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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화. 가십지 사건 (339/367)


338화. 가십지 사건
2023.05.24.


아니 이게 대체 뭔 일이고 뭔 소리야. 라틸은 황당해서 잡지의 낯선 얼굴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하렘 안의 누가 일부러 기르골과 므라딤 초상화라며 엉뚱한 초상화를 가십지에 보낸 거야?”

심지어 본인들보다 훨씬 덜 잘생긴 얼굴로? 라틸은 뒷말은 삼켰다.


“그런 게 아닐까요?”

시녀들이 다시 자기들끼리 쳐다보며 웃어댔다.

라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가십지를 시녀들에게 돌려주었다.


“참 별짓을.”

하지만 속으로는 당황스러웠다. 저런 틀린 정보를 두고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말 그대로 가십을 다루는 가십지인데, 거기에 대고 황제가 나서서 ‘내 후궁들은 이런 얼굴이 아니다’라고 정정하자니 그것도 웃기지 않은가.

이 일에 자신이 나서야 할지 말지조차 난감했다. 차라리 정보지라면 시종장을 통해 정정하라 지시라도 내리겠지만.


“대체 누구 짓이야?”

클라인 얼굴이 떠오르는 건 내내 보아온 그의 행적 때문일까.

아니야. 무작정 의심하면 안 돼. 라틸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요즘은 얌전히 지내고 있잖아.


‘그래도 이건 기르골이 안 봤으면 좋겠는데.’

 

* * *



“응?”

온실 밖으로 나온 기르골은 발치에 툭 채이는 잡지를 발견하고 그걸 집어 들었다.

팔랑팔랑 잡지를 넘겨본 기르골의 입가에 곧 재밌어하는 웃음이 걸렸다.


“이게 뭐야.”

잠시 뒤, 그의 모습은 온실 근처에 없었다. 대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가십지를 발행하는 회사 앞에 있었다.

* * *

아침과 점심 사이에 초판이 전부 다 팔려나갔다.

베일에 싸여 있던 두 후궁의 얼굴이 깜짝 공개되면서, 입소문을 타고 몇 시간 만에 사람들이 죄다 그 가십지를 사 간 덕이었다.

편집장은 푸하하하 소리 내어 웃으면서 책상을 두드렸다.


“거 봐. 내가 평소보다 다섯 배 더 찍어두라 했지!”

편집장은 이런 사태를 예상했기에 이미 평소의 발행 부수보다 더 많은 양의 잡지를 발행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선견지명에 몹시 흐뭇해졌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볼을 스치고 지나간 날카로운 기운에 금세 사그라들었다.


“!”

편집장은 반사적으로 볼에 손을 대었다가 손가락에 피가 묻어 나오자 기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피! 피야! 누구 피! 내 피!”

당황해 허둥거리는 그의 입을 커다란 손이 막았다.

편집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온 건지, 소름 돋게 아름다운 남자가 웃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섬뜩한 붉은 눈동자에 놀라서 가만히 있으려니, 남자가 손을 내리며 물었다.


“누구야?”

“저, 저는 여기 편집장…….”

“너 말고. 내 얼굴. 이따위로 보낸 자가 누구냐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있으려니, 남자가 그의 책상 위에서 오늘 발행된 가십지 두 번째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는 ‘기르골’이라고 붙어 있었다.

편집장은 뒤늦게 남자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기, 기르골 님?”

남자가 빙그레 웃는 순간.


“진짜 기르골 님이라고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편집장은 두려움을 잊고 분노에 휩싸였다.


“전혀 다르게 생겼잖아!”

그가 기가 막혀 외치자, 남자가 시무룩한 척 되물었다.


“그렇지. 그러니 내가 화가 나겠지. 그렇지?”

일리 있는 말이었다. 기르골의 실물을 보고 초상화를 보고 나니, 편집장이 느끼기에도 초상화를 보낸 사람에게서 악의가 느껴졌다.


“그렇군요.”

편집장이 순순히 인정하자, 자신을 기르골이라 밝힌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가십지를 그에게 턱 안기며 물었다.


“아가, 누가 이 초상화를 보냈어?”

“아가요? 저요?”

“여기 아가가 누구 또 있나?”

“!”

“저, 제가 기르골 님보다 연상 같은데요.”

무슨 상관이냐는 듯 기르골이 고개를 기웃했다.

편집장은 잠시 입을 벌리고 서 있다가, 곧 상대가 원하는 건 호칭을 재정립하는 게 아니라 이 초상화를 보낸 범인을 찾는 일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럴 만했다. 초상화를 보낸 게 하렘 내부 사람이라는 건 이미 가십지 안에 적어두었으니까.

즉, 초상화를 보낸 사람은 기르골에게 악의를 가진 사람일 수 있다. 기르골로서는 범인이 궁금할 것이다. 문제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편집장이 쩔쩔매며 대답하자, 기르골이 다시 가십지를 펼쳐다가 ‘출처. 하렘 내부 사람’이란 문구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가, 이거 보여?”

“보입니다…….”

“그런데 모른다고?”

“그게…….”

기르골이 편집장의 볼을 손가락으로 쓱 긋자, 편집장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잊었던 상처와 고통이 떠올라 등을 떨었다.

못 견딜 만큼 아픈 건 아니지만,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날카로운 것에 볼을 베인 게 다시 떠오른 것이다.

역시 저 기르골이란 자가 한 짓이겠지. 편집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방 안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아직도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여기는 높은 건물인데, 상대는 창문으로 들어왔다.

편집장은 기르골이 소문처럼 ‘평범한 평민’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배경은 없을지언정, 본인의 실력은 어마어마한 게 분명하다.

다른 사람을 안 시키고 직접 여기에 쳐들어왔다는 건 성질 역시 꽤 고약하다는 뜻.

판단을 내리자마자, 편집장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익명으로 편지가 왔습니다. 하렘 내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밝히고 있었어요.”

“그것만 믿고 잡지에 실었어?”

“물, 물론 그것만 믿고 실은 건 아닙니다. 그 외 다른 이야기를 여러 개 해 주었는데, 하렘 사람이 아니라 하기엔 내부 일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어요.”

기르골의 심드렁한 표정을 확인한 편집장이 얼른 제안했다.


“바로 정정 보도를 하겠습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기르골의 원래 얼굴로 잡지를 내면 판매 부수가 오늘의 다섯 배는 또 껑충 뛰리란 계산이 있었다.

그러나 기르골은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뜬금없이 말했다.


“아니. 그대로 둬봐.”

“예?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단.”

“단……?”

“또 그런 편지가 온다면 되도록 건드리지 말고 날 불러.”

그건 또 왜? 편집장은 기르골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기르골이 원하는 건 이해가 아니라 대답이었다.

그 눈빛을 알아챈 편집장은 순순히 물었다.


“알았습니다.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지붕에 하얀 방울을 매달아 놔. 내가 찾아갈 테니.”

 

* * *

누군가가 기르골과 므라딤을 골리기 위해 저지른 짓은 난데없이 카리센까지 영향을 미쳤다.


“라트라실 황제가 새로 받은 후궁 이름이 기르골이라고?”

‘기르골’이란 자를 찾을 거란 아이니의 말에, 부하 하나가 타리움의 새 후궁 이름이 기르골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아이니는 그게 동명이인인지 아니면 동일인인지 몰라 당황했으나, 누군가 타리움에서 유행하는 가십지를 가져다주자 그걸 보고 안도했다.

가십지에 실린 얼굴이 자신이 아는 기르골과 다른 덕이었다.

초상화만 보고 실물을 찾으라 하면 찾기 어렵지만, 실물을 알고 초상화를 보면 닮았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쉬웠다.

아이니가 볼 때 이 가십지에 실린 얼굴은 분명 대적자의 스승 기르골이 아니었다.

아이니는 안도해서 가십지를 도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동명이인이다. 이자가 아니야.”

단호하게 말한 아이니는 다시 한번 제대로 지시했다.


“내가 대적자의 스승을 찾는단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알리거라. 소문이 나면 그자가 알아서 날 찾아올 거다.”

지난번에 그랬던 것처럼. 아이니는 뒷말을 삼켰다.

문득 기르골과의 마지막 만남이 그리 좋지 않았단 게 떠올랐지만, 그것 역시 별 상관은 없을 것이다.

기르골 역시 이쪽이 마음에 들어서 스승 역을 하러 오는 건 아닐 테니까.

* * *

 

  


“자, 라나문. 이게 뭐 같으냐?”

“거울입니다.”

“이 안에 담긴 게 무엇일까?”

“저입니다.”

“아냐. 이 안에 담긴 건 사랑이야. 내 사랑을 받아서 그대는 이 안에서 더 아름다워 보이는 거고.”

“…….”

“모르겠어?”

라틸은 테두리가 화려한 손거울을 라나문에게 건네며 입에 발린 소리를 하다가, 꿈쩍도 안 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는 시무룩하게 거울에서 손을 뗐다.


“모르겠나 보네.”

라나문은 미묘한 표정으로 손거울을 받아들고서 라틸을 쳐다보았다.

호숫가를 바라보며 바람을 쐬고 있는데, 갑자기 라틸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이상한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눈이었다.

이런 것만 표정에 잘 드러나지.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찼다.


“갑자기 왜 이런 걸 주십니까?”

“그대를 보니 그냥 주고 싶어졌어. 그대에겐 뭐든 주고 싶어지나 봐. 내 마음 같은 거 말이야.”

라나문이 더욱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자, 라틸은 다시 속으로 혀를 찼다.

며칠 전, 라나문은 뜻밖에도 기민하게 머리를 굴려 라틸이 대적자들을 적대한단 걸 알아차렸다.

당시엔 술렁술렁 넘어가긴 했고 이후엔 그 화제가 나오지 않았지만, 그 일은 가시처럼 라틸에게 껄끄럽게 남았다.

그래서 어색해진 사이를 매끄럽게 만들고자 선물과 아부를 건넨 건데. 소용이 없구나.

하이신스는 라틸이 선물을 주면서 이런 말을 하면 까르르 웃으면서 좋아했는데.


‘얜 너무 얼음 같아.’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라나문이 사랑에 빠지게 만들 수 있을까.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 그의 등을 두드렸다.


“가볼게. 호수 구경 잘해. 거울도 잘 들여다보고. 보면서 거기서 내 성의도 찾아보고. 어떻게 보답할지도 고민해 보고.”

그러고 보니 전에 하렘 내부 사람이 기르골이랑 므라딤 초상화를 엉터리로 유출했지. 라나문은 그 사건에 대해 아려나?


‘음. 아마 모를 거야.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를걸.’

“왜 그러십니까 폐하?”

라틸이 떠날 듯 말 듯 서성이자, 라나문이 허리를 조금 숙이더니 라틸과 눈을 맞추며 물어왔다.

사람을 소란스럽게 하는 모습에, 라틸은 잠시 움찔하다 얼결에 물었다.


“라나문. 넌 가십지 같은 거 안 보지?”

그 질문에 라나문의 뒤에 선 시종 카르둔이 움찔했다.


“예.”

라나문이 덤덤하게 대답하자,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역시 그렇겠지.

그런데 산책을 마치고 다시 집무실로 들어오자, 서넛이 칼라인과 마주 보고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자못 심각해 보이는 표정에 라틸이 묻자, 칼라인이 대답했다.


“주인. 아이니 황후가 대적자의 스승인 기르골을 공개적으로 찾고 있습니다.”

“뭐? 그 기르골이 우리 기르골인 걸 알고?”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닐 확률도 있습니다. 은밀히 그쪽으로 접선하지 못하고 공개적으로 찾는 걸 보면요.”

라틸은 인상을 찌푸리다가 집무실을 나가 온실로 걸어갔다.

온실 근처에는 윌랑 왕자가 보낸 찜찜한 하인 둘이 비질을 하고 있었다.

라틸은 인사하는 그들을 지나쳐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기르골은 누구보다 평화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모종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다.


“아가씨.”

그러다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으면서 부르는데, 아직 아이니가 자기를 찾는 걸 모르는 듯했다. 라틸은 걱정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우리 제자님, 왜 표정이 안 좋을까?”

“아이니 황후가 그댈 찾고 있단 소리를 들어서.”

“날 찾는대? 왜?”

“대적자가 대적자 스승을 찾는 이유가 뻔하지 뭐겠어.”

라틸은 코앞으로 다가가 기르골의 반응을 살피다 물었다.


“안 갈 거지? 그댄 이제 내 남자잖아.”

기르골은 모종에 묻은 흙을 툭툭 털더니, 라틸의 꺼낸 말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질문을 했다.


“아가씨. 내 초상화를 엉터리로 그려서 팔아넘긴 인간이 누군지 알아냈어.”

“어? 정말?”

“말재주가 있는 모양인데. 내 꽃들이 외롭지 않게 땅에 같이 묻어줘도 괜찮을까?”

“!”

죽여서 묻겠단 건가. 아니면 산 채로 묻겠단 건가. 어느 쪽이든 끔찍하긴 하지만.

아니, 그보다 아이니에 대해 묻는데 왜 갑자기 저 이야기를 하지? 허락 안 하면 아이니한테 간단 뜻인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가. 무슨 뜻으로 묻는 거지?

라틸은 당황했지만 일단 차분하게 물었다.


“그게 누군데?”

“사실 정확히 아는 건 아니야, 아가씨. 어느 쪽 사람인지를 알아낸 것뿐이거든.”

“어느 쪽…… 사람?”

“어느 후궁. 혹은 그 후궁의 가까운 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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