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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화. 쟤는 게스타가 아니잖아? (337/367)


336화. 쟤는 게스타가 아니잖아?
2023.05.17.



 
라틸은 휙 고개를 들었다.


“기르골?”

기르골이 지붕 위에 옆으로 누워 있었다. 므라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기르골!”

므라딤이 외치자마자 기르골의 머리 위로 물벼락이 쏟아졌지만, 기르골은 꿋꿋하게 누운 채 말을 이었다.


“뭐, 붕어가 기분 나쁠 일이지. 사실 붕어가 저놈보단 머리가 좋잖아.”

“기르골!”

“네 약점을 알려줘서 미안해, 아가.”

라틸은 인상을 찌푸렸다. 므라딤이 붕어 대가리라고? 하지만 므라딤은 500년 전에 있던 도미스와의 대화도 잘 기억……

라틸은 급격하게 신뢰를 잃은 얼굴로 므라딤을 보았다. 잘 기억하는 거 맞을까?

시선을 받은 므라딤은 억울해서 항의했다.


“난 기억력이 나쁘지 않소, 로드!”

“음…….”

라틸이 그래도 떨떠름한 표정을 풀지 않자, 므라딤은 정말로 억울해서 덧붙였다.


“우리 일족은 제대로 기억하려면 조금 복잡한 절차를 가져야 하오. 그걸 안 하면 빨리 잊어버리게 되지만 그건 일종의 축복이오.”

“축복이라니?”

“보기 싫은 걸 바로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므라딤이 외치자마자 라틸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파악했다. 기르골의 서약식이 보기 싫어서 일부러 기억을 안 했구나.


‘하지만 그 서약식 장면이 인상 깊게 남아서 계속 떠오르긴 하는 거야.’

정말로 붕어 대가리가 아닌가! 라틸은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그 탄식을 들은 므라딤은 화가 나서 기르골 위에 물줄기를 불러왔고, 라틸은 궁전이 물바다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므라딤의 팔을 잡았다.

기르골은 그 모습을 고깝게 내려다보았다.

* * *

므라딤은 이후 라틸에게, 그들 종족이 기억의 기간이 짧은 건 맞지만 ‘제대로’ 기억하면 오히려 절대로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에 담아둘 수 있다고 했다.

즉, 므라딤이 말한 500년 전 도미스가 한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라틸은 안도했다. 므라딤의 해 준 말이 그의 부실한 기억력이 만든 착오라면 라틸이 도미스에 관해 생각한 판단 등이 전부 뒤집히는 거니까.

그렇게 중간중간 500년 전과 도미스를 생각해서일까.

도미스가 각성한 뒤로 잘 꾸지 않던 그녀의 꿈을, 라틸은 오랜만에 다시 꾸었다.

* * *



“숨어 살지 않을 거다. 달아나지도 않을 거다.”

어딘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자리에 있는 건 칼라인과 도미스, 도미스가 직접 뱀파이어로 만든 믹스. 이렇게 세 명이었다.

믹스는 여전히 뭐가 뭔지 아리송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한결 차분해져 있었고, 칼라인은 어두운 얼굴이었다.


‘기르골은 없네.’

주위는 어둑하고 벽난로에는 불이 한 점도 없다.


‘불 좀 켜고 있어라 뱀파이어들아. 불 켜면 뱀파이어 자존심이라도 떨어지냐.’

라틸은 속으로 툴툴거렸으나, 세 명은 악의 세력은 악의 세력답게 행동할 각오라도 한 건지 아주 음침하게 굴었다.


“그러려면 힘이 필요해.”

“넌 지금도 강해.”

믹스가 걱정스럽게 하는 말에 도미스는 고개를 저었다.


“맞아. 강해. 하지만 나 혼자 강해 봐야 소용없어.”

“그건 그래.”

“당당하게 살고 싶어. 에이몬스 왕국에서 우리를 쫓겠지. 에이몬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우리를 쫓겠지. 그 자리에서 내가 힘을 썼으니. 그들 모두를 상대하려면 훨씬, 훨씬 더 많은 아군이 필요해.”

믹스는 이런 일에 대해 잘 모르는지 칼라인을 쳐다보았다.

칼라인은 자기 무릎 위에 손을 올린 채 돌처럼 가만히 있다가, 도미스와 믹스가 모두 자신을 보자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를 찾아서 도움을 받지요. 그자들은 인간이지만 어떤 의미로는 가장 도움이 됩니다.”

도미스의 기억 속에 칼라인과 처음 만났을 때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칼라인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아직 못 찾았나 보네.”

칼라인은 힐긋 이쪽을 보았다. 도미스를 보는 시선이란 걸 알면서도 라틸조차 흠칫할 정도로 어두운 시선으로.


“랑스터 백작가에 간 게, 거기에 흑마법사가 있단 이야기를 들어서였습니다.”

“흑마법사가? 안야를 데리고 돌아다닌 게 그럼…….”

“동료들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찾았어?”

칼라인이 고개를 젓는 걸 보니 성과가 거의 없었나 보다. 칼라인이 도미스를 걱정스레 보았다.

랑스터 백작가 일을 꺼내고 나니, 그곳에서 있던 일들이 떠올라 도미스가 걱정되는 눈치였다.

하지만 도미스는 덤덤하게, 정말로 속마음까지 덤덤하게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그럼 그곳에 한 번 더 가보지.”

믹스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어? 갔는데 없었다며?”

“그래도 가보겠어.”

“왜?”

“가보고 싶으니까.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고.”

“누군데?”

믹스의 질문에 도미스는 대답하지 않고 일어섰다.

* * *

장면이 바뀌고, 도미스는 절벽 가에 앉아 있었다. 라틸은 멍하게 있다가, 도미스의 습관을 눈치채고 흠칫했다.

그녀가 꽃을 꺾더니, 꽃잎을 하나씩 떼서 밑으로 던져버리던 것이다.


‘기르골……과 관련 있는 취미는 아니겠지? 기르골은 뜯어 먹는 거니까?’

하지만 신경이 쓰여서, 라틸은 도미스가 계속해서 꽃잎을 뜯어 버리는 걸 신경 쓰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났다. 일부러 내는 의식적인 큰 발소리.


‘칼라인인가?’

[칼라인.]

도미스는 돌아보지 않았으나, 라틸과 거의 흡사하게 상대를 알아차렸다.

칼라인은 도미스가 자신의 존재를 눈치챘다 여겼는지, 옆에 조금 거리를 두고 앉으며 바로 말문을 꺼냈다.


“주인. 기르골은 어떻게 할 겁니까?”

‘기르골?’

“그건 왜 묻지?”

“……두서없고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지만 나쁜 친구는 아닙니다.”

라틸은 칼라인이 기르골을 두둔하는 걸 듣고 놀랐다. 이때까지는 그럼 칼라인과 기르골이 완전히 틀어지진 않았던 건가?

도미스가 칼라인의 표정을 한번 보아줬으면 좋겠는데. 도미스는 계속 꽃만 뜯었다.


“악의가 없다고는 생각해. 나도.”

“힘을 기르는 문제에 대해선 기르골이 가장 잘 알 겁니다. 그는 선대 나이트 중 하나니까요.”

드디어 도미스가 고개를 돌렸다.

라틸은 칼라인의 표정을 보았다. 그는 말로만 저러는 게 아니라, 실제로 기르골이 신경 쓰이는 표정이었다.

도미스의 마음속에도 기르골과 있던 몇 가지 일들이 떠올랐다.

비 내리는 날 자신을 위로해주던 기르골,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하는 기르골, 양부를 죽여 줄까 묻는 기르골…….


“…….”

“주인.”

칼라인이 착잡한 목소리로 다시 도미스를 불렀다. 한참 만에야 도미스가 입을 열었다.


“좋아.”

“주인!”

칼라인의 낯빛이 아주 조금 환해졌다.


“단.”

“?”

“시간을 좀 두겠어. 지금은…… 말고.”

“주인…….”

“일 년 정도.”

 

* * *

다시 장면이 바뀌었을 때는 마차 안이었다. 커다란 마차 안에 도미스와 언니 안야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안야는 뱀파이어가 된 게 영 이상한지 연신 목을 주물러댔지만, 그러면서도 도미스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머쓱하게 웃었고 도미스는 그런 안야를 따라 웃었다.

하지만 안야는 이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은 듯 이전처럼 격의 없이 도미스를 대하진 못했다.


‘하긴. 자기가 챙겨주던 동생이 알고 보니 악의 우두머리라니. 장난치고 놀긴 힘들겠지.’

라틸은 안야가 어색하게 굴자 덩달아 어색해졌다.

그러나 도미스는 굳이 안야에게 말을 걸어 편하게 해주는 대신, 그저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도미스가 창문을 툭툭 두드리자, 창문에 친 커튼이 걷히며 칼라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무슨 일입니까, 주인?”

안야는 칼라인이 도미스를 주인이라 부르는 것도 어색한 듯 자기 팔을 쓸었다.

도미스는 그쪽을 보았지만 모른 척 넘어가고 칼라인에게 물었다.


“만약 그곳에 돌아가면.”

“?”

“내가 하녀로 지낼 때 따라야 했던 그 제약들. 그대로 다 따라야 하나?”

칼라인의 옆에서 검은 무언가가 지나갔다.

왜 칼라인은 마차 옆에서 걸어가나 했더니. 계속 걷는 게 아니라, 잠시 말에서 내려 걷고 있던 모양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네 번쯤 나자, 칼라인이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때까지 내내 조용히 웃고만 있던 안야가, 슬그머니 물었다.


“도미스. 복수할 거야?

도미스가 눈동자만 움직여 그녀를 보자, 안야가 몸을 흠칫 떨었다.

도미스는 다시 칼라인 쪽으로 눈동자를 돌리며 대답했다.


”당연히.“

 

* * *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도미스는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마차를 대어둔 곳 주위로, 하녀와 하인들이 짐을 옮겨주러 걸어오고 있었고.

가장 먼저 도미스를 알아본 건 하녀장이었다.

처음에는 그녀도 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또다시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클레렌드 양.“

그러다가 하녀장은, 가방을 덤덤하게 건네는 도미스의 얼굴을 보고 표정이 멍해졌다.

잠시 뒤.


“으악!”

그녀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짐을 운반하기 위해 걸어오던 하녀와 하인들도 도미스를 알아보고서 웅성거리거나 짧게 비명을 질렀다.

죽은 줄 알았던 도미스가 멀쩡히 살아 있고, 심지어 ‘클레렌드 대공의 후계자’가 되어 나타나자 경악한 것이다.

도미스는 무덤덤하게 그들을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틸은 도미스가 자신을 죽인 이들을 눈으로 확인하는 걸 알았다. 그저 도미스는 내색하지 않을 뿐이었다.


“닮, 닮은 사람이겠지.”

그러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도미스가 ‘확실하게 죽은걸’ 확인한 이들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죽은 사람, 심지어 그들이 죽인 사람이 멀쩡히 살아 있는 것보다는 그렇게 믿는 게 마음이 편할 것이다.

도미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마차에 함께 타고 있던 안야는 그새 또 보이지 않아서, 도미스가 무심히 있자 다들 덜덜 떨면서도 ‘저 사람은 도미스랑 닮은 사람’이라고 억지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게 다 얼굴에 드러났다.


“칼라인 경…….”

그래도 분위기가 무서워지자, 넘어졌던 하녀장이 다른 하녀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며 어렵게 칼라인에게 말을 붙였다.


“지, 지난번에, 오신, 분과 다, 다른 분 같은데요.”

칼라인은 힐긋 도미스를 보고서 건조하게 대답했다.


“이분이 진짜다.”

“진짜……라면…….”

“착오가 있어서. 이분이 진짜 후계자시다.”

하녀장은 마른침을 삼키고서 도미스를 쳐다보다가, 숨이 반쯤 사그라든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분은…… 여기에…… 처음 오시는 거지요?”

지나치게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니, 하녀장은 도미스가 ‘죽은’ 일을 아는 모양이었다.

그 일과 관련이 없어 보였는데. 뒤처리하기 위해 뒤늦게 누군가 보고를 올렸나 보다.

도미스를 죽인 이들 중 하녀 하나가 실신해 쓰러졌으나, 누구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칼라인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칼라인이 무어라 대답하려 할 때.


“또 왔네?”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라인은 입을 다물고 소리가 난 쪽을 보았고, 도미스도 그쪽을 보았다.

모여 서 있던 하인과 하녀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고용인들의 반응만으로도 라틸은 지금 등장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랑스터 백작.


“아. 또 온 게 아닌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면서 누군가 걸어왔다.

만약 라틸이 도미스의 얼굴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눈을 커다랗게 떴을 것이다.

다가오는 사람은 여우 모양 가면을 쓰고 있었다.


‘게스타……일 리는 없는데?’

당황해서 지켜보는 사이. 털레털레 걸어온 여우 가면이 도미스의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가까이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냄새를 빨아들이듯.

곧 가면 아래로 드러난 입술이 히죽 올라갔다.


“너구나. 궁전에서 깽판 치고 튀었단 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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