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가짜 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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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화. 가짜 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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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화. 가짜 임신
2023.06.07.
유모는 라틸이 뱉은 말에 당황해서 쩔쩔맸다. 갑자기 가짜 임신이란 사기극을 꺼내자 당혹스러운 듯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폐하께선 황제시니…… 괜찮지 않을까요?”
사기극이니 도덕적으로 옳지 않겠지만, 그녀는 누가 뭐래도 무조건 라틸의 편이었다.
게다가 밀로 사절단이 레안 황자에게 혼담을 넣은 일이 엉뚱하게 ‘폐하께선 후궁들이 그렇게 많은데, 일 년이 지나도록 임신이 안 되시네. 괜찮은 건가?’로 번져가는 건 유모 역시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라틸이 몇 년간 대신들에게 덜 볶인다면 그녀는 찬성이었다.
라틸은 일단 유모가 찬성하자, 가짜 임신을 꾸미게 된다면 누구누구의 도움이 필요할지 계산해보았다.
‘담당 궁의한텐 말해야 해. 그래야 말을 맞춰 주니까. 그리고…… 아아. 그래. 내 후궁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빠 역할을 할 한 명하고는 말을 맞춰야지. 하지만 맞춘다면 누구랑?’
라틸은 고민하다가, 일단 궁의를 불러 물어보았다.
“궁의. 자연 유산될 확률이 높나?”
궁의는 라틸의 부름을 받고 왔다가, 유산이란 이야기에 화들짝 놀라 라틸을 바라보았다.
“폐, 폐하?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밀로 공주가 레안 황자에게 혼담 넣은 일이 이상하게 나한테 불똥이 튀었어. 내가 많은 후궁을 데리고서 일 년이 넘도록 임신하지 못하는 걸 수상하게 쳐다보잖아.”
“아. 그러면 건강에 좋은 약을 지어 드릴까요?”
라틸은 주저하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안 먹어도 괜찮아. 애초에 후궁들과 동침한 적이 없으니 임신이 될 리가 없지. 그런 쪽으로는 염려하지 않아.”
궁의는 두 번째로 화들짝 놀라 라틸을 바라보았다.
“예?! 그, 그 많은 후궁들을 두시고서…….”
궁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면 왜 그렇게 후궁은 많이 두셨나, 의아한 얼굴이었다.
“세상에. 정말로 놀랍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분들을 두시고요.”
“여러 가지 일이 많았으니까. 완전히 자리 잡기 전에 아이를 가졌다가, 내가 입덧을 심하게 하는 체질이라거나, 배가 많이 아픈 체질이라거나 해서 제대로 국정을 볼 수 없으면 안 되잖아.”
라틸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궁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저도 임신 기간 내내 입덧이랑 근육통이 아주 심한 편이어서. 뭘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다행히 궁의가 라틸의 상황을 이해해주는 듯하자, 라틸은 안도하면서 조금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궁의. 가짜로 임신했다고 발표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거든.”
라틸이 자연 유산 이야기와 동침하지 않은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이 화제를 짐작한 듯, 궁의가 이번에는 비교적 침착하게 침만 삼켰다.
“일단 임신했단 것만 알리면 대신들도 내가 아이를 못 가지는 거 아니냐, 뭐 이런 불안감이 사라질 거야. 그러면 이삼 년은 조용하겠지. 그 안엔 나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테니, 그땐 진짜 아이를 가지면 돼. 어때?”
물론 레안을 결혼시킨다면 굳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쪽이 낳은 아이를 양자나 양녀로 들일 수 있으니.
하지만 라틸은 그럴 마음 역시 없었다. 라틸은 레안을 최소 몇 년간은 더 자택에 가둬둘 생각이었다.
“으음…….”
“전에 얼핏 듣기로 자연 유산하는 사람이 많다 들었어. 맞는가?”
“네. 임신 초기에는 자연 유산이 많이 됩니다. 그래서 그 시기에는 정말로 각별하게 조심해야 하지요.”
“내가 지금, 아니, 한 다음 주, 아니, 너무 교묘한가? 그럼 다음다음 주쯤에 임신인 걸 알게 된다면…… 음…….”
라틸이 잘 계산이 되지 않아 멍하게 쳐다보자, 궁의는 한숨을 내쉬고서 알려주었다.
“4주 차라고 하시면 될 겁니다.”
“어, 그러면 그때 임신했다 발표하고서. 한 달이나 두 달 정도 시기를 보다가, 일이 바쁜 날이 오면 내가 사흘 정도 밤을 새워서 일할게. 그 후에 그대가 자연 유산이 됐다고 발표해줄 수 있을까?”
궁의는 라틸은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러겠습니다.”
“고맙네!”
라틸은 활짝 웃고서 궁의에게 물었다.
“뭐 가지고 싶은 건 없나?”
* * *
궁의는 2주 뒤에 라틸을 검진한 다음 임신을 알리기로 했다.
유모도 도와주기로 했고 궁의도 도와주기로 했다. 그러니 이제 필요한 건 아이 아빠였다.
라틸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누구에게 아빠 역할을 부탁하는 게 좋을까 고민했다.
라틸이 여러 후궁들과 동침하며 지냈다면 사실 아이가 태어나 얼굴을 확인하기 전에는 누가 아빠인지 알기 어려울 것이다.
그조차도 아기가 라틸 자신만 닮았다면, 누가 아빠인지 평생 모르고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틸은 아직 그 누구와도 동침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제대로 일을 꾸며내려면, 그중 한 명과는 말을 맞추어야 했다.
‘클라인은 너무 입이 가벼워. 안 돼. 대신관은…… 뭔가 대신관이라서……. 타시르? 타시르는 잘해줄 것 같긴 한데…….’
그쪽은 너무 연기를 잘해줘서 사람을 찔리게 할 것 같다. 라틸은 일단 머릿속으로 세 명은 지웠다.
‘기르골? 아니, 기르골은 후궁이 된 지 얼마 안 됐잖아. 시기적으로 안 맞으니 제외이고. 칼라인…… 어? 그런데 칼라인은 뱀파이어잖아. 뱀파이어도 아이를 낳을 수 있나?’
라틸은 눈을 깜빡이다가 작게 노트에 칼라인, 기르골 둘을 적어두었다. 나중에 물어보아야겠다.
‘일단 칼라인은 제외하면 게스타? 음. 게스타랑 그런 얘기 하기는 좀 민망해. 게스타도 부끄러움이 많으니까.’
이래저래 다 제외하고 나자 라나문이 남는다.
‘좋아. 라나문으로 하자.’
라틸은 생각해보다가 딱히 걸리는 게 없자, 라나문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게다가 대적자 건 때문에라도 라나문과는 가까워져야 한다.
사기극에 동참시킨다고 해서 가까워지진 않겠지만, 라나문이 ‘나와는 동침하지도 않으시면서 다른 후궁과는 아이를 가지시다니’라고 충격받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좋아. 이러면 나한테 튄 불똥은 일단 끌 수 있겠지.’
* * *
그날 밤.
라틸은 포도주를 들고 라나문을 찾아갔다.
라틸이 찾아올 거란 말을 들은 상태라, 라나문은 방문 바로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자, 편안한 실내복 차림을 한 라나문의 모습이 나타났다.
“폐하. 오셨습니까.”
라틸은 그에게 포도주를 건네다가, 알코올이 술병을 입에 대기도 전에 먼저 핏줄에 들어온 기분을 느끼고 얼굴이 붉어졌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니다.”
게스타에게 이런 부탁을 하면 민망할 것 같아서 라나문에게 왔는데. 막상 라나문에게 이런 부탁을 하려니, 그것 역시 민망했던 것이다.
‘하지만 해야 해.’
라나문이 라틸의 겉옷을 받아주면서 그의 손가락이 목덜미를 훑고 가자, 라틸은 반사적으로 등을 움찔하고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라나문은 그런 라틸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라틸의 겉옷을 의자에 걸어두었다.
“요즘은 정말로 제게 자주 찾아오십니다. 카르둔 일로 당분간 안 오실 줄 알았는데요.”
“네 잘못이 아니잖아. 오히려 기르골 복수에 휘말려 피해자가 될 뻔했지.”
라틸은 탁자 앞으로 가 앉았다. 탁자 위에는 몇 가지 간단한 다과가 차려져 있었다. 개중에는 하트 모양을 한 분홍색의 귀여운 과자도 있었다.
라틸은 괜히 그 과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라나문이 맞은편에 앉는 기척이 나자 슬쩍 입을 열었다.
“실은 라나문. 이번엔 네게 부탁할 게 있어서 왔다.”
라나문이 포도주에서 코르크 마개를 빼내며 라틸을 보았다.
“말씀하시지요.”
“조금 곤란한 부탁인데.”
“괜찮습니다.”
라나문이 마개를 옆에 두고 라틸 앞의 잔에 포도주를 따르는 걸 보며, 그의 차갑고 태연한 목소리를 들으며 라틸은 떨리는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그래. 같이 연극을 해달라고 찾아온 거잖아. 떨 거 없어. 게다가 원래도 내 후궁인걸.
“밀로에서 사절단이 찾아온 이야기는 들었지?”
“예. 레안 황자님에게 청혼을 했다고요. 받아들일 생각이십니까?”
“거절할 생각이야.”
라틸이 바로 대답하자, 라나문이 의외인 듯 라틸을 바라보았다.
“대답을 미루고 계시기에 고민 중인 줄 알았는데. 이미 결정하셨군요.”
“레안을 당장 다른 나라에 보내기도 좀 그렇고. 아직 감금 상태를 풀어주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죄 없는 레안 아내를 같이 감금시킬 수도 없잖아.”
‘무엇보다, 그 밀로 공주가 성기사단 단장이란 것도 아주 신경 쓰이고.’
라나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뭘 부탁하시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대신들이 일 년이 지났는데도 내가 임신하지 않은 문제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
“!”
라나문은 우아하게 포도주를 마시다가 쿨럭 반쯤 도로 뱉었다. 사레가 들렸는지 그가 잔을 내려놓고 급히 가슴을 두드렸다.
“괜찮아?”
“괜찮, 습니다. 좀 놀라서.”
라틸은 손을 뻗어 그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려주었다. 사레가 들린 탓에 라나문은 얼굴이 붉어져서 꼭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아니겠지만.
“그런데 그걸로 제게 부탁하실 거라는 게……?”
“대신들이 내가 불임인가 아닌가에서 신경을 쓰지 않게 하고 싶다. 그래서 다음다음 주쯤에 임신했다고 할 생각이야.”
“!”
“가짜로.”
“!”
연달아 두 단계에 걸쳐 라나문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라틸은 새 잔에 새로 포도주를 따라 그에게 건네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삼 개월쯤 지나서 자연 유산되었다고 말할 생각인데. 그 사이에 그대가 아이 아빠 역할을 좀 해줄 수 있을까?”
“!”
놀랍게도 라나문의 눈이 세 번째로 더 커졌다. 라나문은 라틸을 잠시 넋 놓고 보다가, 라틸이 포도주잔을 흔들자 가까스로 그걸 받아들었다.
하지만 마시는 대신 잔을 도로 내려놓고 손으로 꼭 붙잡기만 했다.
라틸은 그가 무어라 말하길 기다렸지만, 라나문은 입을 열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듯 눈동자만 내리깔고 있을 뿐.
하지만 내리깐 눈꺼풀 위로 긴 속눈썹이 가끔 잔잔히 떨려서, 그가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라틸은 슬쩍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싫으냐? 싫으면 다른 사람…….”
“제가 하겠습니다.”
“어 고마워.”
갑자기 나온 허락에 라틸은 얼결에 인사하다가, 뒤늦게 그의 대답을 인지하고 어깨에서 힘을 쭉 빼며 활짝 웃었다.
“정말이냐?”
라나문은 자기가 방금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모르겠다는 듯 라틸은 힐긋 보다가, 다시 포도주잔을 꼭 잡고서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 첫날밤을 보내고 선물을 보냈을 땐 바로 거절하기에. 이번에도 거절하면 어쩌나 싶었다.”
라나문이 차갑게 쳐다볼 줄 알았으나 그는 그러는 대신 어색하게 자기 목덜미를 만졌다.
긴 목을 긴 손가락이 훑고 지나가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특히 목덜미가 붉어서 더더욱.
라틸은 머쓱하게 웃고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고 쥐었다.
“고마워. 네 덕에 안심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겁니까?”
“임신 발표를 할 때 네 아이인 것 같다고 말할 거야. 그 시기에 너랑만…… 응. 동침했다고!”
라틸이 부끄럽지 않은 척 말하려다가 지나치게 크게 외쳐 버리자, 라나문의 목덜미가 조금 더 붉어졌다.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할지…….”
“저기, 나도 잘 모르겠다. 기뻐서 웃고 다니면 되지 않을까?”
라나문은 주저하다가 일어섰다. 얼결에 라틸이 따라 일어서자, 라나문은 라틸의 배 위에 슬그머니 손을 올리더니 어색하게 물었다.
“이렇게 하면 될까요?”
“뭐, 뭐를?”
“기뻐할 때 자세가…….”
기뻐할 때 자세도 정해야 하는 건가? 그냥 기뻐하면 되는 게 아닌가? 라틸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라나문을 보았다.
라나문은 라틸이 얼떨떨해 있자 슬그머니 라틸을 안아 올리더니, 침대 안쪽에 눕혀주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