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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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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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어
2023.05.10.
대신관은 저 말을 이미 다른 이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레안 황자. 레안 황자도 자기 동생이 로드라고 했다.
그러나 대신관은 단백의 말에 라틸보다 백화가 더 신경 쓰였다. 이상하게도. 그러면서도 백화 쪽을 쳐다볼 수는 없었다.
대신관은 시선을 단백에게 고정했다. 말을 건넨 젊은 성기사단장은 열의와 정의감에 눈을 빛내는 사람이었다.
돈이나 명예, 권력보다 진실과 올바름을 믿는 그런 사람. 악의로 저런 말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대신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아니라고 봅니다.”
느린 목소리였으나 단호했다.
“폐하께선 그런 사람이 아니십니다.”
단백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단언하십니까? 증거라도 있으십니까?”
“전 이미 신성력으로 폐하를 몇 번이나 치료해 드렸답니다, 단장. 폐하께선 일이 있을 때마다 절 찾으시고, 악몽을 꾸셔도 절 끌어안고 주무시지요.”
단백은 끌어안고 잔단 이야기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대화를 듣던 백화도 밝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단백 경. 폐하께선 신전 부흥정책도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동시대 모든 왕들 중 가장 신전에 우호적인 분이시지요. 어떻게 그런 분을 두고 그런 몹쓸 의심을…….”
백화는 말끝을 흐렸다. 불쾌하단 티가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단백은 두 사람의 단호한 태도에 당황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저렇게 반박하다니?
* * *
단백이 천천히 걸어가자, 뒤에서 단원이 살짝 짜증을 냈다.
“단장님은 좋은 뜻으로 말씀해주시는데 어떻게 저렇게 다들 퉁명스럽게들 구시는지. 너무합니다.”
그러나 단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원은 단백이 조금 멍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걸 보고 눈치를 보았다.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단백은 “어?”하고 고개를 돌렸다가 “아아.” 하고 탄식했다.
“괜찮다. 그냥. 조금 자책하고 있었어.”
“단장님이 뭘 자책하십니까? 그저 중요한 이야기를 전하신 것뿐인데요.”
“아니…… 내가 실수했다. 라나문 님이 대적자 임무를 멀리하는 상황이라 막막했는데. 아이니 폐하께선 대적자 임무를 수행하려 하시니까 흥분했어.”
“네? 그러니까 어느 부분이요?”
“한쪽 말만 듣고 판단했잖아.”
“그야 말씀하신 분이 대적자시니까요.”
“검은 라트라실 폐하도 뽑았어. 하지만 난 그분의 이야기는 듣지 않았지. 라나문 님과 부부시니까 당연히 한배라 여긴 거야. 가장 힘겹게 검을 뽑기도 했고. 내 실책이다. 멋대로 판단해선 안 됐어.”
단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가 부끄럽구나. 대신관님과 백화 경이 폐하를 바로 두둔한다는 건 그분이 올바른 황제이기 때문이겠지.”
단백은 말로만 자책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길로 곧장 라틸을 찾아가서, 자신이 단원에게 한 이야기를 그대로 한 다음 사죄했다.
라틸조차 감탄할 정도로 깔끔한 태도였다.
‘성실하고 고지식한 타입이구나. 자이신 과인가.’
같은 성기사단장인데도 백화는 조금 세속적인 점이 있었다. 신전을 부흥시키고 싶어 한다거나 자이신을 후궁 중 첫째로 밀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물론 라틸은 백화의 이런 점을 좋아했지만, 단백처럼 정직하게 나오는 타입도 싫지 않았다.
라틸은 미소 지으며 단백을 보다가 순순히 같이 사과했다.
“괜찮네. 나도 사실 과하게 반응했지. 그대가 아이니 황후의 사람이라 생각했거든.”
“두 분은 사이가 나쁘십니까?”
“음. 처음엔 이렇지 않았는데. 몇 가지 안 좋은 일이 있었지.”
“안 좋은 일이라니요?”
“나나 황후의 체면이 있으니 다 얘기하긴 좀 그렇고.”
라틸이 말끝을 흐리자 단백의 눈이 동글동글해졌다. 호기심이 드는 모양.
라틸은 일부러 뜸을 들였다가 물었다.
“그래도 한 가지 예시로 이야기해주자면, 경. 혹시 아이니 황후의 옛 연인이 식시귀가 된 일을 아는가?”
“헤움 황자님…… 이야기지요?”
단백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들었습니다. 안된 일이지요. 식시귀는 자의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물론 해로운 존재이지만……. 누가 그런 짓을 한 걸까요?”
“뭐, 누가 황자를 식시귀로 만들었는진 나도 모르지. 먼 나라 사람이니. 하지만 식시귀가 된 헤움 황자를 누가 죽였는진 안다네. 내가 그랬거든.”
단백은 멍하게 이야기를 듣다가 화들짝 놀랐다.
“네?”
“공개적으로 죽였지. 성수를 관에 이만큼 채우고 안에 넣었어.”
라틸이 활짝 웃는데, 단백은 조금 소름이 돋았다.
물론 식시귀는 해로운 존재이고 죽여야 하는 게 맞지만, 어쨌든 황자였던 이를 공개적으로 죽인 이야기를 하면서 라틸이 재밌다는 듯 웃자 등골이 찌릿했다.
“아이니 황후가 가출했을 때, 본인은 납치라 주장하지만 내가 볼 땐 가출이야. 하여튼 황후가 우리나라 수도에 가출해 있을 때 그걸 보았다네. 충격을 받았나 봐. 이후론 짐을 아주 많이 싫어해.”
단백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구나. 과연. 싫어할 만도 하다. 누구라도 싫어하게 될 것 같다.
더욱 놀라운 건 저게 두 사람 사이에 있던 ‘몇 가지 안 좋은 일 중 하나’라는 거 아닌가. 저런 일이 여러 개 있었단 거고.
하지만 별개로 대신관과 백화가 왜 라트라실 황제가 로드라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식시귀를 성수에 담가서 죽였단 이야기를 하면서 저렇게 맑게 웃다니.
* * *
대신관은, 소파 맞은편에 앉아 유행하는 가십지 후궁 랭킹란을 보며 그래프를 그리고 있는 백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대신관의 랭킹이 한 단계 떨어진 걸 확인한 백화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머리에 손을 얹더니 숨을 골랐다.
이윽고 결연한 표정으로 손을 내린 백화가 후궁 랭킹 변화에 대한 기자들의 분석을 읽기 시작하자, 대신관은 슬그머니 말을 붙여 보았다.
“백화 경. 백화 경은 아까 단백 경의 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 단백 경이요? 아아. 단백 경이요.”
백화는 가십지에 집중하느라 잠시 머리가 바로 굴러가지 않는 듯 중얼거리다가 가볍게 대답했다.
“당연히 헛소리이지요.”
“그렇게 생각합니까?”
“당연히요. 뭐. 우리 폐하께서도 아이니 황후는 절대로 대적자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그러셨잖아요?”
백화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말에 대신관은 그제야 안심해 어깨에 힘을 뺐다.
백화는 다시 가십지에 집중했다.
하지만 대신관은 그러진 못하고서, 다시 라틸에 대한 생각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라틸의 침실에서 어두운 기운이 나오던 걸 떠올리고 표정이 흐려졌다.
두 명이 라틸을 로드라 주장하고, 어두운 기운은 계속 흘러나오고, 악을 가늠하는 귀걸이는…….
‘하지만 내가 아는 폐하는 누구보다도 밝은 분이다.’
성격이 밝은 게 아니라 흘러나오는 느낌이 아주 밝았다. 로드가 정말로 악의 로드라면 그렇게 밝아선 안 되는 거 아닌가?
게다가 대신관이 보기에 라틸은 그리 사악하지도 않았다.
순한 건 아니고, 좀 잔인한 명령을 내린 적도 몇 번 있긴 하지만, 원래 황제란 그런 게 아니던가. 때로는 무정하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위치.
라틸만큼 냉정한 결단을 내린 황제가 드문 것도 아니었다.
‘신께서 나를 폐하께 인도하시고 폐하의 남자로 이끄셨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을 거다.’
대신관은 전에 황제가 한 질문을 떠올렸다. 대신관들은 로드와 대적자의 싸움에 왜 참여하지 않느냐 물었지.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겠다.’
당시에도 생각은 했지만, 이런저런 일이 많아 어영부영 넘어갔는데. 이젠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대신관이 찾는 해답은 그 안에 있을지도 몰랐다.
* * *
“단백이 떠났습니다.”
다음날. 라틸은 업무 중에 서넛의 보고를 받았다. 라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이제 받은 걸 그대로 돌려줄 차례네요.”
“달리 생각하신 게 있으십니까?”
“있습니다. 처음 생각한 것과는 좀 달라졌지만.”
“달라지다니요?”
“단백이 내게 사과하더라고요. 그래서 약간 바꿨습니다.”
라틸은 의뭉스럽게 웃고서 펜을 내려놓았다.
“게스타에게 점심때 내가 거기 간다고 전해요. 아. 타시르도 오라 하고.”
* * *
단백은 카리센 사절단과 함께 돌아가면서 그들이 조금 불편하게 여겨졌다.
타리움에 갈 때는 그런 느낌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약간 거리를 두고 싶었다.
아마 타리움에 갈 때는 완전히 아이니 황후의 말에 몰입해 그녀의 편이었고, 지금은 애매한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단백은 카리센 수도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사절단 대표에게 말했다.
“다른 볼일이 있어서. 저는 잠시 신전에 들렀다 갈 테니 먼저 가시지요.”
사절단 대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떠났다. 단백은 자신이 한 말처럼 근처 신전에 들러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신전 인근 식당에서 홀로 식사를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녀의 귀로 묘한 말이 들려온 건 단백이 막 식사를 거의 끝냈을 즈음이었다.
“다가 공작님은 황후 폐하를 굉장히 아끼셨지 않나?”
“그러니까. 이상도 하지. 사이 좋은 가족이었는데, 왜 갑자기 공작님을 가두신 걸까?”
“가둔 건 아니지.”
“말이 좋아 요양이지, 싫다는 공작님을 억지로 내려보내려는 거 아닌가.”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다 권력 때문이야. 권력을 두곤 부모자식이건 형제자매건 멱살잡이를 하게 되지.”
황후 폐하? 단백은 그쪽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현재 ‘황후 폐하’란 호칭으로 불리는 건 단 한 명. 아이니 황후뿐이었다.
게다가 다가 공작은 아이니 황후의 아버지이니, 저 무리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건 아이니 황후와 다가 공작의 이야기일 터.
두 사람이 싸웠다고? 아이니 황후가 다가 공작을 가두어?
단백은 그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싶었지만, 그들이 다른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이 호기심은, 수도로 돌아온 단백에게 다가 공작의 사람이 은밀히 다가와 초청했을 때, 그녀가 초대를 받아들이는 이유가 되었다.
“괜찮을까요?”
단백술의 다른 성기사는 걱정했지만, 사태를 중립적으로 바라보기로 한 단백은 라트라실 황제에 대해 여러 가지 조사한 것처럼 아이니 황후에 대해서도 조사하는 게 옳다고 여겼다.
그녀는 다가 공작의 심부름꾼을 따라 뒷문을 통해 공작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공작은 뒷문과 가까운 1층 구석진 방에 앉아 있다가, 그녀가 안으로 들어오자 얼른 몸을 일으키며 악수를 청했다.
단백이 얼결에 그와 악수하자, 공작은 자신의 심부름꾼을 내보내며 말했다.
“단장님의 부하는 계속 데리고 있어도 됩니다. 여기까지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니까요.”
체념 어린 목소리는 두 세대에 걸쳐 카리센에 큰 목소리를 내던 인물답지 않았다.
단백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절 무슨 일로 보자 하신 겁니까?”
옆 마을에서 다가 공작과 아이니 황후의 불화에 대해 듣지 못했다면 그냥 아이니 황후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할 말이 있었다 여겼을 텐데.
그 불화 이야기를 들어서인가. 괜히 다가 공작이 할 말이 신경 쓰였다.
단백술의 또 다른 성기사는 단백의 뒤에, 전에 백화가 한 것처럼 딱 붙어 섰다.
다가 공작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서 힘겹다는 듯 입을 열었다.
“혹시 단백 경은 내 딸에게 이상한 검은 연기가 붙은 걸 못 보았습니까?”
단백은 멀뚱히 듣고 있다가 흠칫했다.
“보았습니다. 흩어보려 했지만 잘 안 됐지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공작님이……?”
다가 공작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내 딸은…… 대적자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