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7화. 초면인 분들인데…… (338/367)


337화. 초면인 분들인데……
2023.05.21.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여우 가면은 게스타잖아?’

게스타는 로르드 재상의 아들이다. 태어나서 자라는 모습을 보아온 이들이 하나둘이 아니었고, 라틸 역시 어린 게스타를 본 적이 있다.

게스타 본인도 자기는 뱀파이어 같은 게 아니라 사람이라 했지. 그런데 왜 여기에 여우 가면이 또 있지?


‘아냐. 조금 달라.’

하지만 라틸은 얼마 가지 않아 게스타와 눈앞의 여우 가면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했다.


‘머리 색이 다르다.’

여우 가면 뒤쪽으로 머리카락이 조금 나와 있는데, 라틸이 아는 여우 가면의 머리 색과 지금 보는 여우 가면의 머리 색이 달랐다.

체형 역시 얼핏 보면 흡사하지만 아주 똑같진 않았다. 목소리 역시 좀 다르고.


‘게스타는 이렇게 취한 것처럼 말하지 않아. 술을 마셔도 쑥스러워하는 말투였어. 가끔 튀어나오는 목소리도 아주 아주 낮고 그윽해.’

그럼 뭐지? 여우 가면이 하나가 아닌가? 아니면 55대 여우 가면, 56대 여우 가면 이런 식으로 대를 이어 전해지나?

하지만 혼란스러운 건 라틸뿐이었다. 여우 가면을 처음 보는 도미스는 별 감흥 없이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제야 보는군. 그 얼굴.”

얼굴 안 보이잖아. 얘 가면 썼어, 도미스! 라틸이 속으로 뚱하게 말했으나, 이건 과거였고 기억일 뿐이었다.

도미스는 그 말을 끝으로 여우 가면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나 뭐 잘못했나? 왜 나한테 화내시는 거 같지?”

뒤에서 여우 가면이 칼라인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으나, 라틸은 대답을 듣지 못했다. 다시 화면이 바뀐 탓이다.

* * *

도미스는 혼자 탁자 앞에 있었고, 맞은편에는 막 안야가 의자를 빼서 앉고 있었다. 동생 안야가 아니라 수사관 안야가.


‘아까 마차에서 내릴 땐 없더니. 언제 또 온 거야?’

“자.”

안야는 손에 명단 같은 걸 들고 있었는데, 그걸 도미스에게 건네며 물었다.


“진짜로 다 죽일 거야?”

‘무슨 소리지?’

라틸은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도미스는 바로 대답했다.


“어.”

안야의 표정에 슬픈 빛이 떠올랐다.

도미스는 안야가 준 명단을 살폈다. 라틸도 그 덕택에 명단 내용을 볼 수 있었다.

이름과 나이가 쭉 적혀 있고, 그 옆에 ‘사망’이나 ‘실종’, ‘퇴직’ 등의 상태가 적혀 있고, 그 옆에 간단한 특이사항이 기입된 진짜 명단이었다.

그리고 그중 이름 몇 개에 체크가 되어 있다.


‘도미스가 여기 체크 된 이들을 다 죽이려는 건가?’

라틸은 체크된 이름 중 한 명을 알아보았다. 조안. 도미스를 죽인 하녀 중 하나다. 그럼 이 명단은 도미스의 복수 명단이 맞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명단을 살피는 라틸과 달리, 도미스는 건성으로 이름을 훑었다. 별 관심 없다는 듯.

도미스는 오히려 명단을 내려놓으며 안야에게 물었다.


“그자들이 한 일을, 왜 난 못 할 거라 생각해?”

안야는 슬픈 얼굴로 대답했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했으면 좋겠어 도미스.”

“왜?”

“난 네가 그 힘을 좋은 데 쓰면 좋겠어. 넌 좋은 애잖아, 도미스. 널 죽인 이들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덴 나도 동의야. 하지만 이자들을 죽이는 게 너여선 안 돼.”

“그럼?”

“법으로 처벌해야 해.”

‘수사관 안야는 선하구나. 뱀파이어가 된다고 성격이 변하진 않나 보네.’

근데 도미스는 왜 변한 거냐. 각성해서 그런가. 아니면 그냥 그런 일들을 겪고 나니 ‘에이 다 X 같아!’하고 변한 건가.

어쨌든 안야의 말은 도미스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자들은 날 죽였어. 하지만 난 살아 있고. 게다가 이렇게 건강하지. 아무 증거가 없어. 그런데 법으로? 법으로 그자들이 살인자일까?”

도미스의 목소리에 점점 음울한 웃음기가 어렸다.


“로드를 죽이려 한 영웅으로 둔갑하진 않을까?”

“도미스…….”

“난 악한 운명을 타고났어 안야 씨. 내가 좋은 사람인진 중요하지 않아. 좋은 도미스도 있었지. 근데 죽었어. 그자들이 죽였어. 그래서 복수해주려는 거야, 내가.”

안야의 표정이 슬픈 듯 일그러졌다.


“악한 운명은 없어 도미스.”

“그게 나야.”

 

* * *

다시 장면이 바뀐 곳엔 하녀장이 하녀 몇 하인 몇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네모난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고 방문과 창문은 모두 꼭 닫혀 있었는데, 이상한 건 도미스의 위치였다.


‘아니, 도미스 얘는 어디서 숨어서 지켜보는 거야?’

라틸은 도미스의 시선으로 상황을 보면서도 도미스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한자리에 있나?’ 하는 생각도 잠시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이 방의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도미스 앞에서 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역시 닮은 사람이겠지?”

“말이 안 되잖아요. 그 도미스가 갑자기 클레렌드 대공 후계자가 되어서 나타나다니요.”

“맞아요. 이미 죽었는데.”

“도미스랑 클레렌드 아가씨랑 얼굴은 닮았지만 분위기가 전혀 달라요. 저도 다른 사람 같아요.”

대체적으로는 두려워하면서도 클레렌드 대공의 새 후계자가 도미스가 아닐 거라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조안은 반대 의견이었다.


“아냐. 분명히 도미스야. 보면 알잖아! 사람이 닮아도 어떻게 그렇게 닮겠어!”

“닮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세상에 사람이 몇인데. 사람 얼굴 면적이 얼마나 작아? 거기서 나올 수 있는 얼굴은 결국 거기서 거기잖아.”

다른 하녀와 하인들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도 도미스와 클레렌드 대공의 후계자가 동일인이 아닐 거라 설득했으나, 조안은 손가락을 깨물면서 고개를 저었다.


“도미스가 안야 아가씨를 죽이고 그 자릴 차지한 게 분명해…….”

그녀의 손가락이 초조하게 떨리자 하녀장이 나섰다.


“설령 도미스 본인이더라도 도미스가 안야 아가씨를 죽였으면 칼라인 님이 도미스를 데리고 다닐 리가 없지. 어쩌면…… 메이헴 부인이 도미스에게 이상한 반응을 보였던 거랑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말에 조안의 마음속에 또 다른 불안이 치켜든 듯, 그녀는 온 얼굴 근육을 꿈틀거리며 공포에 질려 하녀장을 보았다.


“도미스 시체를 처리할 때 칼라인 님이 나타났어요. 혹시…… 도미스가 죽은 게 아니어서…… 칼라인 님이 그때 걔를 살린 거라면…….”

이 말에는 다른 이들도 모두 반박하지 못하고 굳었다. 듣고 보니 그랬다. 칼라인은 도미스를 처리할 때 나타난 이였다.

그때 만약 도미스가 죽은 게 아니었다면…….


“왜 그래! 죽은 걸 분명 확인했잖아!”

“죽었다가 깨어났으면? 관에 넣어 묻어도 깨어나는 사람이 있다잖아. 도미스도 그렇게 깨어난 거면?”

“헛소리 좀 그만해!”

공포로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하녀장은 손을 휘저어 분위기를 환기하고 말했다.


“되었다. 내가 클레렌드 양이 도미스가 맞는지 떠볼 테니 그만해.”

 

* * *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도미스는 커다란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고, 하녀장이 그 앞에 차를 따라주고 있었다.

도미스는 책을 쳐다보고 있었으나, 라틸은 도미스의 시선이 책과 책 사이 하얀 여백에 가 있는 걸 알아차렸다.

도미스는 하녀장의 반응에 온 집중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하녀장이 찻주전자를 내려놓으며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실은, 예전에 아가씨를 닮은 분을 본 적이 있답니다. 아주 많이 닮았지요.”

책 쪽으로 시선이 가 있는데도 하녀장이 이쪽을 힐긋거리는 게 느껴졌다.


“귀찮으니 말 걸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도미스의 무미건조한 말에 움찔하는 것도.


“하나도 궁금하지 않거든.”

도미스가 책을 탁 덮고서 바라보자, 하녀장이 민망한지 붉어진 얼굴로 얼른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 * *

다시 장면이 바뀌어서, 하녀장이 자신의 방에서 조안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클레렌드 양과 도미스는 동일인이 아니야.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게 전혀 달라.”

“말이나 행동은 고칠 수 있잖아요.”

“그것도 어느 정도이지. 그 정도로 다르면 다른 사람이다.”

하녀장은 딱 잘라 말했지만 조안은 그래도 안색이 펴지지 않았다.


“……그래도 불안해요. 뭐든 해야겠어요.”

이윽고 하녀장의 방에서 나온 조안은 곧장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녀가 도착한 부엌처럼 생겼는데 성의 부엌이라 하기엔 크기가 너무 작고 사람 수도 적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조안은 작은 서랍을 열고 무언가를 조금 꺼내더니, 약사발에 그것과 찻잎을 마구 섞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 번씩 냄새를 맡는 모습이, 차에 약을 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라틸은 조안이 하는 짓보다 도미스가 대체 이걸 어디서 보는 건지가 더 무서워졌다.

조안은 하녀장의 방에서부터 지금까지 도미스가 내내 자신을 따라오는데,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죽여야 해. 우릴 죽이러 온 거야. 먼저 죽여야 해.”

이런 말을 하는 게 들릴 정도로.

그때. 갑자기 위쪽 등불이 실내에 바람이라도 불어오는 양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덩달아 내부가 어두워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하며, 벽에 드리워진 까만 그림자들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이에 놀란 조안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시선이 이쪽에 닿는 순간.

그녀는 공포에 질려 눈을 부릅뜨더니 들고 있던 약사발까지 떨어뜨렸다.

쨍그랑 소리가 나며 사발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조안은 덜덜 떨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단순히 도미스를 보고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 * *

그것도 로드의 능력인가?


‘아니면 내가 다른 로드들과 달리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도미스 개인이 가진 능력인가?’

잠에서 깬 라틸은 잠시 침대에 드러누운 채 생각했다.


‘모르겠어.’

어쨌건 이전까지 늘 당하기만 하던 그 순둥순둥한 도미스는 이젠 사라진 모양이었다. 바로 행동에 나선 걸 보면.

라틸은 상체를 일으켜 앉은 채로 이번에는 안야에 대해 생각했다.

전에는 그냥 도미스랑 친한 착한 언니 정도로만 여겼는데.

이번 꿈에서 안야와 도미스가 의견이 대립하는 걸 보고 나니, 언니 안야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궁금해졌다.

뱀파이어가 되었으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칼라인한테 물어볼까?’

“…….”

‘아니야. 묻지 말자. 도미스에게 수사관 안야가 소중한 사람이라면 관련된 기억을 계속 보여주겠지.’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칼라인에게 도미스에 관해 물어보면, 꼭 전 여자친구에 대해 물어보는 기분이 들 것 같아서 좀 이상하다.

칼라인이 도미스에게 냉대하면 꼭 내 일처럼 화나는데. 그 외 다른 일에 대해 물어보는 건 왜 이런 기분이 들까?


‘여우 가면이 하나 더 있던 것도 이상하고…….’

도미스 꿈을 꾸었는데 무언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 더욱 갑갑해진 건 오랜만이었다.

결국 제자리에서 한숨을 내쉬어봐도 해결되는 게 없자, 라틸은 기분을 환기하기 위해 간만에 시녀들과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마침 시녀들 몇몇이 간식을 먹으면서 자기들끼리 키득거리고 있었다.


“뭐 재밌는 일이 있나 봐?”

그러다 라틸이 다가가며 묻자, 시녀들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서로 힐긋거리면서 미세하게 웃는 걸 보니 정말 무슨 일이 있는 듯했다.

그게 이상해 보여서 라틸이 쳐다보자, 시녀들은 자기들끼리 또 키득거렸다.

개중 하나가 탁자에 펼쳐져 있던 잡지를 라틸에게 내밀었다.


“이거 좀 보세요, 폐하.”

잡지를 채 이쪽으로 다 가져오기도 전에 ‘황제의 마지막 후궁’이란 글자가 보였다.


‘마지막 후궁? 무슨 소리야?’

황당해하면서도 잡지를 받아 펼치자마자 라틸은 기겁했다.

‘후궁 기르골과 므라딤 초상화 특급 입수’라는 글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명패를 단 ‘누구세요?’라 물어보고 싶은 얼굴들 때문이지.


“이게 뭐야. 초면인 분들인데.”

“그러니까요.”

시녀들이 또 자기들끼리 웃어젖혔다.


“게다가 정보를 제공한 게 하렘 내부 사람이래요,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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