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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화. 그대만 보여서 (335/367)


245화. 그대만 보여서
2023.05.10.



“안 뺏어가. 따뜻하게 데워주려고 그런 거야.”

콰아악-!

모이야는 내 말을 못 믿겠는지 바로 입에서 불을 뿜어 소시지를 노릇하게 구웠다.


“저도 할 수 있어요!”

“……그래, 어서 먹어.”

나는 살짝 흥분한 모이야를 다독이며 웃었다.


“비를 피하는 게 좋겠군. 어서 마차로 가지.”

리넬의 말에 우리는 모두 대기 중인 마차로 향했다.

람스가 계속 자지러지게 울었다.

로지가 안고 달래다가 물음을 그치지 않아 노튼 황자의 품으로 옮겨 갔지만 소용없었다.


“추워서 그런 거 같은데……. 제가 안고 있을게요. 그럼 금방 따뜻해질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노튼 황자가 내게 람스를 건네주었다.

나는 마차로 걸어가는 동안 람스를 품에 꼭 끌어안고, 팔과 가슴으로 열을 모았다.

다행히도 내 품에서 따뜻함을 느낀 람스가 서서히 울음을 그치기 시작했다.


 

***

마차 안에는 그가 황궁에서 준비해온 타월과 담요가 마련돼 있었다.

나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비에 젖은 람스의 옷을 벗겨내고, 타월로 몸을 닦아줬다.

람스가 갈아입을 옷은 없어서 할 수 없이 담요로 람스의 몸을 꼼꼼히 두른 후에 또 다른 담요로 한 번 더 감싸서 품에 안았다.

추위에 잘게 떨던 람스의 몸이 서서히 진정되어 갔다. 창백했던 두 볼도 생기가 돌아왔다.

나는 람스를 내려다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런 모습을 자주 보겠군.”

내 앞에 앉은 그가 람스를 안고 있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푸근해 보이나요?”

내가 웃으며 묻자, 그가 꽤 진중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너무…… 섹시해 보여.”

“!”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목소리는 또 어찌나 단호하신지.

‘농담이죠?’라고 물으면 그가 화를 낼 것만 같았다.

순간적으로 몸에 열이 확 올라 지금 내 얼굴이 얼마나 빨개졌을지 짐작이 갔다.

마차 안에는 우리 둘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 남자가 대체 왜 저래?

리넬의 옆에는 노튼 황자가 내 옆에는 로지가 앉아 있었다.


“으흠흠……!”

노튼 황자는 괜히 마차 창문을 열었다가 닫았고,


“에구머니나…….”

로지는 자기가 더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두 사람은 차마 황제에게 뭐라고는 못 하고 그저 뭐 씹은 얼굴로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모이야는 참지 않지.


“흥, 섹시가 얼어 죽었지 모이야~.”

마차 안에는 새끼 와이번들까지 함께였다.


“그런 소리 나불대는 폐하가 더 섹시하지 모니~.”

리넬 바라기인 모니만 그를 고운 눈길로 바라봤다.


“폐, 폐하…… 듣는 귀가 많습니다.”

내가 그에게 눈치를 주며 흘겨봤다.


“그렇군. 짐의 눈엔 그대만 보여서 둘만 있는 줄.”

그가 태연하게 대답하며 웃는다.

창피해서 몸에 열감이 더 치솟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마차 밖으로 나가 다시 흠뻑 비를 맞고 싶었다.


‘하아,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는!’

어쩌지? 열감이 점점 배에 몰려드는 게 느껴지는데…….


“로지, 짐과 자리를 좀 바꾸지.”

리넬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안색을 살피듯 바라보며 로지에게 말했다.

그도 내 몸에 열이 오르는 걸 눈치챈 듯했다.

하긴, 내 얼굴이 달아오른 상태라서 모를 수가 없겠지.


“……예? 예에, 폐하.”

로지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의자에서 바로 엉덩이를 떼고 그와 자리를 바꿨다.

로지에게 자리를 바꿔 달라는 이유가 설마 마차 안에서……?

에이, 아니겠지?


‘그래. 지금 우리를 지켜보는 눈이 몇 개인데, 아니겠지.’

옆자리에 앉은 그가 내 불안감을 조장시키는 눈빛으로 나를 스윽 쳐다본다.


“왜, 왜요?”

“황제한테 그런 질문은 적절치 않아.”

이 남자는 꼭 이럴 때면 황제라는 호칭을 쓰더라.

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세요?”

“왜일까?”

그는 알면서 뭘 묻느냐는 표정으로 되레 내게 질문했다.

이대로 있으면 그의 입술이 그대로 내게 돌진할 거 같아서 나는 앞에 있는 인간 둘과 와이번 둘을 좀 의식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는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고개를 끄덕이다가 시선을 앞에 두고 입을 뗐다.


“이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들어라.”

“오냐, 듣고 있다.”

모이야가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대꾸했다.

모이야와 모니는 마차 벽에 달린 선반 위에 나란히 앉아 똑같이 다리를 꼬고 앉아 우리를 정면에서 내려다봤다.


“짐이 눈을 뜨라고 할 때까지 다들 눈 좀 감고 있어. 람스처럼 잠들면 더 좋고.”

리넬의 생뚱맞은 명령에 로지와 노튼 황자가 서로를 쳐다보다 동시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폐하,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노튼 황자가 호기심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리넬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탑주의 진단에 따르면, 젤다가 몸의 열이 오르면 짐이 반드시 풀어줘야 하거든. 그 방법으로는…….”

아, 나는 그의 입을 내 입술로라도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배에 몰리는 열기가 좀 걱정스러워 민망함을 꾹 참았다.

진지한 태도로 리넬의 말을 경청하던 두 사람은 동시에 눈부터 감았다.


“열감이 더 오르시기 전에 얼른 하시지요. 그렇지 않아도 저는 눈을 좀 붙이고 싶었습니다.”

“네, 저희는 신경 쓰지 마세요.”

노튼 황자와 로지가 눈을 꼭 감은 채 말했다.

아니, 눈 감는 거까진 그렇다 치는데 귀는 왜들 막는 거야?

당황함과 창피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의 입술을 내 입술에 불쑥 닿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황궁에 가면 진짜 나 소시지 많이 줄 건가…… 아이쿠, 벌써 입술을 먹기 시작했지 모이야~.”

모이야가 질문하듯 한 손을 들고 말하며 눈을 살며시 떴다.

너는 머릿속에 온통 소시지밖에 없니?

하지만 모이야가 사랑에 맞이하는 소시지 덕에 람스의 목숨을 구했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모이야는 너무 눈치가 없지 모니~.”

모니가 손으로 모이야의 눈을 가렸다.

기특한 녀석.


“역시 우리 예쁜 모니는 눈치가 빠르구나.”

리넬의 칭찬에 모니가 눈을 감은 채 히죽거리며 좋아한다.


“폐하, 모니는 예뻐서 예쁜 짓만 하지?”

“그럼 그럼. 짐이 알고 있는 암컷 중에 모니가 젤 예쁘지.”

“히잇.”

그에게 예쁘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모니는 모이야의 눈을 손으로 더 강하게 압박했다.


“으윽, 누르지 마, 모니. 눈깔이 빠지겠지 모이야~!”

두 녀석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다 내 얼굴에 그의 차가운 손길이 닿았다.

내게는 시원한 그의 체온이 느껴지자 몸의 열기가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오버된 열감만 내려갈 뿐, 기본적으로 높은 내 체온은 그대로라서 품에 안긴 람스가 느끼기엔 여전히 내 품은 따뜻하게 느껴질 것이다.

내가 자꾸 의식하며 몸을 빼자 그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살거렸다.


“한 번 제대로 하고 열을 빨리 내리는 게 낫잖아.”

“…….”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맞는 거 같아서 나는 앞에 앉은 두 사람과 선반 위에서 눈을 가리고 있는 모이야와 모니를 한 번씩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그가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꾹 찍어 누르듯 입을 맞췄다.


 
가벼운 입맞춤에도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한여름에서 시원한 늦가을로 계절이 바뀌는 기분이다.

이래서 내가 그의 입술을 끊을 수가 없지.

입맞춤 후에 그는 내 등과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그러다 그는 잠결에 옹알거리는 귀여운 람스의 얼굴을 보고는 람스의 머리도 쓰다듬어줬다.


“에취-이!”

공교롭게도 람스는 그의 차가운 손길이 닿자마자 재채기를 했다.


“안 되겠어요. 다시 자리 바꾸세요. 계속 옆에 계시면 람스가 추워해요.”

“……아무래도 그런 거 같군. 그대는 괜찮아졌어?”

“네, 열감이 많이 내려갔어요.”

“벌써?”

그가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에취!”

하지만 람스가 다시 한번 재채기를 하자 할 수 없이 로지와 다시 자리를 바꿔 앉았다.


“……눈치는 람스가 제일 없지 모니~.”

모니가 눈을 감은 상태로 중얼거렸다.

***

남 대륙 파트샤 제국의 황실.

칼바인 황자와 제스퍼 황자비는 라피온 제국에서 레실리아 공주가 보내온 편지를 읽었다.

두 사람은 편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티 타임을 가졌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제스퍼 황자비는 찻잔을 우아하게 들며 칼바인 황자에게 물었다.


“당연히 레실리아 공주를 노튼과 결혼시켜야지.”

“라피온 황실에 머물렀을 때, 우리도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하긴 했잖아요. 그때는 왜 숨겼던 걸까요?”

제스퍼 황자비는 뭔가 찜찜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다시 편지를 집어 들었다.

레실리아 공주가 보낸 편지 안에는 로지의 얘기도 있었다.


“편지를 보면 노튼 황자가 로지 마마와 좋아하는 사이가 된 모양인데…… 그때 이미 레실리아 공주와 사이가 틀어져서 쉬쉬했던 걸까요?”

레실리아 공주가 보낸 편지에는 노튼과 로지를 마치 불륜 관계처럼 써 있었다.

하지만 리넬 황제가 자신의 후궁을 타국의 황자에게 양보할 정도면 두 사람은 이미 보통 사이가 아님이 분명했다.


“고민할 게 있나? 두 사람 사이에 아이까지 있다는데. 게다가 아들이라잖아.”

칼바인 황자는 노튼의 감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편지를 보니, 리넬 황제가 로지 마마를 노튼 황자와 이어주려는 걸 보면 두 사람의 사이가 심상치 않은 거 같은데요?”

“제스퍼, 감정은 변하게 돼 있어. 우리처럼.”

칼바인 황자의 마지막 말에 제스퍼 황자비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우리는 람스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친모를 대접해 주는 게 낫지.”

칼바인 황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제스퍼 황자비의 손을 잡고 손등을 다독였다. 그녀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 생각엔 노튼 황자와 로지 마마를 억지로 떼어내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이미 레실리아 공주에 대한 아무 감정이 없다면 억지로 결혼시키는 건 아니라고 봐요.”

제스퍼 황자비가 제법 단호하게 제 의견을 내세웠다.


“일단 레실리아 공주와 결혼하라고 노튼을 설득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써야지.”

설득이 안 되면 두 사람을 그냥 결혼시키는 게 아니고, 다시 방법을 쓴다고?

무슨 방법을?


‘설마 로지 마마를 없애려는 건가?’

잔인한 성정의 칼바인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자신의 형인 1 황자를 죽이고, 파트샤 황실을 장악했겠지.’

제스퍼 황자비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칼바인 황자가 휘두른 검에 자신의 남편이 죽어가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날, 그녀의 행복도 죽어버렸다.

1 황자를 따라 죽으려고 했으나 생각을 바꿨다.

죽는 건 남편의 복수를 한 뒤에 죽어도 늦지 않을 터였다.

그녀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은 2 황자인 칼바인이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신의 형을 제거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형의 아내이자 형수였던 그녀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형을 죽여야 그녀를 차지할 수 있고, 파트샤 제국의 황제가 되어야 그녀를 계속 곁에 둘 수 있으니까.

칼바인 황자는 그녀에게 그 사실을 누누이 말해 왔지만, 그녀는 결코 믿지 않았다.


‘권력에 눈이 멀어 나를 이용하는 거야.’

그렇게 확신한 제스퍼 황자비는 일부러 칼바인 황자 몰래 아이를 갖지 못하는 약물을 먹고, 자신은 원래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라고 속였다.

칼바인 황자의 핏줄을 세상에 남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쨌거나 콩가루가 펄펄 날리는 파트샤 황실의 이런 사연 덕에 칼바인의 황제 즉위식도 무기한으로 미뤄지고 있다가 최근에야 즉위식 날짜가 정해졌다.

황제의 자리는 오래 비워둘 수 없는 일이었기에 대신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황후의 자리는 얘기가 달랐다.

제스퍼 황자비의 가문은 워낙 세력이 약한지라 대신들 사이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당사자인 그녀 역시 결혼식은 미룰 수 있는 대로 미루고 싶었다.

하지만 칼바인 황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면, 결혼식도 조만간 열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복수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황제 즉위식 날이었다.

제스퍼 황자비는 홍차를 마시는 척하며 그에게 다시 물었다.


“노튼 황자가 끝까지 로지 마마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어쩌실 거예요?”

“죽여야지.”

망설임 없는 확고한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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