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먹구름 뒤에서 몰려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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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화. 먹구름 뒤에서 몰려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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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화. 먹구름 뒤에서 몰려오는 것
2023.05.31.
어둡게 내려앉은 그의 눈동자에 심장이 철렁하기도 잠시. 라틸은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너, 지금 날 가지고 놀아? 내가 장난치는 거 같아?”
기르골은 태연히 대답했다.
“화내는 거 같아.”
“그런데 웃어?”
게다가 더 화내 보라니. 이쪽이 화를 내도 우습게만 보인단 걸까?
물론 수천 년 수만 년을 살아온 그에겐 각성 전 로드가 화내는 것 따윈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 라틸은 기르골이 하지도 않은 말을 생각하며 점점 더 화가 났다.
기르골은 그 표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라틸의 얼굴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같이 화낼 순 없잖아, 아가씨.”
“사과는? 아예 선택지에도 없어?”
“내가 뭘 잘못했는데?”
라틸은 기가 막혀서 그를 보았다가, 그가 정말로 모르겠단 얼굴을 하고 있자 당황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 분노보다 허탈한 기분이 몰려와서, 라틸은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왜 화를 내는지는 알겠어?”
기르골은 대답 대신 라틸의 표정을 보더니, 좀 곤혹스럽단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을 해, 아가씨? 설명해줘.”
“…….”
라틸은 혼란스러웠다. 이런 타입은 어떻게 대해야 하지? 차라리 자신이 뭘 잘못한 줄 알면서도 우기는 거라면 뭐라고 말이라도 하겠는데.
저러고 있으니 갑갑한 것도 아니고 답답한 것도 아니면서 막막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기르골이 두 팔을 벌려 라틸을 꼭 끌어안았다. 라틸의 뺨과 이마에 기르골의 단단한 가슴과 어깨가 닿았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아가씨.”
라틸은 그가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단지 라틸이 곤란해하자 사과할 뿐이었다.
라틸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꿈속에서 본 광경을 떠올렸다.
기르골이 양모를 납치해 와서 선물 주듯 자랑하고, 양모가 도미스를 양부를 죽인 공범으로 오해해 분노하며 처음으로 진심 어린 악담을 퍼부을 때.
기르골에 대한 도미스의 기분이 어땠을지 조금 체감했다.
도미스에겐 양모가 끝내 붙잡고 싶어하던 마지막 애정이었단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라틸은 그 양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양부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뿐.
그러다 보니 도미스의 감정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제야 조금이나마 체감이 된다.
심지어 그때의 기르골은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도미스에게 잘 보이고 싶어 그런 짓들을 했으니 도미스도 더욱 기가 막혔겠지.
라틸은 어두운 눈동자로 기르골을 올려다보았다. 그 역시 라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약한 건지 강한 건지 모를 정신, 구불구불 휘어져 미로 같은 정신과 달리 그의 눈동자는 너무나 깊고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네 안에는…… 미로가 있는 거 같아.”
“그 안에 제자님이 갇혀 있어?”
“아니. 하지만 들어가면 갇힐 거 같아.”
라틸은 손을 올려 그의 눈가를 더듬더듬 쓸었다. 대리석처럼 매끈하면서도 부드러운 피부가 손바닥에 매끄럽게 붙어 왔다.
라틸은 생각했다. 그러면 역시 들어가지 않아야겠지?
그런 속마음을 모르고, 기르골의 입꼬리가 양옆으로 환하게 올라갔다.
“들어와 아가씨. 안에 좋은 게 있어.”
“어떤 거?”
“심장 아닐까? 날 죽일 수 있을지도 몰라.”
라틸의 손이 눈동자 위로 오자 그가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라틸은 그의 눈꺼풀을 엄지로 더듬더듬 만져보다가, 뒤꿈치를 들어 그의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었다.
문득 기르골이 완전히 정신이 나가기 직전 부른 이름이 떠올랐다. 아리탈……이었나.
기르골 안에 있는 미로를 만들어준 건 그녀였을까, 아니면 세월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타고난 걸까.
그리고 기르골은 그 안에 머무는 것일까, 아니면 그 미로에 자신도 갇혀 있는 걸까.
“난 아가씨가 그런 표정을 지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멍하게 생각하고 있자니, 어느새 눈을 뜬 기르골이 라틸의 귓바퀴를 물며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데? 라틸은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그의 어깨에 이마를 올려두었다.
로드들은 왜 기르골을 잡아두지 못했을까. 그런데 왜 대적자들은 기르골을 스승으로 둘 수 있었을까. 기르골은 대체 뭘 원하고서 대적자의 스승 노릇을 하고 다녔을까.
“제자님. ……내가 보기 싫어? 내가 옆에 없었으면 좋겠어?”
* * *
저녁 무렵. 라틸은 라나문을 찾아갔다.
“폐하.”
라나문은 막 목욕을 하고 나왔는지 따뜻하고 보송한 목욕 가운 차림으로 있다가, 라틸이 들어오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띠고 다가와 라틸의 겉옷을 받아주었다.
“요즘 자주 얼굴을 뵈니 좋습니다.”
“목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부딪히기 전에 막아주셨으니까요.”
“다행이네.”
“폐하께서 절 지켜주시는군요.”
“그러게. 내가 그댈 지켜주는 일도 있네. 일기장에 적어놔. 적어놨다가, 나중에 나한테 화나는 일 생기면 찾아봐. 빨리 찾아보게 책갈피도 해두고.”
라틸의 말에 라나문이 픽 가볍게 웃음을 뱉었다.
라틸은 그래도 라나문의 목에 상처라도 나진 않았나 괜히 한 번 더 살피는 시늉을 하고, 멀쩡한 걸 확인하자 머쓱하게 웃었다.
“기르골이…… 미안해.”
“왜 폐하께서 사과하십니까. 폐하는 그자의 편이 아니신데.”
“아아. 물론 그렇긴 한데.”
“괜찮습니다. 이런 사소한 일로 알게 됐으니 다행입니다.”
“뭐를?”
“그자가 절 싫어한단 걸요.”
‘대적자가 대적자의 스승과 대립하게 되었으니 잘 된 건가. 좋은 거 맞겠지?’
긴가민가하다가, 라틸은 라나문의 방을 찾은 두 가지 목적 중 하나를 떠올렸다. 하나는 라나문이 괜찮은가 확인하기 위해서였고.
“카르둔은?”
“카르둔이요?”
다른 하나는 카르둔을 찾아 혼내기 위해서였다.
“어.”
라나문은 라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카르둔은 일부러 절 공격한 게 아닙니다, 폐하.”
“알아. 그건 안다. 안다고 했잖아. 처음부터.”
라틸은 라나문에게 대답하며 방 안을 둘러보다가, 시종을 부르는 종을 발견하고 흔들었다.
“그런데 카르둔은 왜 찾으시는지…….”
“그대는 아직 모르는구나.”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기르골이 카르둔에게 화낸 이유.”
“?”
종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문이 열리며 카르둔이 들어왔다. 카르둔은 라틸에게서 세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무릎을 꿇었다.
가십지 건으로 찔리는 게 있어서인지, 아니면 라나문을 다치게 할 뻔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어나.”
어쨌든 정수리를 보며 말하는 것보단 얼굴을 보며 말하는 게 낫기에, 라틸은 손을 휘저었다.
카르둔은 일어서면서 라틸의 눈치를 살폈다. 라나문은 여전히 어리둥절해 보였다.
라틸은 카르둔을 따로 데리고 가서 혼을 낼지, 아니면 여기서 혼을 낼지 생각하다가, 그래도 라나문의 시종이니 라나문이 전후 사정을 알고 있어야 한단 생각에 일부러 바로 입을 열었다.
“카르둔. 네 행동이 잘못된 건 너도 알지?”
라나문은 미간을 찌푸렸고, 카르둔은 마른침을 삼켰다.
“네 행동이, 라나문에게 큰 부상을 입히려 했단 누명을 쓸 정도는 아니라 생각해. 하지만 분명 시작은 너였다. 알지?”
“폐하? 무슨 말씀이신지…….”
라나문이 물어보았으나, 라틸은 ‘나중에’란 신호를 보내고서 카르둔에게 하는 말부터 마무리했다.
“기르골이 과하게 화낸 거랑 별개로 너도 잘못이 있다. 게다가 먼저 시작했고. 그에 대해선 너도 사죄하고 벌을 받아.”
“기르골이요?”
라나문이 재차 묻자, 카르둔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실은…… 가십지에 기르골 님과 므라딤 님의 초상화를 이상하게 그려서 보냈습니다.”
전혀 몰랐던지 라나문이 입을 벌리고 카르둔을 쳐다보자, 카르둔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서약식 날에 보란 듯이 반지 자랑하면서 조롱하는 게 너무 얄미웠어요.”
라나문의 표정이 얼음처럼 냉랭해진 걸 본 라틸은 바쁘단 핑계로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라틸이 내리는 벌이야 일시적 감봉 정도이지만, 카르둔의 진짜 벌은 라나문의 실망일 것 같았다.
* * *
자이오르는 하품을 하면서도 바쁘게 여기저기 다니며 여러 가지 짐을 캐리어 세 개에 꽉꽉 채워 넣었다.
그러고서 밖으로 나와 보니, 기르골이 볼이 빨갛게 변한 채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자이오르는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주인님? 뭐 하십니까? 며칠 자리 비운다고 옷 갈아입으실 거라더니. 옷은 왜 안 갈아입으시고 꽃에 물을…… 아. 가기 전에 물 주고 가시려고요?”
제가 주면 되는데, 중얼거리면서 자이오르는 기르골의 뺨을 계속 쳐다보았다.
옷 갈아입겠다던 뱀파이어가 뭘 하고 왔기에 뺨이 저렇게 발그레하게 변했지?
게다가 아까는 뭔가에 굉장히 화가 난 얼굴이었는데. 지금 표정은 구름 위에서 이슬만 몇 방울 찍어 먹으면서도 만족하며 살 법한 얼굴이었다. 술 마셨나?
그때. 물뿌리개로 노란 꽃 위에 듬뿍 물을 주던 기르골이 자이오르를 보며 활짝 웃더니 두 팔을 벌렸다.
“이리 와, 자이오르. 내가 안아줄게.”
기겁한 자이오르는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왜 그러세요. 진짜 술 드셨어요?”
“마음이 바뀌었어. 계속 있을 거야. 짐도 도로 풀어.”
“예?”
“나는 사랑받는 사람…….”
기르골이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자이오르는 인상을 구겼다. 사랑받지도 않고 사람도 아니잖아. 왜 저러시는 거야, 대체? 그 사이에 뭘 보고 와서?
그러다가 이윽고 자이오르는 깨달음을 얻었다. 아아, 그래. 주인님은 미쳤지. 그냥 이해하려 하지 말자. 그냥 저런 분이야.
* * *
무거운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어두운 먹구름까지 떨렸다.
단백은 높은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뒤에서 단백이 속한 성기사단의 성기사인 밀기가 툴툴거렸다.
“열두 개 성기사단 단장들이 모이는 날인데. 날씨가 어째 너무 음침하네요. 꼭 악당들이 모이는 날 같잖아요.”
“일부러 이런 날로 잡았어. 어둡고 비 오는 날. 오히려 비가 좀 더 빨리 올 줄 알았는데.”
“예? 정말입니까?”
“로드 쪽에서 세력을 어느 정도로 쌓았는진 모르겠지만, 혹시 모르잖아. 적들도 세력을 쌓고 있다면 우리를 주목할 거 아냐. 우리가 다 모이면 적들도 더 경계할 테니 조심해야지.”
“아아.”
밀기는 단백의 옆으로 가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성기사단 단장들은 수행원 몇 명과 자신들의 상징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마지막 깃발이 안으로 들어오자 단백은 뒤로 돌아섰다.
“다 왔네. 내려가자.”
* * *
단백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모든 성기사단 단장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긴 테이블을 둘러싼 열두 개의 의자에 각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대적자가 앉아야 할 상석은 비어 있다.
단백은 그 상석 옆을 지나가며, 이 자리에 앉게 될 사람이 황후 아이니일지, 황제 라트라실일지, 아니면 후궁 라나문일지 생각해보았다.
마침내 단백까지 자리를 잡고 앉자, 가장 나이가 많은 성기사단장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회의를 시작하지. 단백 경. 라트라실 황제와 아이니 황후에 대해 해야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까?”
“네.”
단백은 자신이 겪은 라트라실 황제와 아이니 황후, 라나문 후궁 사이의 일과 그들 각자에 대한 평가를 알려준 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적자의 검을 뽑은 게 셋인 경우는 처음인 데다, 그중 둘이 서로를 악의 축이라 공격하는 상황이다 보니 몹시 난처합니다. 선배님들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자 회의 시작을 알린 성기사단 단장이 가장 먼저 물었다.
“단백 경, 자네가 보기엔 라트라실 황제가 로드 같았나?”
“대신관님은 물론 백화랑술의 백화 님까지 그분을 두둔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백화랑술은 모든 성기사단의 원형이 되는 곳 아닙니까. 그런 두 분이 폐하를 두둔하셔서…….”
그 조심스러운 말을 듣다가, 한 명이 신경질적으로 끼어들었다.
“그건 그분들의 의견이지 단백 경의 의견이 아닌데.”
단백은 얼굴이 붉어져서 수긍했다.
“그렇지요. 하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분들의 의견이니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게다가 라트라실 황제는 본인도 성수를 다루거나 식시귀를 죽이는 데 별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로드라면 안 그러지 않을까요?”
그 말에 이번에는 다른 성기사단장이 끼어들었다.
“단백 경. 로드 본 적 있나?”
“예? 아니요…….”
“그런데 왜 그렇게 판단하지?”
“그건…….”
단백의 얼굴이 재차 붉어지자, 가장 나이 많은 성기사단장이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날카롭게 구는 두 성기사단장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단백에게 시비를 건 성기사단장은 수그러드는 대신, 손을 깍지끼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로드인지 아닌지 확인하긴 어렵지요.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지 않습니까. 로드의 가장 큰 특징을.”
“특징이라니?”
“로드의 주위엔 뱀파이어 부하들이 많으니, 주위 사람들을 확인해보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