이실까 봐 염려했습니다.”

“시종장은 레안이 공주와 결혼하지 않길 바라나 봐요?”

“예.”

시종장은 이것저것 덧붙이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으나, 설명은 전부 생략하고 단호하게만 대답했다.

라틸은 그 태도에 오히려 기분이 좋아져 히죽 웃었다.


“걱정 마요. 몇 년은 자택에 가둬둘 겁니다. 감금을 풀더라도 결혼 상대는 내 지지자 가문 중에 고를 거고요.”

그래야 혹시라도 허튼 생각을 하진 않나 계속 살필 수 있지.

* * *

혼담을 넣었는데 대답이 너무 오래 걸린다.

밀로에서 온 사절들은 좀 초조해하며, 그러면서도 희망을 부풀리면서 손님용 궁전에서 며칠을 보냈다. 이따금 윌랑 사절들을 마주치는 것 외엔 그리 할 일이 없는 나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시종장이 찾아와 대답을 전했다.


“폐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이유조차 덧붙이지 않은 깔끔한 거절이었다.


“거절하신다고요?”

사절단 대표는 조금 기분이 상해 되물었다.

레안 황자가 선황후 소생에 계승 서열 순위가 높은 강대국의 황자이긴 하지만, 은근하게 도는 소문으로는 선황후와 더불어 좋지 못한 일에 연루되어 황제의 미움을 샀다고 했다.

반면 자리폴시 공주는 타리움만큼의 강대국 출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통성 있는 왕녀였고, 성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이었다. 신분과 능력 모두를 가지고 있는.

그런데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하다니. 심지어 예의상 붙이는 거절의 이유도 없다니. 몹시 불쾌했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반면 시종장은 사절단 대표가 왜 저렇게 기분 나빠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당연한 투로 대답했다.


“레안 황자님께선 좋지 못한 일로 폐하의 진노를 사 자택에 감금되어 계십니다. 사실 더 큰 벌을 내려도 좋을 일이지만 폐하께선 하나뿐인 동복 형제인 데다 부친상을 겪은 지 오래되지 않은 터라 마음이 약해져 큰 벌을 내리지 못하고 넘어가셨지요. 이런 상황에 외국의 공주와 결혼시키다니. 당연히 곤란합니다. 밀로의 귀한 공주님을 같이 감금할 수는 없으니까요.”

둘러 대답하지만, 레안 황자와 결혼할 거면 같이 자택에 감금되어 있어야 할 거란 경고였다.

사절단 대표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 겉으로만 공손히 대답했다.


“그렇군요.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 대화를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던 밀로 공주의 시녀 겸 성기사단 부하는, 이후 자신의 방으로 가자 바로 책상 앞에 앉아 공주에게 전할 쪽지를 쓰기 시작했다.

-약혼녀 신분으로 여기 오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단장님.

열두 개 성기사단 단장들이 모이는 회담 후. 공주는 황제의 주변에 뱀파이어들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황제의 인척이 되려 했다. 인척이 못 된다면 예비 인척이라도.

그 방법은 아쉽지만 통하지 않을 듯했다.

* * *

밀로의 사절단이 돌아간 뒤, 라틸은 꽤 번거롭고 골머리 앓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들은 그냥 가버리면 끝이었지만, 그들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던져두고 간 화두는 그대로 남아버린 탓이었다.

일 년이 넘도록 수많은 후궁을 품었는데도 여전히 후계자를 두지 못한 황제.

황제가 후계자를 못 볼 경우 대안으로 자신의 자식을 양자나 양녀로 주어야 하는데, 아예 미혼인 레안 황자.

황족들에겐 후계자 문제가 아주 중요했다. 아무리 안정적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군주도 후손이 없다면 미래의 화근거리를 품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적통성 있는 후계자가 사라져버리면, 내분이 벌어지기 마련이니까.


“폐하, 결혼 날짜를 뒤로 미루더라도 레안 황자님의 약혼 상대라도 정해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폐하. 레안 황자님이 후손을 보는 건 황자님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황가의 안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 같습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면 황자님과 혼인할 만한 신분의 영애들이 모두 혼인해버리고 말 겁니다, 폐하.”

“우선 결혼을 시킨 다음, 황자님은 자택에서 계속 지내고, 황자비가 되실 분은 근처의 다른 저택에서 지내시면 어떨까요?”

대신들은 차마 황제가 수많은 후궁을 두고도 일 년이 넘게 태기가 없는 걸 지적할 수는 없으니 레안을 잡고 늘어졌다.

라틸은 잘못한 게 없단 걸 알지만 밀로 사절단에게 괜히 욕이 나왔다. 후궁들을 줄줄이 받아들이면서 대관식 이후 눌러뒀던 건을 이렇게 들춰 버리다니.

이쯤 되자 라틸은 빨리 가짜 임신 발표를 할 날이 다가왔으면 싶었다.

* * *



“대체 내 서약식은 언제 할 거요, 로드?”

므라딤이 이따금 머리카락이 물에 뚝뚝 젖은 채 나타나 채근하는 일이 계속되고, 대신들은 라틸에게 계속 레안 결혼 문제를 거론하며 채근하기를 며칠.

마침내 라틸이 임신 발표를 하기로 한 날짜가 다가왔다.

라틸은 회의를 하다가 좀 머리가 어지럽단 핑계를 대고서 회의를 평소보다 30분 빨리 끝마쳤다.

평소에는 없던 일이기에 대신들은 놀라서 라틸을 보았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머리가 많이 아프십니까?”

“궁의를 불러야겠습니다.”

“대신관님께 말씀드리는 게 어떨까요?”

사방에서 걱정을 쏟아내는 이들에게 괜찮다고 손을 젓고서, 라틸은 궁의를 불러오라 하고서 침실로 들어갔다.


“폐하께서 궁의를 불러오라 하시네!”

시종장은 라틸이 직접 궁의를 불러오라 하자, 진짜로 황제가 몸이 안 좋은가보다 싶어 얼른 시종들을 채근했다.

라틸은 침실에 누운 채 궁의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잠시 뒤 궁의가 들어오자, 라틸의 침대 주위를 지키고 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물러났다.

궁의는 진료 가방을 탁자에 놓으며 라틸을 힐긋 보았다. 라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서넛은 응접실 소파에 앉지도 못하고서 초조하게 소파 뒤만 왔다 갔다 이동했다.

응접실 안에는 라틸이 머리가 어지럽다며 궁의를 불렀단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시종장, 유모, 시녀들, 선황후, 서넛, 그리고 라틸의 대신인 동시에 사적으로도 얽혀 있는 아트락시 공작과 로르드 재상 등까지.

친하지 않은 이들은 서로서로 눈치를 보면서 말없이 굳게 닫힌 방문만 바라보았다.

그나마 몇 마디 나눌 만큼 가까운 건 유모와 선황후, 시종장과 아트락시 공작 정도였으나, 유모는 선황후가 레안을 편들었던 일로 응어리진 마음이 아직 풀리지 않았기에 사근사근하게 말을 붙이지 못했고, 선황후는 선황후대로 딸이 아프다는데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진료를 기다릴 기분이 아니었다.

시종장은 로르드 재상의 눈치를 보느라 아트락시 공작과 마음껏 대화를 나누지 못했고.

그때였다. 안쪽에서 무언가 소리가 났다.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일어났고, 서 있던 사람들도 다들 초조하게 안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진료 가방을 챙겨 든 궁의가 응접실로 나왔다.

뜻밖에도 그녀의 표정이 밝자, 사람들은 의아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중 가장 신분이 높은 선황후가 물었다.


“폐하께선? 괜찮으신가?”

궁의는 선황후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고서 활짝 웃었다.


“축하드립니다, 선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임신하셨습니다.”

“?”

그녀가 대답한 말이 너무 얼떨떨하고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모인 사람들은 대번에 반응하지 못했다.

선황후 역시 딸이 어디 아픈 건 아닌가 싶어 걱정스레 물었다가 들은 대답에 잠시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곧 그녀의 눈꺼풀이 커다래졌다.


“폐하께서 아이를?!”

궁의는 2주 동안 열심히 연습한 미소를 꾸며내며 신이 난 척 말했다.


“네. 하지만 아직 초기이니 무조건 안정하셔야 합니다.”

“!”

그제야 선황후는 기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해서 궁의가 닫지 않은 방문을 바라보았다. 시종장도 기뻐서 선황후를 보며 “세상에 폐하!”하고 외쳤다.

요 몇 주간 라틸이 대신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아는지라, 누가 아이의 아버지인 줄은 몰라도 일단 이 소식에 무척 기쁜 듯했다.


“폐하께선? 지금 주무시나?”

선황후가 다급하게 묻자, 궁의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궁의가 알려주기 전에, 라틸이 먼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들어와도 돼요.”

라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응접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우르르 황제의 침실로 들어갔다.

아직까지는 아트락시 공작과 로르드 재상도 기뻐 보였다.

궁의는 사람들의 밝은 표정을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나가려다가, 어두운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서 방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는 기사단장 서넛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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