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통제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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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화. 통제불능
2023.04.19.
라틸은 그를 멍하게 바라보다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타시르야 그렇다 쳐도 라나문이 갑자기 정곡을 콕 찔러오자 심장이 요란스레 뛰었다.
넌 이렇게 똑똑하면 안 되잖아. 너 나태한 미남 아니었어?
라나문의 진지한 시선을, 이 와중에도 살짝 귀찮아 보이긴 하는 그 시선을 마주한 라틸은 표정을 재빨리 관리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경계하자.
라나문은 멜론을 포크로 집어 라틸에게 내밀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대적자다운 행동을 하신 건 딱 두 번입니다.”
‘내가? 두 번이나?’
“그게 언제인데?”
“대적자의 검을 뽑았을 때가 한 번.”
“또?”
”대적자답게 카리센을 비난했을 때 한 번.“
”…….“
”카리센을 비난한 것도 사실 행동이라 하긴 좀 부족하죠. 말만 하셨으니까요.“
라나문은 자기도 멜론을 한 조각 먹고는 라틸의 표정을 관찰하다가 결론까지 마무리했다.
”폐하께서는 스스로도 대적자 역할을 원하시지 않는 눈치입니다. 원하신다면 검을 뽑으셨을 때, 대적자의 검을 누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를 두고 말이라도 꺼내셨겠지요.“
아주 솔직하고 제대로 된 정곡이었다.
만약 라틸이 진짜 대적자였다면, 이쪽은 대적자가 둘이니 검은 여기서 가져가야 한다고 도발이라도 했을 것이다.
”귀찮아서 그래.“
라틸은 미소 지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내가 왜 대적자를 대적하겠어? 단지 귀찮은 일을 도맡아 줄 아이니 황후가 있는데 우리가 나설 필요 없단 거지.“
“그런 것치곤 아이니 황후와 대립하고 계시는데요.”
“!”
“대놓고 아이니 황후 쪽을 어두운 세력이라 하셨지요. 힘을 합치고 싶어 보이진 않습니다.”
생각에 깊게 잠겨서인지 라나문의 눈썹 끝이 꿈틀거렸다.
“그렇다고 제게 대적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하시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전부 다 네 생각일 뿐이잖아, 라나문.”
“폐하께서 대적자로 활동하실 생각이라면 후궁을 들일 게 아니라 국서를 정하셨겠지요.”
“…….”
“하지만 폐하께선 오히려 대적자의 스승을 후궁으로 맞이하셨지요. 스승을 제게 붙여 절 훈련시키지 않고서요. 폐하께선…….”
라나문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지며 속삭이는 것처럼 마무리 지어졌다.
“혼란을 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라틸은 일부러 하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고 나니 너무 악역 같은 웃음이라 조금 후회되었지만.
‘조금 작게 웃을걸.’
어쨌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긴 한 모양이었다. 라나문이 미간을 찡그린 걸 보면.
라틸은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라나문의 눈가를 쓸었다.
“라나문, 머리를 잘 굴리는구나. 똑똑하네.”
“!”
“재미있었어.”
라틸은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서 웃었다.
“나도 한번 생각해볼게. 내가 원하는 게 혼란인지 평화인지.”
* * *
하지만 밖으로 나온 라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타시르가 짐작한 거야 원래 그런 사람이니 그렇다 쳐도. 라나문까지 이상한 걸 느끼고 있었다니.’
라틸은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이건 자신이 너무 노골적으로 대적자를 적대해서일까, 아니면 라나문이 ‘같은’ 대적자라 자신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자 후자 둘 다일지도.
초조해진 라틸은 이대로 방 안에 돌아가고 싶은 충동에 잠시 우두커니 서서 멀리 있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기르골을 만나러 하렘을 나가 온실로 걸어갔다.
일을 미루고 미루어보았자 결국 더 혼잡해지고 만다. 기르골이 무슨 말을 할지 두렵지만 피할 수 없었다.
* * *
“예비 대적자님을 왜 가르치고 있었냐고?”
기르골은 어디서 난 건지 모를 새로운 꽃을 심고 있다가, 라틸이 다가와 왜 라나문을 훈련시키고 있는지 묻자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예비 대적자님이니까?”
그 태도는 ‘배가 고파서 밥을 먹었고 배가 부르면 밥을 안 먹는다’ 와 전혀 다른 바 없었다.
이쪽은 놀라서 칼라인, 서넛, 게스타와 함께 긴급 의논까지 했는데.
“난 네가 이제 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라틸은 억지로 목소리를 평탄하게 내려 했지만, 자신이 듣기에도 좀 기분이 상한 티가 났다.
기르골은 꽃 모종을 대충 내려놓더니 라틸의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일부러 자신의 시선이 더 낮아지게 해서 위를 올려다보듯 라틸과 눈을 마주치는 모습에, 라틸은 반사적으로 그의 머리를 박아버릴 뻔한 걸 참았다.
“뭐야. 이거 무슨 행동인데.”
“왜 내가 제자님 편이 아니라 생각해?”
“진짜 대적자를 가르쳤잖아.”
“아가씨는, 그럼 내가 거절하길 바랐어?”
“당연하지.”
기르골의 눈꼬리가 가늘게 휘어졌다.
“거기서 거절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
“…….”
라틸은 일순간 멍해졌다.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하긴. 몇천 년, 어쩌면 만 년 이상 대적자를 가르쳐 온 스승이 갑자기 그걸 거절한다면 그것도 이상하다.
그렇다고 타리움에 후궁으로 머물면서 카리센에 있는 아이니를 가르친단 것도 말이 안 되고.
라틸을 가르치고 있단 핑계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라틸이 누군가에게 훈련을 받는다면 모두가 그 사실을 알게 될 테니.
“……그건 그래.”
라틸이 마지못해 인정하자 기르골이 웃음을 터트렸다.
라틸은 칼라인과 서넛의 분위기에 휩쓸려 이 생각을 해보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하지만 무슨 의도이든 기르골이 라나문을 가르치는 이상 분명 위험하긴 했다.
칼라인과 서넛이 긴장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수십 번 수백 번 라틸은 대적자에게 패배해 왔다니까.
‘쉽지 않구나.’
이것도 적과의 동침에 해당하나. 라틸이 넋을 놓고 서 있자니, 기르골이 손에 묻은 흙을 털고서 라틸의 손을 잡고 살짝 당겼다.
“그런 머리 아픈 건 관둬, 아가씨. 나랑 놀아. 여기까지 왔잖아?”
얼결에 그를 따라갈 뻔하다가 라틸은 발에 힘을 주어 멈춰 섰다.
기르골은 라틸이 따라오지 않자 걸어가던 걸 멈추고 라틸을 돌아보았다.
“왜?”
“일하다 왔어. 일하러 가야 한다.”
라틸은 그렇게 말하고서 기르골의 손을 놓았다.
기르골은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지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단 얼굴로 또 물었다.
“왜?”
“왜냐니?”
“일이 뭐가 중요해, 제자님.”
“뭐가 중요하냐니. 나는 황제잖아.”
“일은 머리 좋은 사람들한테 시켜 아가씨. 제자님은 나랑 놀고.”
태연자약하게 방종한 황제가 되기를 권하는 기르골은 어디 망국의 역사서 비화에 황제를 타락시킨 원인 중 하나로 나올 법했다.
라틸은 ‘일하지 마’라는 기르골의 말에 확신을 얻었다. 얘는…… 절대로 국서 시키면 안 되겠구나.
“안 돼. 내가 나서서 일하진 않아도 진행 상황은 계속 확인하고 살펴야 해. 내 책임이잖아. 그대도 후궁이라면 이런 건 이해해야 해.”
라틸은 단호하게 거절하고서 돌아서서 온실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막상 냉랭하게 나가고 나니 기르골의 멘탈이 조금 걱정되었다. 그자의 정신은 워낙 희한한 일에도 빠져버리지 않는가.
“…….”
결국 고민하다가 라틸은 딱 한 번만 확인해보자 싶어서 슬며시 도로 온실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
같이 놀자던 기르골은 이미 없었다.
‘어디 간 거야?!’
* * *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라틸은 집무실로 걸어가며 욱신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기르골을 통제하기 위해 후궁으로 들였는데. 후궁이 된 기르골은 그 나름대로 또 통제가 안 됐다. 이번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밑에 시종이라도 있으면 ‘기르골 어디 갔냐’고 따지기라도 할 텐데. 햇빛을 못 본다는 기르골의 후궁은 낮에는 어디에 숨는 건지 아예 나타나질 않았다.
‘젠장. 더 신경 쓰이잖아. 후궁 규칙을 따를 마음에 아예 없어 보여.’
덜컥 걱정스러워졌다.
기르골이 저렇게 아름다운 외모와 내킬 때면 급격히 붙임성이 좋아지는 성격을 가지고서도 내내 로드와 이루어지지 못한 건…… 이유가 있지 않을까?
기르골은 어쩌면 길들일 수 없는 야생마일지도 몰랐다.
* * *
라트라실 황제가 온실에서 나가는 걸 본 므라딤은 뒤에서 그를 따라오던 티투에게 어리둥절해 물었다.
“이상하지 않으냐?”
“무엇이 말입니까?”
“기르골 저자는 온실도 받고 황제도 저렇게 자주 오가는데. 왜 나는 개인 방도 없고 폐하도 안 오시지?”
티투는 자기가 더 의아한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지배자님은 후궁이 아니니까요?”
므라딤은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 커다랗게 떴다.
“내가 후궁이 아니었다고?”
“예?”
“이미 후궁인 줄 알았는데?”
“아니, 왜요?”
므라딤의 표정을 보며 티투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명도 어마어마하게 길고 아름답고, 물과 뭍 모두를 오갈 수 있는 데다 벽에 숨는 방법도 알며 인간들이 모르는 주파로 대화까지 나누는 둥 수많은 장점을 가진 피인어들이지만, 결정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건망증이 아주 심하다는 것이었다.
이를 보강하기 위해서인지 ‘되새김질’이란 작업을 거치면 오히려 돌에 새긴 것처럼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잊지 않게 기억할 수 있지만, 솔직히 매번 그 작업을 하는 건 번거로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피인어들은 중요한 정보가 아니다 싶으면 그렇게까지 기억하려 들지 않았다.
티투처럼 거의 모든 정보를 쌓아두려 하는 쪽이 오히려 소수였다.
“아직 아니세요, 지배자님.”
“그럼…… 밤에 서약식을 한 이 기억은 뭐지? 아주 예쁜 밤이었는데. 사람들 수도 적었고.”
“남의 기억이요.”
“?”
티투는 한숨을 내쉬었다.
* * *
기르골이 황제의 후궁이 된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 며칠이 윌랑 왕자에게는 하루하루 자존심을 깎아 먹는 나날이었다.
황제가 얼마나 평민 후궁에게 빠졌는지, 그 평민 후궁이 얼마나 황제를 교묘하게 자기에게 이끄는지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윌랑 왕자는 짜증이 나서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꾸준히 흘러갔고, 마침내 윌랑에서 아페라의 답변이 왔다.
“아페라 양이 재미있겠다고, 왕자님의 의뢰를 받아들이겠다 하십니다.”
왕자의 입꼬리가 만족스레 올라갔다. 아페라가 온다면 기르골 그자는 그녀에게 빠질 수밖에 없다.
“이젠 그자가 황제에게 내쳐질 일만 남았구나.”
* * *
한편, 그 시각.
아이니는 며칠 전 아버지가 한 말에 아직도 시달리고 있었다.
사실 그 말은 다가 공작을 조종하는 게스타가 한 말이었으나, 이를 모르는 아이니는 아버지의 악담이 큰 상처로 남아 꿈에조차 나올 지경이었다.
그녀는 가족을 위해 지금껏 자신의 의견을 묵살하고 살아왔다.
그녀의 인생을 좌지우지한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말했다는 게 몹시 충격적이었다.
이 와중에 미셜 후작이 자진한 일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까지 오가자, 아이니에겐 요 며칠이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 아이니는 마음을 굳게 다잡기로 했다. 아버지가 악담을 퍼붓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쨌든 지금 적들의 꼭두각시였다. 아버지가 꼭두각시고, 아버지의 주장처럼 자신도 아버지의 꼭두각시라면 결국 자신조차 적들의 꼭두각시가 될 터.
아버지를 묶은 조종줄을 끊지 못한다면 아버지가 자신을 묶은 줄을 풀어야 했다.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서 권력을 찾아와야 한다. 아니면 적들이 아버지 입을 빌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결국 아이니는 결심을 하고서 그날 회의 때 참여하려는 아버지를 병사들을 시켜 막아섰다.
“이게 무슨 짓이냐.”
회의실 안쪽까지 다가 공작의 말이 들려왔으나, 아이니는 일부러 그쪽에 나가지 않고 말을 전하게 했다.
“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으니 회의에 참여하는 건 좋지 않은 생각 같다. 아버지에게 요양을 위해 당분간 별장에서 지내시길 바란다 전해라.”
* * *
다가 공작은 회의실에 들어가려 하고 병사들은 이를 막아서면서 일련의 소란이 벌어졌다.
병사들이 다가 공작을 집으로 억지로 보내려 하면서 소란은 더욱 커졌다.
아낙차는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별원 밖으로 나왔다가 이 소란을 목격했다.
그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틀라를 불러 말했다.
“아이니 황후가 제 발로 서려는 모양이다. 그냥 두면 안 되겠어.”
목만 남은 헤움 황자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를 갈며 외쳤다.
“너희가 원하는 건 라트라실 황제일 텐데. 왜 아이니를 괴롭히는 거냐! 비겁한 작자들!”
아낙차는 틀라와 마주 앉아 이제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지 의논하려다가, 헤움의 목소리에 웃음을 터트렸다.
헤움은 아낙차가 갑자기 웃긴 소리를 들은 것처럼 웃어대자 얼결에 입을 다물었다.
한참 만에 웃음을 멈춘 아낙차는 미소를 띤 채 헤움에게 물었다.
“왜 우리 목표가 라트라실 황제라 생각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