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말을 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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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화. 말을 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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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화. 말을 전하는 사람
2023.05.07.
그런 물건은 없어. 라틸은 대번에 생각했다. 그런 게 있다면 기르골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르골은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런 물건을 찾으러 들지도 않았다.
기르골은 로드를 찾는 데 꽤 애를 먹었다. 애를 먹은 것치고는 좀 허망하게 진실을 알게 되긴 했지만.
어쨌건 그런 편리한 나침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틸은 비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참았다.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든, 그걸 드러낼 수는 없었다.
라틸은 대외적으로 로드가 아니었다. 그런 물건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야 했다.
누군가 ‘그런 게 있대’라고 말하면 놀라야 했다.
“정말인가?”
라틸이 호기심이 드는 척하자, 단백이 바로 대답했다.
“네. 방향을 알려줄 뿐 거리를 알려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방향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원하는 상대를 찾을 수 있겠지요. 아주 유용한 물건 같습니다.”
“아닌 거 같은데.”
“예?”
“그런 게 있다면 대적자가 나타날 때까지 자네들이 왜 가만히 갖고 있기만 했겠어?”
“!”
“대적자보다 먼저 로드 위치부터 확인해두었겠지. 그러다 대적자한테 알려주고. 그런데 고이 가지고만 있다가 아이니 황후에게 주었다고?”
“그건……!”
“아. 그거 혹시…… 일회용?”
라틸이 소리를 죽여 풋 웃자, 단백의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여기십니까?”
“그럴 리가. 단지 그 물건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뿐이네.”
그게 그 말 아닌가. 단백은 이렇게 생각했지만 불만을 드러내진 못했다.
어쨌건 ‘대적자의 검’을 뽑은 세 명 다 성격이 죄다 다른 건 확실했다.
하나는 나태하고, 하나는 초조해하고, 하나는 오만하다.
라틸은 단백의 속마음을 아직 읽진 못했다. 그러나 단백이 자신의 대응을 불만스러워하는 건 알았다. 바로 말을 잇지 못하는 걸 보면 확실했다.
역시 그 물건은 없는 거야. 속으로 확신하며, 라틸은 너무 놀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뭐, 그런 게 있다면 잘된 일이겠지. 하지만 나보단 아이니 황후가 가지고 있는 게 나을 것 같네.”
“예?”
“아이니 황후는 대적자의 검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나침반을 줄 거면 검도 같이 줘야지. 뭐, 나침반만 주고 검은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 난 로드 위치만 알아내고 가서 죽으란 소린가?”
“!”
라틸이 반듯하게 웃으면서 내뱉는 소리에 단백은 등줄기가 간지러워졌다. 웃으면서 말을…… 그냥 막 내뱉는 황제구나.
웃고 있는데 말 안에 노골적인 가시가 두드러진다. 본인도 감추려는 생각이 없어 보이고.
단백이 주저하는 사이, 라틸은 계속 말을 이었다.
“대신관을 보내는 건 아까 말했다시피, 클라인 건 때문에라도 허락할 수 없네. 카리센의 황자인 클라인도 죽이려 든 자들이 내 후궁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지 알고? 난 카리센을 그만큼 믿을 수 없어. 적어도 하이신스 황제가 깨어날 때까지는 말일세.”
“!”
“그래도 정 필요하다면…… 중간지대를 정해서 만나던가.”
말이 좋아 중간지대이지, 하이신스 황제는 거동조차 못 하는 환자였다.
그런 하이신스 황제를 중간지대로 데리고 나오라고? 위험했다. 하이신스 황제 본인에게도 주위 다른 사람들에게도.
단백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타리움 폐하께선 카리센을 적대하시는군요.”
“신전에만 있어서 그런가. 너무 늦게 알았군. 타리움과 카리센 분위기가 험악한 건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네. 먼저 우릴 공격한 건 카리센이고.”
* * *
결국 단백은 아무 성과 없이 인사를 끝냈다. 대신 단백은 돌아가기 전, 대신관을 만나 인사를 올리고 싶단 청을 올렸다.
말이 좋아 인사이지, 아마 대신관에게도 하이신스를 도와 달라 부탁하려는 것일 터.
라틸은 그 속내를 알았지만, 대신관도 하이신스가 멀쩡하단 걸 이미 알고 있기에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그래. 걱정되겠지. 자네가 가서 청해보게.”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단백이 나가자 5분 정도를 기다렸다가, 라틸은 집무실로 돌아가 서넛에게도 따로 지시했다.
“서넛 경. 단백 방에 가서 짐을 뒤져봐요.”
“나침반 이야기 때문입니까?”
“가짜일 겁니다. 그래도 확실히 해서 나쁜 거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서넛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15분 정도 뒤. 서넛은 다시 돌아와 보고했다.
“나침반도, 특별히 수상해 보이는 물건도 없었습니다.”
“그래요.”
“신경 쓰이시면 다가 공작을 이용해 아이니 황후 쪽도 살펴보면 어떻습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나침반은 분명 없습니다. 가짜가 있다 해도 부수는 게 더 이상합니다. 나침반 이야기를 우리가 알자마자 나침반이 부서지면 우릴 범인으로 생각할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게다가 다가 공작은 우리 꼭두각시란 걸 아이니 황후가 알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다가 공작이 나침반을……?”
라틸은 말을 하다 멈추었다.
“폐하?”
갑자기 라틸이 말을 멈추고 묘한 표정을 짓자, 서넛이 무슨 일인가 싶어 불렀다.
라틸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고서 서넛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네. 단백은 다가 공작이 식시귀인 걸 모르겠지?”
“예?”
“단백이 우리한테 나침반 이야기를 하며 떠봤다는 건, 아이니가 우리에 대해 분명 안 좋게 말했단 겁니다. 로드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일단 나쁘게.”
“?”
“그대로 돌려줍시다.”
라틸의 입꼬리가 음침하게 올라가자, 서넛은 자기도 모르게 주춤했다.
“왜 그럽니까?”
“죄송합니다. 과연 로드, 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뭘요?”
“…….”
“내가 뭘요!”
“나쁜 뜻은 아니었습니다.”
서넛이 눈길을 피하자 라틸은 가자미눈을 뜨고서 그를 노려보았다.
“나쁜 뜻이 아니었다면 ‘죄송합니다’로 시작하지 않았을 텐데?”
“!”
* * *
라틸이 서넛과 티격태격하는 그 시각.
단백은 난생처음 보는 하렘의 화려한 풍경에 압도된 채 대신관을 만나러 걸어가고 있었다.
“둘 다 강대국이라지만 타리움과 카리센은 분위기가 전혀 다르네요.”
곁에서 함께 걸어가는 단원이 혀를 찼다.
그럴 만도 했다. 카리센이 웅장하면서도 위엄있는 느낌이라면, 타리움은 그야말로 모든 게 화려하고 거대했다.
건물뿐만이 아니라 분위기 역시 그랬다.
카리센은 연달아 궁전 내부에서 터진 사건으로 분위기가 무겁고 어둑어둑한 반면, 타리움은 세계를 은밀히 감도는 위협에서 비껴간 듯 홀로 평화로웠다.
궁인들은 근심 걱정 없이 돌아다녔고, 분수대의 물줄기는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그러나 단백은 ‘라트라실 황제 혹은 그 주위 사람이 로드일 수 있다’는 아이니 황후의 말을 먼저 들어서인가. 이 평화가 남들의 두려움 속에서 솟아난 것처럼 보여 아이러니하게 여겨졌다.
그런 마음은 호숫가에 서서 여우상의 아름다운 남자와 대화 중인 라나문을 보자 더해졌다.
만약 이 안에 로드가 살고 있다면, 대적자이면서도 이 안락함에 빠진 라나문은 신이 안배해 준 운명을 일신의 편안함을 위해 버려버린 자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좀 기분이 상해서, 단백은 굳이 그쪽에 아는 척 인사하지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후궁들이 하렘 정원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기에 혹시 대신관을 못 볼 수도 있다 여겼지만, 다행히 대신관은 방 안에 머물고 있어서 바로 만날 수 있었다.
대신관은 처음에는 ‘얘가 누구지?’ 하는 눈으로 단백을 보았으나, 사정을 설명하자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주위엔 늘 백화랑술이 있어서. 다른 성기사단도 있단 이야기는 들어왔습니다. 그중 하나로군요.”
반갑게 고개를 끄덕인 대신관은 단백의 소매 사이로 드러난 근육을 보고는 흐뭇해졌다. 잘 훈련하고 있구나.
대신관은 운동을 사랑하는 사람에겐 호감을 가지는 편인지라, 웃으면서 친절하게 물었다.
“그래, 내겐 무슨 일로 온 겁니까?”
백화는 대신관의 소파 뒤에 굳이 일어선 채 단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단백은 어쩐지 백화의 그 태도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침입자를 경계하는 살쾡이처럼 여겨져서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왜 저러지?
어쨌든 대화 상대인 대신관은 이야기를 들어볼 자세인지라, 단백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이신스 폐하를 치료하는 일 때문입니다. 하이신스 폐하 치료를 위해 대신관님을 카리센에 초빙하고 싶다고 라트라실 폐하께 말씀드렸는데, 바로 거절하셔서요. 대신관님은 타리움의 후궁이지만 동시에 모든 신전의 대신관이 아니십니까. 폐하게 말씀드려서 카리센에 잠시 와주신다면…….”
대신관은 웃으면서 이야기를 듣다가 정색했다.
“안 됩니다.”
대신관이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어서 안심하던 단백은 “네?” 하고 놀라 되물었다.
“안 된다고요? 혹시 라트라실 폐하 때문입니까?”
“제 후궁 동료가 카리센에 남았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폐하께서 안 된다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후궁 동료……. 단백은 대신관의 표현을 잠시 멍하게 되풀이하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돌려서 표현하고 있지만 어쨌든 라트라실 황제 때문에 안 된다는 거 아닌가.
‘어쩔 수 없나.’
단백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카리센에서 아이니 황후와 대화할 때. 그녀는 대신관도 라트라실 황제에 대한 의혹을 아느냐고 물었다.
아이니 황후는 ‘아마 모를 것’이라 대답했다. 대신관이 안다면 거기 있을 리가 없다고. 황후는 대신관을 카리센에 부른다면, 그때 은밀히 알려줄 거라 했다.
하지만 아예 대신관이 라트라실 황제 옆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면…… 그럴 기회도 없겠지.
어쩔 수 없었다. 이쪽에서 먼저 말해주는 수밖에.
“대신관님. 대신관님은 대적자이신 아이니 황후 폐하와 따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으신지요?”
대신관은 차를 마시면서 해맑게 웃었다.
“라나문 님과는 종종 대화를 나눕니다. 차갑지만 좋은 분이시지요.”
“라나문 님 말고 아이니 황후 폐하와는요?”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대신관의 맑은 표정을 본 단백은 재차 주저했다. 이 이야기를 자기 선에서 해도 될까? 역시 좀 지켜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니야. 보아하니 대신관도 라나문 대적자도 이곳 생활에 푹 빠진 거 같고, 라트라실 황제는 카리센을 적대하잖아. 이대로 뒀다간 대신관은 로드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할 거다. 만약 라트라실 황제가 로드가 아니고 주위에 로드가 있어서 이용당하는 거라도 마찬가지야. 대신관과 라나문이 로드가 누군지 찾아내서 라트라실 황제와 떨어뜨려야 해.’
단백의 표정이 점점 비장하게 바뀌어가자, 대신관은 백화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갑자기 다른 성기사단 단장이 찾아와 카리센으로 초빙하더니, 이제는 다른 대적자 이야기를 꺼내고, 그다음엔 저렇게 비장한 표정을 짓는 게 의아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결국 지켜보던 백화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단백은 두 손을 꼭 모아 쥐고서, 두려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대신관님. 카리센으로 와서 아이니 황후 폐하와 한번 이야기를 나누어 주십시오. 아이니 황후 폐하께선 전설 속 로드가 타리움 황제 근처에 있다 의심하고 계십니다. 어쩌면…… 황제 본인일 가능성도 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