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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화. 탐스러운 미끼 (332/367)


332화. 탐스러운 미끼
2023.05.03.


벽이 조금 부서져 있고, 기르골은 거기에 등을 대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의 주위로 늘어선 파편들이 하나하나 기르골의 떨어져 나간 이성처럼 보였다.

기르골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라틸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역시 눈이 돌아갔잖아!

아니, 돌아간 정도가 아니다. 라틸이 지금까지 본 기르골의 표정 중 세 손가락에 꼽히게 정신이 나가 보였다.


“기-.”

일단 사태를 진정시켜 보려 입을 여는 순간. 제대로 뭘 말려보기도 전에 옆에서 뭔가 ‘쾅’ 소리를 내며 튀었다.

라틸의 머리카락이 강풍을 맞은 듯 옆으로 찰랑였다. 머리카락의 주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도.


 
라틸은 확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옆에는 기르골이 있고, 서넛은 문짝째 사라져 있었다.


“서넛!”

라틸이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던 서넛이 주먹을 쥐고 나타났다.

벽과 벽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기르골이 서넛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기르골의 몸이 약간 뒤로 밀리는가 싶었으나 표정은 서넛 쪽이 좋지 않았다.

기르골은 웃고 있었고 서넛은 온 힘을 다하는 얼굴이었다.


“그만해!”

라틸은 둘을 떨어뜨리려 했으나 손이 닿기도 전에 이미 둘은 다른 곳에서 싸우고 있었다.


“이봐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둘만의 세계에 빠져 서로를 죽이려 들었다.

단순히 티격태격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이 서로의 목숨줄을 노리는 게 보였다.

아니, 목숨줄을 노리는 게 아니라도 이 속도라면 실수로라도 상대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젠장! 이 미친 자식들!”

서넛 쟤는 미치지도 않았으면서 왜 미친놈이랑 같이 저러고 있어!

화도 나지만 어떻게든 사태를 진정 시켜야 한단 마음이 강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라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르골이 비웃은 활이라도 근처에 있다면 좋을 텐데. 활은 없었다.

대신 눈에 들어오는 건…….


‘저거다.’

기르골이 서랍장 위에 늘어놓던 피를 담은 병들.

라틸은 그쪽으로 다가가 병을 끌어안고 하나씩 기르골과 서넛을 향해 던져댔다.


‘뱀파이어니까 맞아도 괜찮을 거야.’

라틸은 이런 생각으로 병에 힘을 실어서 그들을 향해 빠르게 던져댔다.

있는 병이란 병은 죄다 던져댔을 거다. 거의 반 정도의 병을 다 던진 라틸은 서넛과 기르골이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단 걸 깨닫고 자신도 멈춰 섰다.

씩씩거리며 보니, 두 뱀파이어는 동작을 멈추고서 라틸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피를 담은 병이 그들에게 맞아 깨지면서 바닥은 피와 유리 조각으로 엉망이었다.

그들의 얼굴과 머리카락, 옷 역시도 피로 축축했다.

하지만 튼튼한 뱀파이어들 답게 유리 조각에 다치진 않은 듯했다.

라틸은 후, 한숨을 뱉고서 멍해진 뱀파이어들에게 지시했다.


“그만 싸워라. 뭣들 하는 거지?”

효과가 있었을까. 둘이 조금 떨어져 섰다.

라틸은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멀리서 보았던 것처럼 유리 조각에 다친 이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놀라운 마음이 가시자 다시 분노가 솟는지, 조용하던 서넛은 또 주먹을 쥐고 기르골을 노려보았다.

라틸이 쳐다보자 주먹을 휘두르진 않았지만, 서넛은 기어코 기르골에게 한마디를 했다.


“난 당신이 자연과 초록을 사랑하는 평화주의자라 생각했다.”

“이 머리 꽃밭은 뭐야.”

기르골이 웃자, 서넛이 그에게 다시 달려들 태세를 취해서 라틸은 둘 사이에 팔을 넣고 휘저었다.


“그만 싸우라고.”

“난 꼼짝도 안 했어, 아가씨. 아가씨 호위가 다짜고짜 달려든 거지.”

무슨 소리야. 꼼짝도 안 했다면 서넛 머리가 저렇게 산발이 될 리가 없잖아.

라틸은 기가 막혀 비교적 단정하고 말끔한 기르골의 머리 모양을 쳐다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건 똑같았지만 기르골은 서넛에게 결정적인 타격은 처음을 제외하곤 맞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라틸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기르골에게 서넛이 자신의 나이트라는 걸 말해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기르골이 서넛을 좀 봐주려나?


‘……아니야. 그러지 말자.’

그러나 고민 끝에 라틸은 기르골에게 서넛이 나이트란 걸 당장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기르골이 서넛의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떻게 노릴지 모른다. 그가 도우려 할지 노리려 할지 결국 기르골 본인만 알 테니까.


‘아직 기르골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

기르골을 품에 넣어야 하는 건 맞지만, 그 후에도 방심할 수는 없다.

이 뱀파이어가 누구 편인지 아직 모르는 일 아닌가.

그때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가까워지며 “폐하? 음료수를 가져왔습니다.”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페라가 심부름을 다 한 모양이었다.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라틸은 피투성이 바닥을 확인하고서 ‘오지 마’라고 명령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꿔서 가만히 있었다.

아페라에겐 뜻밖의 일이었다.

하도 온실 근처에 못 오게 했던 터라, 이번에도 직접 음료수를 가져오지 못하게 할 거라 여겼던 아페라는 의외로 침실 가까이 다가가도 말리는 사람이 없자 속으로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잠시 음료수를 바닥에 내려놓고 얼른 옷매무새와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그녀가 기르골을 볼 수 있는 건 아주 짧은 순간이겠지만, 원래 사랑은 그 짧은 순간에도 다가온다.

스쳐 지나가도 사랑에 빠질 사람은 빠지지 않는가.

아페라는 만족스레 웃고서 다시 음료수를 들고 침실 안으로 걸어갔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안쪽에 있는 게 황제와 후궁이기에, 그냥 온실을 침실로 만들어서 후덥지근한 공기 탓이라고만 여겼다.

그리고 침실 안에 들어선 순간. 피투성이가 되어 선 두 남자를 보는 순간. 바닥에 요란하게 깨진 유리 조각과 범벅인 피칠을 보는 순간.

아페라는 그대로 쿵 뒤로 넘어져 기절했다.


“보통 사람인가.”

그 모습을 보며 라틸은 중얼거렸다.

어떤 반응인가 보려고 일부러 막지 않았는데. 보자마자 바로 기절해버리는 걸 보니 피를 많이 보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서넛은 그제야 분노를 삭이고 라틸이 한 명령을 기억해내 대답했다.


“뛰는 모습을 보았는데, 몸은 날렵했습니다. 하지만 암살자나 검사 계통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춤추던 사람 같았습니다.”

“무슨 소리야, 제자님?”

그 대화를 듣던 기르골이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조금씩 핥아먹다가 물었다.


“윌랑 왕자가 보내준 그대 하인들. 여기 아페라. 혹은 아페라 포함해서 셋 다. 꿍꿍이를 가지고 온 거 같아서.”

“그래?”

“몰랐어?”

“신경을 안 써서. 난 내 주위에 먹이 외엔 인간을 안 두거든, 제자님.”

먹이 소리에 서넛이 다시 흥분하려 들어서, 라틸은 그의 팔을 잡고 슬쩍 당겼다.

하지 마. 네가 지잖아. 왜 지는 싸움을 걸고 그래?

기르골의 눈동자가 라틸과 서넛이 맞닿은 부분으로 향하더니 묘하게 가늘어졌다.

라틸은 서넛에게서 천천히 팔을 떼며 충고했다.


“여하튼. 그런 하인들이니까 경계하면서 이용하거나 왕자에게 돌려보내거나 해.”

 

* * *



“폐하? 괜찮으세요……?”

“어? 어어. 괜찮아. 왜?”

“폐하한테서 피 냄새가 강하게 납니다…….”

게스타와 저녁을 먹기 위해 찾아온 라틸은 자신의 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래?”

능력이 조금씩 깨어나면서 라틸 역시 피 냄새를 예민하게 맡게 되었다.

하지만 아까 피범벅이 된 곳에 있어서일까. 아니면 계속해서 냄새를 맡아서인가. 지금 라틸은 피 냄새를 자신에게서 맡기 힘들었다.

게스타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제가 표현을 잘못했어요……. 피 냄새가 많이 나진 않아요, 폐하. 온몸에서 피 냄새가 풍긴단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아. 그래?”

“예…….”

“너도 피 냄새를 잘 맡는구나?”

“뱀파이어들을 많이 상대하다 보니까요…….”

게스타가 쑥스럽단 듯이 중얼거렸다.

라틸은 팔을 손에서 내리고서 웃었다.


“괜찮아. 내 피 냄새는 아니니까.”

“?”

게스타는 라틸의 말에 더욱 의아한 표정이 되었지만, 라틸이 더 설명하지 않자 굳이 계속 묻는 대신 슬그머니 말을 본론으로 가져갔다.


“저…… 폐하. 그렇지 않아도 다가 공작 일로 폐하께 여쭐 게 있었어요…….”

“아, 다가 공작. 그래. 다가 공작 일은 어떻게 돼가?”

라틸의 질문에 게스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실은 폐하. 아이니 황후가 다가 공작을 별장으로 보내려 하고 있어요…….”

“뭐? 꼭두각시란 걸 알아버려서?”

“네. 이쪽 영향을 끊어버리려는 거 같아요…….”

게스타는 걱정스럽게 라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 * *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 기르골과 서넛의 2차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인지 기르골은 여전히 아페라는 물론 다른 하인들 모두 측근으로 부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겨졌지만, 따로 생각이 있으리라 여겨서 라틸은 그 부분에 관여하진 않았다.

라나문 역시 폭풍 속의 고요함에 잠긴 듯, 당분간은 가을 축제 준비에만 몰두해서 오래간만에 평화롭게 느껴지는 일상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카리센에서 노란 성기사 제복 차림의 사신이 찾아왔다.

처음 라틸은 그 노란 제복 차림 여자가 성기사단장이란 걸 알아보지 못했다.


“안녕하십니까, 황제 폐하. 성기사단 단백술의 기사단장 단백입니다.”

단백 이름을 듣고서야, 라틸은 라나문이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런 사람이 있었지. 다른 이야기에 바빠 소홀했다.

하지만…….


‘왜 굳이 카리센 사절단과 함께 왔지?’

라틸이 의아해 바라보자, 단백은 바로 알아들은 듯 얼른 허리를 숙이며 부연 설명을 했다.


“전에 라나문 님을 찾아뵈었지만, 라나문 님은 바쁘셔서 대적자로서의 업무를 바로 처리하기 곤란해 보이셨습니다. 이후 카리센의 황후 폐하께서 제게 손을 내밀어 주셨지요. 그분도 대적자시니까요.”

“그런가.”

라틸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대적자 활동을 하려는 듯한 사람인 데다 사이 나쁜 카리센 쪽에 붙어서인가. 어쩐지 상대가 좀 탐탁지 않게 여겨졌다.

라틸의 표정을 본 단백은 재차 인사하고서 공손하게 말을 꺼냈다.


“실은 황제 폐하. 카리센의 황후 폐하께서는 하이신스 폐하가 빨리 일어나시길 바라며 늘 마음이 안 좋으십니다. 황후 폐하께옵서는, 이전의 실례를 사과할 테니, 꼭 대신관님을 보내주셔서 하이신스 폐하를 치료해주길 바라십니다.”

뭐야. 그 이야기를 하려 성기사단장을 사절로 보냈나? 라틸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전엔 내가 먼저 보내려 하였지. 하지만 다가 공작은 거절하고 클라인 황자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네, 단백. 내 후궁은 죽을뻔했어. 그 일로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해. 트라우마가 강해서. 그런데 대신관을 보내라?”

“이번에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폐하. 제 이름을 걸고 대신관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라틸은 재차 거절하려 했다. 하이신스는 이미 치료가 끝났다. 적들을 안심시켜주기 위해 굳이 위험한 곳에 대신관을 또 보낼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라틸이 무어라 말하기 전. 상황을 살피던 단백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황제 폐하. 저는 로드를 찾아내는 나침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

“아이니 황후 폐하께 의탁하면서 그걸 황후 폐하께 바쳤지만요. 황후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타리움 폐하께서 대신관님을 보내 하이신스 폐하를 치료해 주신다면, 그 나침반을 라트라실 폐하께 드려도 괜찮다고요.”

라틸은 반사적으로 서넛을 돌아볼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로드를 찾는 나침반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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