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감당하기 어려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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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화. 감당하기 어려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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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화. 감당하기 어려운 남자
2023.05.28.
“어느 후궁?”
왜 머릿속에 바로 클라인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이것도 편견인데.
“설마 클라인이야? 아니면 클라인의 시종?”
그래도 혹시나 싶어 물어보자, 기르골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별로 아가씨한테 신뢰를 얻지 못하는 조합인가 보네. 클라인이 그때 그 부실해 보이던 황자지? 감옥에 갇혀 있던.”
‘왜. 뭐. 너도 부실하다 표현하네.’
“아아. 네가 구했다고 했지.”
라틸이 중얼거리자 기르골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 도련님 귀엽지. 하지만 아니야, 아가씨.”
“그럼 누군데?”
“누군지가 중요해, 아가씨? 누군지에 따라 대답이 달라져?”
“아니라도 누굴 얘기하는진 알아야 할 거 아냐.”
라틸이 목소리를 작게 해 항의하자, 기르골은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더니 대답해주었다.
“예비 제자님.”
라틸은 기겁해서 반박했다.
“뭐? 라나문? 말도 안 돼! 걔는 자기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그런 짓은 안 해, 기르골.”
기르골 얼굴을 못나게 그려서 뿌리는 라나문이라니. 상상도 가지 않았다.
기르골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럼 예비 제자님 시종이 한 일이겠네.”
어쨌든 그쪽이라 확신하는 뉘앙스에 라틸은 당황해 물었다.
“아니, 왜 라나문이라 확신해? 거기 직원이 그래? 라나문이 네 초상화 엉터리로 줬다고?”
“아니. 초상화가 익명으로 왔다길래, 또 그런 게 오면 이번엔 건드리지 말고 놔두라 했어. 또 왔다길래 가서 냄새를 맡았지.”
냄새!
“예비 제자님 방에서 나는 냄새였어. 그러니 예비 제자님이던가 거기 시종이던가. 가까운 호위일 수도 있겠지.”
‘라나문 방 냄새는 어떻게 아는 거야?’
라틸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기르골을 이상하게 보다가, 지금 중요한 게 이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기르골이 저렇게까지 말하자 라틸은 곤란해졌다. 나름대로 본인은 조사도 하고 확신도 하고서 말하는구나.
게다가 라틸도 기르골의 말을 듣자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어제. 라나문에게 가십지에 대해 물어볼 때, 뒤에 선 그의 시종이 움찔했던 것이다.
‘그 시종이 한 짓이었나 보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후궁들이 들어오고 인기가 많아지자 경계심이 들었나?
하지만 지금 후궁전에 모아둔 이들은 라틸이 그냥 ‘어 내 타입이네. 내 후궁 해라!’ 하고 들인 이들이 아니었다.
그렇게 들인 이가 딱 하나 칼라인이었으나, 그 칼라인도 지금은 보통의 존재감이 아니다. 그런데 죽여도 되냐니.
“그대, 지금 라나문을 죽여서 묻어버리겠단 거야?”
“제자님한텐 희소식 아닌가? 대적자잖아.”
“아니야. 그리고 내 후궁들은 내가 세심하게 하나하나 골라서 데려다 놓은 자들이야. 하나하나가 중요해. 그냥 거슬린다고 죽일 자들이 아니라고. 한 명 잘못되면 어떤 난리가 날지 몰라.”
“내 얼굴을 이상하게 그려서 뿌렸다고, 아가씨. 내가 마음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보여줄까?”
“그럼 그대도 라나문 얼굴을 이상하게 그려서 뿌려. 죽이지 말고.”
“각자 잘하는 걸 해야지. 난 그림보다 죽이는 걸 잘해, 아가씨.”
라틸은 기르골의 입을 틀어막고 노려보았다. 타시르가 말하면 농담 같을 텐데. 기르골이 하는 말이라 웃고 넘기기가 어려웠다.
한참 그 상태로 씩씩거리다가 라틸은 가까스로 제안했다.
“내가 벌해줄게. 그댄 가만히 있어. 그러면 되겠어?”
“아가씨가 어떻게 벌해줄 건데?”
“라나문 시종이 한 짓이라며. 했는지 물어보고, 했다고 인정하면 적당한 벌을 내릴게. 하여튼 죽을죄는 아니야.”
“…….”
기르골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 * *
“사블레 후작.”
“네, 폐하.”
“라나문 시종을 불러다가 가십지에 기르골과 므라딤 관련해 엉터리 제보를 한 사람이 그쪽인지 물어봐요.”
어딘가에 다녀온 라틸이 피로한 얼굴로 말하자, 시종장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정말입니까?”
“정말일 확률이 있나 보더라고요. 라나문 시종. 이름이 뭐더라. 아. 카르둔. 카르둔한테도 증인이 있으니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라 하고.”
“예.”
시종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만약 맞다면 어떡하실 겁니까, 폐하?”
“감봉이라거나 이동 가능한 곳을 몇 개월 묶어둔다거나 해요.”
“예, 폐하.”
시종장이 나가자 라틸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기르골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결국 아이니한테 갈 건지 말 건지 대답도 못 들었어. ……설마 가진 않겠지?’
* * *
그 시각.
아이니 황후와 라트라실 황제 사이의 복잡하고 사적인 관계가 그들의 주장과 관련이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 고민하던 단백은, 결국 이 일은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신을 보좌하는 성기사 밀기에게 지시했다.
“누구 말이 옳은지 알 수 없으니 회의를 해야겠어. 지금 모을 수 있는 열두 개 성기사단 단장들을 모두 불러줘.”
“열두 개요? 삼생기회의를 여는 게 아니고요?”
수많은 세월을 지나오며 성기사단의 숫자는 조금, 조금씩 늘어나서, 현재 크고 작은 성기사단은 제법 그 수가 많았다.
삼생기회의는 그 모든 조직들이 다 합쳐서 토론하는 회의로, 총 63개의 조직이 모이는 회의였다.
“연다고 열리겠어?”
그 숫자가 너무 많은지라, 2년에 한 번씩 정기적인 삼생기회의가 열리지만, 이때에도 참석률은 1/3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의장도 참다못해 ‘로드가 세상을 반 정도 멸망시키면 성기사단도 반 정도 모일 것’이라 표현할 정도였다.
그런 회의를 비정기적으로 열어봤자 제대로 모일 리가.
“라필루스들이면 충분해. 모이기 제일 쉽고.”
이에 단백은 보석을 상징으로 삼는 열두 개의 성기사단만을 불러 모으려는 것이었다.
그 열두 개 성기사단은 500년 전 로드와 대적자의 싸움 때, 대적자의 편에서 로드를 없애는 데 큰 공을 세운 자들이었다.
삼생기회의 때에는 구분을 위해 ‘라필루스’라고 불리며, 가장 최근에 큰 업적을 세워서인지 다른 성기사단들에 비해 그나마 잘 뭉쳐지는 편이었다. 잘 뭉친다고 해도 몇 년씩 얼굴도 못 보는 일이 허다하지만.
“알았습니다. 연락을 다 넣겠습니다.”
밀기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자, 단백은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선에서 해결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 * *
기르골에게 대적자 수업을 청한 이후, 라나문은 비정기적으로 그에게 훈련을 받고 있었다.
할 때는 ‘저자가 날 괴롭히나?’라고 생각이 되지만, 그래도 막상 받고 나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하는 느낌이어서, 라나문은 수업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우리 도련님. 오늘은 재밌는 거 해볼까?”
평소에는 체력이니 근력이니 하면서 혼자 하는 훈련을 위주로 시키던 기르골이, 빙그레 웃더니 목검 두 개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대련인가.”
검 하나를 건네받으며 묻자, 기르골은 웃으면서 “어.”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다른 검 하나를 건넨 건 멀지 않은 곳에서 수건과 물을 들고 응원 중이던 카르둔이었다.
“거기 그쪽이 상대해 봐.”
카르둔은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전 검술을 못 합니다.”
“괜찮아.”
“아니, 정말로 못 합니다.”
“괜찮다니까. 막무가내로 공격하는 적을 어떻게 상대하는지 보고 싶은 거라.”
“네?”
라나문은 카르둔에게 억지로 목검 하나를 떠맡기고서, 라나문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속삭였다.
“좀비나 몬스터들이 체계적으로 검술을 훈련해서 덤벼들진 않잖아, 도련님. 막무가내로 오지. 그러니 막무가내로 오는 적을 상대해 봐.”
라나문은 미간을 찡그렸다.
“카르둔은 몬스터가 아닌데. 상대가 될 거라 여기나.”
“당연히 안 되지. 그러니까 페널티. 우리 도련님은 방어만 하고.”
기르골이 라나문의 검을 한 번 툭 치고, 다시 다가가 카르둔의 어깨를 툭 쳤다.
“이쪽은 무조건 온 힘을 다해 공격.”
카르둔은 난감해서 라나문을 바라보았다. 말려주세요, 하는 얼굴로.
하지만 라나문은 꽤 그럴듯하다 여겨서 기르골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다.”
기르골의 말처럼, 라나문은 정형화된 공격이 아니라 막무가내로 오는, 어디서 올지 모르는 공격을 대비하는 법도 알아야 했다.
카르둔이 너무 약하긴 하지만 패턴을 보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괜찮다. 공격해 봐, 카르둔.”
카르둔은 마지못해 두 손으로 검을 쥐고는, 눈을 질끈 감고 휘둘렀다.
라나문은 어렵지 않게 그 검을 몸만 움직여 피했다.
“눈. 뜨고 해야지.”
기르골은 그걸 보다가 눈 깜짝할 사이 카르둔의 옆으로 다가가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
난데없는 행동에 놀란 카르둔이 눈을 뜨고 보니, 기르골은 다시 좀 떨어진 곳으로 다가가 있었다.
카르둔은 순간 받은 오싹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으나, 라나문이 진지하게 이쪽을 보자 ‘내 착각이구나’ 싶어서 다시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카르둔이 이번에는 눈을 뜨고 검을 휘두르자, 아까보다는 한결 공격이 나아졌다.
“막무가내로 휘둘러. 더. 빨리. 더. 세게.”
기르골은 그 모습을 뚱하게 바라보며 한 번씩 조언했고, 라나문이 수월하게 피하는 듯하자 카르둔도 조금씩 안심해서 검을 무차별적으로 퍽퍽 휘둘러댔다.
라나문은 때론 피하거나 때론 막아내며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초심자의 검 패턴을 살폈다.
그 순간.
라나문의 검과 카르둔의 검이 막 부딪치려는데, 그 전에 ‘우직’ 소리가 나더니 라나문의 검이 부러졌다.
“!”
카르둔과 라나문 둘 다 놀랐지만, 이미 라나문의 검은 홀로 부러져 카르둔의 검을 쳐내지 못했고, 카르둔의 검은 라나문의 목 옆으로 향하고 있었다.
기르골의 입가에 미소가 올라왔다.
그러나 라나문의 목에 닿기 전, 카르둔의 목검에 강한 힘으로 날아온 단도가 박혔다.
얼마나 거센 힘으로 박히던지, 카르둔이 그 힘에 비틀거리며 옆으로 튕겼을 정도였다.
카르둔은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고, 검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르둔은 자신이 넘어졌지만 안도해서 검이 날아온 쪽을 보았다.
라트라실 황제가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르둔은 안도한 마음이 공포로 바뀌어, 황급히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라나문도 카르둔을 두둔하기 위해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안다.”
단답한 라틸이 저벅저벅 옆을 지나가더니, 팔짱을 끼고 서 있던 기르골의 팔을 잡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무서운 표정으로 보아 절대로 좋은 의도로 데려가는 건 아닌 듯했다.
카르둔은 천천히 일어나 라나문을 보았다.
“폐하께서 이 일이 기르골 님 때문이라 여기시나봐요.”
라나문은 제대로 부딪치기도 전에 부러진 자신의 검을, 대련하기 전 기르골이 툭 쳤던 그 부위를 보며 대답했다.
“같은 의견이다.”
* * *
기르골을 하렘의 빈방 안까지 그대로 데려간 라틸은 방 안으로 그를 밀어 넣고 다른 한 손으로 문을 닫았다.
라틸은 벽에 기르골을 붙여 놓고서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고의지? 일부러 라나문을 공격하려 한 거지? 카르둔 손을 빌려서.”
순순히 따라온 기르골은 라틸이 노려보는 데도 좋다는 듯 웃었다.
“타이밍이 좋네 아가씨. 잘 막았어. 어디부터 봤어?”
라틸은 이를 갈았다. 지금 그게 문젠가?
“내가 벌을 준다 했잖아. 합당하게 벌을 내린다 했잖아. 게다가 카르둔이 범인이라 확정된 것도 아니잖아. 첫 번째 편지 보낸 사람이랑 두 번째 편지 보낸 사람이 왜 같다고 확신하는데? 그리고 내가 그랬지. 여기 머무는 이상 누굴 죽이고 다치게 하고, 그런 거 안 된다고.”
이번 행동도 이번 행동이지만, 기르골이 전혀 자신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데도 화가 났다.
기르골을 여기 불러온 게, 자신의 양 같은 후궁들 사이에 늑대를 풀어놓은 건 아닌가 싶어 자책감도 들었다.
기르골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두 손으로 라틸의 양 뺨을 감싸며 양 입꼬리를 활짝 찢어 웃었다.
“더 화내봐, 주인님.”
“!”
“나한테 화내봐. 더 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