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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화. 우리는 특별하니까, 그렇지? (336/367)


335화. 우리는 특별하니까, 그렇지?
2023.05.14.


단백은 당황했다. 기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엔 당황할 것이다. 아이니 황후가 대적자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게, 그녀의 아버지라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 딸이 이상한 흑마법사와 접촉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멀리하는 게 좋을 거라 여겼지만 듣지 않았지요. 그 후로 딸은 흑마법사가 아니라 날 멀리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단백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생각보다 엄청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아이니는 원래는 아주 착한 아이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착하지요. 하지만 조금씩 변해가고 있어요.”

다가 공작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원래 연인이었던 헤움 황자와 헤어져 그 정적과 결혼해서일까요. 방황하다가 다음으로 찾은 사랑이…… 하필 라트라실 황제의 후궁이었지요.”

단백은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건 또 무슨 관계지?


“그 후궁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한 후로 아이니가 많이 상처받은 모양입니다.”

단백의 동공이 떨렸다. 황후와 황제, 고귀한 두 사람 사이에 얽힌 일이 가십지에서 나올 법하지 않은가.

그녀가 들을 준비를 한 건 비극적인 서사인데, 다가 공작이 말해주는 건 치정극이 아닌가.


“그…… 저기. 그렇군요. 참으로 방종한, 아니, 복잡한 관계네요.”

단백은 쩔쩔매며 중얼거렸다.

아이니 황후가 ‘라트라실 황제 본인 혹은 그 측근이 로드’라고 주장한 게 떠올라 혼란스러워졌다.

황후는 저렇게 말하는데, 라트라실 황제는 아이니 황후가 헤움 황자 일로 자기에게 원한이 있다 말하고, 아이니 황후의 아버지는 황후가 라트라실 황제의 연인에게 반해 쫓아다니다 차여서 원한이 있다고 말한다.

단백은 체할 것 같았다. 세속과 동떨어져 살아가며 올바른 뜻과 정의를 좇기로 맹세하고, 괴물을 사냥하며 살아온 그녀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둘 다 대적자인데. 사적으로 서로 싫어하는 건가?’

 

* * *



“흐하하하하하!”

게스타의 앞에서 꼭 들어가야 할 포인트 대사를 직접 써서 알려주던 라틸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라틸이 배를 쥐고서 웃어대자, 서넛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칼라인에게 작게 물었다.


“예전 로드도 이러셨습니까?”

칼라인은 시선을 피했다.
 

 

* * *

다가 공작이 게스타의 조종을 받아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단 걸 모르는 단백은 몹시 심란해져서 공작저를 빠져나왔다.

단백과 함께 돌아다니는 성기사 밀기도 이번에는 많이 놀란 눈치였다.

밀기는 단백을 따라 멍하게 걸어가다가 궁전 근처에 오자, 단백에게 슬쩍 물었다.


“다가 공작 말이 진짜라면 단장님, 아이니 황후는 라트라실 황제에 한해선 공정하지 못한 거 아닙니까. 아이니 황후 옆에서 도와도 괜찮은 거 맞을까요?”

“나도 모르겠다.”

일단 보고는 해야 했기에 두 사람은 궁전 안으로 들어가 아이니를 만났다.

아이니가 회의 도중이었음에도 단백을 만나기 위해 바로 나와주자, 그녀는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

조용한 방 안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 아이니는 기대에 찬 눈으로 단백에게 물었다.


“어땠는가? 나침반 이야기에 뭐라 반응하지?”

“라트라실 황제께선 별 반응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반응하지 않았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하는 표정으로 아이니 황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단백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라트라실 황제께선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셨습니다.”

“아예 관심이 없어 보여?”

“설령 그런 게 있다 해도 황후 폐하께서 가지고 있는 게 나을 거라 하셨습니다. 대적자의 검과 세트일 거라고요.”

“!”

아이니 황후는 미간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라트라실 황제는 로드일 확률이 가장 높다. 아니더라도 곁에 로드가 있어. 그런데 왜…… 단백.”

“네.”

“라트라실 황제가 로드란 걸 밝혀낼 다른 방도가 있겠나? 이렇게 떠보는 게 아니라, 정말 구체적으로.”

“현재로선 없습니다, 황후 페하.”

단백은 조금 불편해졌다. 아이니 황후는 라트라실 황제를 로드라 확신하는 게 아니라, 로드이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단백은 공정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이런 생각도 최대한 밟아서 눌렀다.

대신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황후 폐하. 왜 황후 폐하께선 라트라실 황제 쪽에 로드가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제가 먼젓번엔 그걸 묻지 못했습니다.”

“…….”

아이니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전대 로드의 기억 일부가 있단 이야기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이니 본인은 칼라인에게 ‘넌 절대 로드가 아니다’고 거부당한 뒤 여러 가지 일을 거치며 대적자란 걸 알게 되었다지만, 남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니를 수상쩍게 여길지도 몰랐다.

아이니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단백은 실망했다.


‘정말로 사이가 나빠서 서로를 공격하는 것뿐인가. 라나문과 달리 정의감 있고 의지도 강한 분일 거라 기대했는데…….’

그런 단백의 표정을 아이니 역시 알아차렸다.


‘라트라실 황제가 단백을 잡고 휘둘렀구나.’

아이니는 보이지 않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기 전에는 자신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가득 차 있던 단백이, 지금은 좀 거리를 두는 건 물론 말 하나하나에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타리움에서 무언가 일이 있었던 것이다.

단백이 인사를 올리고 나가자 아이니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서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도미스의 기억이 있을 거라면 차라리 칼라인과 사랑한 기억만이 아니라 다른 도움 될 기억이 함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걸러내기라도 한 것처럼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남아 있지 않다. 그저 달콤하고 절절한 애정을 기반으로 한 기억들뿐.

아이니는 두 손을 모으고서 어두운 시선으로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최초의 내 사람이 될 거라 여겼던 단백도 빠져나갔다. 고지식한 성품이니 단백은 내 적이 되지 않겠지만 아군도 되지 않을 거다. 라트라실이 로드란 걸 확신하기 전까진.’

아이니는 자신에게 부족한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사람. 그녀에겐 뜻을 같이할 사람이 없었다. 가진 건 온갖 화려한 명패뿐.


‘사람. 내게도 사람이 필요하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은 쓸 수 없다. 현재 아이니의 곁에 있는 이들은, 진심으로 그녀를 아낀다 해도 온전히 그녀의 사람이라 볼 수 없었다. 그녀 가문의 사람이지.

그런 자들은 다가 공작을 상대하면서 쓸 수 없다.

다가 공작의 측근들 역시 마찬가지. 하이신스 황제를 상대로는 한 패이지만, 아버지를 상대로 싸울 때는 함께할 수 없는 이들이다.

하이신스 황제의 측근들은 말해 무엇할까.


‘아낙차? 아니. 안 된다. 그녀는 라트라실을 증오하지만 자기 나라를 사랑해. 타리움에 해가 된다면 나를 배신할 거다.’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전의 대적자는 성기사들을 끌고 로드와 대립했다는데, 성기사단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로드 쪽에 붙어 버렸고, 다른 하나는 애매하게 굴고 있고…….


‘대적자들의 스승.’

한참 만에 아이니의 머릿속에 누군가 떠올랐다. 수천 년 동안 대적자들을 도운, 대적자들을 강하게 만들어 준 대적자들의 스승.


‘기르골.’

아이니의 눈이 까맣게 내려앉았다. 기르골은 헤움 황자를 죽인 두 명의 원수 중 하나였다.

그런 자와 손을 잡는다고?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용하고 버리더라도 당장은 그자의 힘이 필요해.’

 

* * *

이걸로 또다시 대적자의 무기가 될 사람 하나를 떨어뜨렸다.

라틸은 느긋하게 안락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여전히 라틸은 전쟁에 반대였다. 자신의 백성들을 전생에 휩쓸리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언제 어떤 식으로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는 위험 요인들을 죄다 후궁에 몰아넣은 게 아닌가.

하지만 후궁에 넣지 못한 딱 하나. 아이니만큼은 라틸도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아이니가 무슨 수를 쓰려고 할 때마다 무기가 될 만한 걸 다 뺏거나 꺾어버리는 수밖에.


‘그냥 황후로 있어 아이니. 나 말고 네 나라나 신경 쓰라고.’

라틸은 커피잔에 힘을 꽉 주었다.

라틸이 세계 정복에 관심이 없더라도 로드가 환생하는 것과 같은 500년 주기로 몬스터들이 확 늘어나는 건 확실하다.

도미스가 각성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길거리의 돌처럼 치이며 살 때도 숲에는 몬스터들이 생겨나 돌아다녔다. 로드라면서 도미스 본인도 여러 번 거기에 공격을 당하기도 했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은 이번에도 결국 깨어날 것이다. 라틸은 세계 정복엔 관심이 없지만, 황제로서 그것들은 꼭 막아내야 했다.

이성이 있는 어둠의 종족들은 피인어들 대하듯 회유하면 된다지만, 좀비 같은 것들은 라틸이 통제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려면 아이니와 싸울 때가 아니었다. 힘을 비축하고 성기사들을 늘려야 하는데…….


‘젠장. 아이니가 날 로드라고 자꾸 몰아가지만 않으면 신전을 지원해주겠다고 해서 성기사 수를 늘리고 싶은데.’

“폐하.”

뒤에서 나지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라틸은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돌렸다. 시종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므라딤 님이 폐하를 뵙고 싶어 합니다.”

“들어오라 해.”

라틸이 허락하자 시종이 나가고 잠시 뒤 므라딤이 들어왔다. 막 물에서 나와 바로 온 건지 머리카락이 축축한 모습이었다.

라틸은 활짝 웃으면서 일어나 므라딤을 반겼다.


“므라딤! 얼른 와.”

로드 편에 붙었다 대적자 편에 붙었다 반복하는 종족의 수장이니, 므라딤에게는 계속 잘해주어야 했다.

라틸은 ‘널 보니까 너무 좋다’는 표정을 계속 띠워 놓고서 물었다.


“여기서 보니까 또 새로워서 좋네. 그래, 무슨 일로 왔지?”

그러다가 라틸은 므라딤이 퍽 심각한 표정인 걸 보고 어리둥절해졌다.


“므라딤? 왜 그러나?”

“폐하. 전에 얘기했던 서약식 말이오.”

라틸은 “응.”하고 반사적으로 대답하다가 “응?”하고 되물었다. 전에 므라딤이랑 후궁 서약식 이야기를 했던가?

바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주춤하는 사이, 므라딤이 말을 계속 이어갔다.


“밤에 조명을 켜놓고 온실 앞에서 사람들을 적게 초대해놓고 하기로 하지 않았소. 반지도 주고받고. 정말로 예쁜 계획을 세웠잖소.”

라틸은 “으응?” 하고 되물었다.

잠시 므라딤이 하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므라딤이랑 서약식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약식을 했더라도 저렇게 구체적으로 하진 않았을 거 같은데?


“폐하와 내가 준비한 서약식을 왜 기르골이 먼저 한 건지 모르겠소. 이게 어찌 된 일이오?”

“?”

라틸은 멍하게 그를 쳐다보다가 되물었다.


“어?”

그가 농담을 하는 건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지금 므라딤이 말한 서약식 모습, 꼭 기르골의 서약식 광경과 같지 않은가.

라틸이 맹하게 쳐다보자, 므라딤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기르골이 아무래도 우리 서약식 계획안을 본 것 같소?”

어디서? 라틸은 멍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지금 농담하는 거야?”

“무슨 말이오?”

“어?”

“하여튼 빨리 우리도 서약식을 해야겠소. 물론 기르골 그자와는 전혀 다르게 해야지. 이미 서약식을 한 놈이 또 하진 않겠지만 욕심 많은 놈이니 모르지 않소.”

“서약식?”

라틸은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므라딤의 말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서약식 안 할 거요?”

“아니, 해야지. 해야 하는데. 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해도 될지. 물론 네가 후궁으로 올 거란 건 전 국민이 알지만 그래도…….”

“해야 하오. 나는 기르골 그놈과 달리 밤에 할 거요. 조명을 예쁘게 켜고 손님은 조금만 초대할 거요. 반지도 주고받고. 참 예쁘겠지? 우리 서약식은 특별해야 하오.”

“!”

라틸은 입을 벌리고 므라딤을 쳐다보았다. 그가 농담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이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농담 쪽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누군가 설명해주었다.


“저거 붕어 대가리야,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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