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며칠의 평화 뒤에 따라온
(342/367)
341화. 며칠의 평화 뒤에 따라온
(342/367)
341화. 며칠의 평화 뒤에 따라온
2023.06.04.
“네게는 몹시 실망했다.”
라나문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지만, 카르둔은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카르둔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하면 그런 일을 하지 말았어야지.”
“……죄송합니다.”
“그런 일을 할 땐 죄송하단 생각이 없었나 보군.”
“죄송합니다, 도련님.”
카르둔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라틸이 내린 감봉도 가슴 아픈 벌이지만, 일단 숙식이 제공되는 곳이고 생필품도 다 나오니 당장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라나문의 냉담해진 시선은 견디기 어려웠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며 그래도 라나문의 주변 타인중에는 가장 신뢰받고 있다 여겼는데. 이런 일로 라나문이 자신에게 실망했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제가 도련님께 폐를 끼쳤습니다.”
라나문은 카르둔이 싹싹 비는 걸 보다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눈살을 구겼다. 말로만 실망했다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실망했다.
후궁들 사이에 암계가 없으리라 여겨 실망한 건 아니었다. 권모술수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곳이기도 하고.
하지만 카르둔이 쓴 방법은 너무 치졸했다. 치졸한 방법을 쓴다면 최소한 들키지 말기라도 해야지. 그걸 또 그대로 들키다니.
“그자들 얼굴이 이상하게 가십지에 실려 봐야 뭐 한다고. 폐하의 총애는 가십지에 올라오는 인기 순위와는 전혀 상관없단 걸 모르나.”
“죄송합니다, 도련님…….”
카르둔의 얼굴이 벌겋게 질렸다. 이대로 라나문에게 미움을 사서 측근 자리에서 쫓겨나면 어쩌나 불안했다.
그는 평생, 그야말로 아주 어린 시절부터 라나문과 맞춰오며 살아왔기에, 라나문 곁에서 떨어지게 되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다행인 건, 라나문에게도 이건 마찬가지란 점이었다.
“실수도 잘못도 누구나 하니 용서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라나문이 화를 풀지 않은 목소리로 아까보다는 누그러진 듯 말을 하자, 카르둔은 기대감을 품고 라나문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대신, 기르골에게 가서 직접 사과하고 와라.”
“!”
* * *
아페라는 비질을 하다가, 고급스럽지만 단순한 차림을 한 낯선 청년이 기르골에게 무어라 말하는 걸 보고서 행동을 멈추었다.
‘누구지?’
아페라는 호기심을 느끼고 귀를 기울였다. 기르골을 유혹하려면 무엇이든 그에 관해 많이 알아야 하니까.
“라나문 님께서 기르골 님 얼굴을 엉터리로 잡지사에 알린 일을 기르골 님께 직접 사죄하고 오라 하셨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속이 좁아 한심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잡지사? 엉터리?’
청년이 기르골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걸 보고서, 아페라는 며칠 전의 ‘엉터리 초상화’ 사건을 떠올렸다.
‘저 사람이 범인이었구나.’
기르골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심드렁한 표정인 데다 말을 듣는 족족 청년의 표정이 창백해지는 걸 보니, 그리 좋은 대답을 들려주는 것 같진 않았다.
아페라는 속으로 감탄했다.
‘라나문 님은 대범하고 정직하시구나.‘
자기 아랫사람이 잘못을 저지른 걸 알자마자 바로 인정하고 사과하게 시키다니. 아페라의 머릿속에 다시 한번 그날 호숫가에서 본 수려한 미남의 모습이 지나갔다.
하지만 라나문을 떠올리며 행복해진 마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아래로 쑥 내려갔다.
“온실 안에도 아직 못 들어가고 지낸다 들었다.”
윌랑 왕자가 그녀를 불러서 한 말 때문이었다.
“75억 퀘펜짜리 의뢰를 받았으면 일은 잘 처리해야 하지 않나?”
맞는 말이어서 아페라는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기르골은 저뿐만 아니라 모든 하인을 온실 안에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왕자님. 일부러 그가 나온 가십지를 온실 앞에 두어서 자극해보려 했지만 그래도 꿋꿋하고요.”
“몰래 들어가 보면 어떨까?”
“다른 하인 하나가 일 때문에 허락 없이 잠깐 들어갔는데, 그것조차 알아내서 바로 혼을 냈답니다. 기르골의 시종이요.”
“75억 퀘펜짜리 의뢰비가 아깝군!”
아페라는 힘없이 대답했다.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합니다, 왕자님.”
* * *
가십지 사건으로 잠깐 떠들썩한 이후, 다시 며칠간 평화가 찾아왔다.
카르둔이 기르골에게 직접 사과한 걸 들은 라틸도 그 문제는 더 거론하지 않았고, 기르골 역시 화가 풀린 듯 보였다.
“카르둔이라고, 라나문의 시종이 찾아와서 내게 사과하고 갔소. 내 얼굴을 이상하게 그려서 잡지사에 줬다더군.”
므라딤은 뒤늦게 그 사건에 관해 알게 되었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개의치 않는다고 했소. 인간들은 이상한 데 신경을 쓰는군.”
“이제 안 거야? 잡지에 실리고 난리 났다던데.”
“물 안에선 잡지를 볼 수 없소. 물에 젖으면 흐느적거리다 찢어지니까.”
“그래도. 네 얼굴이 이상하게 나왔다는데 화가 안 나나 봐?”
“그건 종이요. 내 얼굴이 아니오.”
므라딤이 대범하게 굴자 기르골이 쪼잔해 보이는 상대적 효과가 발생해서, 라틸은 자꾸 웃음이 나와 난감해졌다.
“그보다, 로드. 내가 우리 서약식을 생각해 왔는데, 밤에 하면 어떻겠소?”
그다음 말을 듣고 또 난감해졌지만.
“슬슬 그 되새김인가 하는 거 하는 게 어떨까?”
“뭘 말이오?”
“지금 우리 대화.”
“중요한 대용은 제때제때 머리에 기록해두고 있소, 당연히.”
“어떤 거?”
“처음 만났을 때, 로드는 자신을 엘프라고-.”
“그건 지워.”
그 외, 타시르 역시 자신이 맡은 하렘 내부 일이 놀라울 정도로 잘 처리했다.
라틸에게 몇 번 더 정리한 보고서를 가져다주었는데, 보면서 저절로 감탄사가 나올 지경이었다.
“와. 이 이상 더 잘할 수가 있나? 넌 진짜 일 잘하는구나, 타시르.”
“마지막 보고서를 받는 게 폐하니까 평소보다 좀 더 열심히 했지요.”
“평소엔 이 정도로 안 해?”
“평소에도 그 정도로 합니다. 글씨를 좀 더 자유롭게 쓸 뿐.”
“하하. 처음부터 제일 잘하는 사람한테 맡겨서 큰일인데. 다음 순서는 어떻게 하든 너랑 비교되겠어.”
“다음 순서를 봐준다고 엉터리로 할 순 없으니까요.”
라틸은 타시르가 거들먹거리는 걸 보고서 덩달아 웃었다.
“널 데려다가 집무실에 두고 같이 일하고 싶다. 책상 두 개 붙이고서.”
“전 좋습니다.”
“나도 좋은데…… 다른 후궁들이 난리가 나겠지.”
타시르는 말없이 입꼬리만 올렸다. 라틸은 소파 등받이에 팔을 괴고서, 타시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타시르가 국서가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중요한 일을 그에게 맡겼다가, 다른 사람이 이후 국서가 되면 그것도 좀 그렇다.
타시르가 그 사람에게 인수인계를 해줄 수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타시르의 말처럼, 누가 그의 다음 차례가 되더라도 업무 능력은 비교가 될 테고.
’아니, 굳이 제일 잘하는 타시르를 두고 다른 사람을 국서로 뽑는 것도 이상한가. 국서는 업무 능력만 가지고 하는 것도 아니긴 한데…… 그렇지만 업무 능력도 중요하긴 하고.‘
라틸이 심각하게 고민에 잠긴 모습을, 타시르는 서류를 정리하는 척 슬쩍 보고서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라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여서 저절로 흘러나온 웃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폐하는 나를 정말 일하는 사람으로만 보시는가.’
* * *
타시르를 돌려보낸 라틸은 이후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그런데 집무실 의자에 앉자, 오랜만에 시종장이 바로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서두르는 태도였다.
“폐하. 밀로에서 사절단이 이틀쯤 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밀로?”
“예.”
라틸은 잉크병 뚜껑을 열면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밀로 사절단은 이전에도 몇 번 다녀갔잖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급한 소식을 전하는 것처럼 저러지?
시종장은 그 의문에 바로 대답했다.
“듣기로는, 이번에 밀로에서 혼담 이야기를 꺼낼 거 같답니다.”
“혼담? 누구와요?”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라틸은 미혼인 이복남매와 이복자매들을 떠올려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면 알게 되겠지요.”
황위와 관련 없는 황자나 황녀들을 국내의 대귀족과 결혼시키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시선은 외부로 나가게 된다.
아직 라틸은 자신이 주도해서 형제자매를 결혼시킨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상한 일도 아니어서, 이 일을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 뒤 도착한 밀로의 사절단이 꺼낸 혼담은 라틸이 예상한 범위에서 비껴가 있었다.
“폐하. 괜찮으시다면 저희 밀로의 자리폴시 공주님과 레안 황자님의 혼담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레안? 라틸은 순간 당황해서 “레안?” 하고 아예 대놓고 되물을 뻔했다.
다행히 그러진 않았지만, 라틸은 표정이 굳고 말았다.
라틸이 인상을 찌푸리자 사절단은 괜히 걱정스러운 듯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밀로에서 온 사절단은 라틸의 그 불쾌해하는 시선이 닿자, 괜히 라틸이 묻지도 않은 말까지 꺼내기 시작했다.
“폐하. 귀족들은 평민들보다, 왕족은 귀족들보다 빨리 약혼하는 편이지만, 자리폴시 공주님께선 어릴 때 신전에 들어가 성기사단 활동을 하면서 늦게까지 약혼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약혼자를 고르지 못하신 거지, 절대로 어떤 문제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혼담이 진행되지 못한 게 아닙니다. 게다가 신전에서 지내신 만큼, 공주님은 누구보다도 굳고 강한 정신을 가지고 계십니다. 현재도 성기사단 단장직을 수행하고 계실 정도로 대단한 분이시지요.”
사절단의 라틸의 눈치를 보다가, 가지고 온 커다란 대형 초상화를 보여주었다.
영리해 보이는 여인이 성기사단 복장을 한 그림으로, 놀라울 정도로 활력이 넘쳐 보였다.
하지만 라틸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생각을 해보겠다며 그들을 손님용 궁전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사절단이 가자마자 시종장에게 물었다.
“무슨 꿍꿍이 같습니까?”
“꿍꿍이요?”
“레안이 그냥 황자라면 모를까. 지금 가짜 황제 사건에 연루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일로 가택 연금되었단 소문이 은근히 돌 텐데, 왜 저런 걸 묻는지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선황후 폐하를 용서하고 궁에 들이셨지 않습니까. 대외적으로는 일단 용서한 거니까요. 그걸 보고 레안 황자님도 곧 용서할 거라 여기는 게 아닐까요?”
“그럴까요?”
“용서를 안 해도 이미 화가 크진 않을 거라 여기는지도 모르지요.”
문제는 그들이 레안에게 혼담을 넣은 데서 그치지 않았다.
진짜 골치 아픈 문제는, 레안 황자 쪽 사람들이 은근히 레안이 공주와 결혼하길 바라면서 시작되었다.
“레안 황자님이 공주님과 결혼하게 하는 대신, 레안 황자님이 함부로 수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면 어떨까요?”
그들은 레안이 이곳에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좀 더 자유롭게 지냈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라틸이 가장 신경 쓰이는 건 그들이 단순히 레안의 감금을 풀길 원해서가 아니었다.
레안 황자와 밀로 공주의 일로, 라틸이 후궁들을 방패처럼 삼아 묻어두었던 일이 다시 슬금슬금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한 데 있었다.
“황제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후계자를 보는 것인데. 폐하께선 후궁 숫자가 그리 많으신데도 태기조차 없으시지 않습니까.”
“선황제들께서는 후계자 시절부터 아이가 있기도 했고, 즉위 첫해에도 이미 아이가 있었는데요. 못 해도 두 해를 지나기 전엔 다들 황손을 두셨지요.”
“그런데 우리 폐하는 그 많은 후궁을 두시고도 일 년이 지나도록 태기조차 없으십니다.”
“물론 불임이어서 아이를 못 본 선황제들도 계셨지요. 하지만 그런 경우, 동복 형제자매들의 아이를 입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폐하뿐만 아니라 레안 황자님께서도 미혼이시니…….”
“레안 황자님이라도 후사를 보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 안 되면 폐하께서 레안 황자님의 아이를 양자나 양녀로 맞이하실 수 있으니까요.”
밀로에서 사절단이 온 후로 이런 이야기가 계속되자, 라틸은 결국 유모에게 이 일을 의논했다.
“유모. 가짜로 임신했다고 발표하면 어떨 거 같아?”
“예?! 그, 그러면 나중엔 어쩌시려고요?”
“의사야 내가 시키는 대로 발표할 거잖아. 나중에, 한 석 달 정도 지나서 자연유산이 되었다고 둘러대면 되지 않을까?”
“그게…… 그래도 괜찮을까요?”
“한 번이라도 임신했다고 알리면 어쨌든 대신들도 몇 년은 조용히 기다릴 거 아냐.”
‘그때까지 독수공방하진 않을 테니, 그때쯤 되면 진짜 아이가 하나는 생길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