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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화. 그냥 가만히 있어줘 (327/367)


327화. 그냥 가만히 있어줘
2023.04.16.


다가 공작은 미셜 후작을 보러 들어가겠다 우기고, 황후의 호위들은 그걸 막고 있고, 신전 사람들은 이게 무언가 싶어 허둥대고 있다.

보기 드문 광경에 신전을 찾은 구경꾼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이 광경을 구경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니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때. 안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아이니는 아버지를 막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곧 안쪽에서 앳된 신관이 달려오더니 창백한 얼굴로 고위 신관에게 외쳤다.


“신, 신관님, 신관님. 미셜 후작이 자진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미셜 후작이 자진하다니!”

“모르겠습니다. ‘쿵’ 하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 미셜 후작이 떨어져 있고…….”

고위 신관이 앳된 신관을 따라 뛰어가자 아이니도 그쪽으로 달려갔다.

자연스럽게 다가 공작 역시 뒤를 따라 들어왔으나, 이 와중에 공작을 막고 있다간 아이니 자신이 더 이상한 사람이 될 분위기라 어쩔 수 없었다.

앳된 신관의 말처럼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미셜 후작이 바닥에 떨어져 죽어 있었다.

아이니는 고개를 위로 들었다. 높은 계단 난간이 보였다.


“누가 떠민 건 아니냐?”

아이니는 날카롭게 물었다. 미셜 후작이 여기까지 와서 갑자기 자진을 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앳된 신관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미셜 후작님을 신전에서 누가 떠밀 일이…….”

“미셜 후작이 자진할 일도 없다.”

미셜 후작은 흔쾌히 신전에서 검사를 받으리라, 자신이 나서서 말했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실제로 두려울 것도 없었다. 그는 어둠과 아무 관련이 없는 자이니까.

앳된 신관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후작님을 의심한 게 아니라…….”

그때. 고위 신관이 미셜 후작 쪽으로 다가갔다.

아이니는 그쪽을 보았다. 고위 신관이 미셜 후작이 손에 움켜쥔 종이를 꺼내고 있었다.

종이를 펼친 고위 신관의 표정이 굳었다.


“왜 그러는가.”

아이니가 다가가자 고위 신관은 들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아이니는 편지를 펼치자마자 흠칫했다.

-신전 검증이 두렵다.

아이니는 편지를 구겼다.


“가짜다.”

“황후 폐하.”

“가짜 유서다.”

아이니는 뒤를 돌아보았다. 다가 공작은 이 모든 일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이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 * *

궁전에 돌아온 아이니는 별원으로 가 아낙차를 불러 지시했다.


“아버지가 허튼짓을 못 하게 막을 방법은 없느냐. 아버지가 어디로 튈지 모르니 감당하기 어렵다. 오늘도…….”

다가 공작이 미셜 후작을 죽인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다가 공작에게 정신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그 누가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미셜 후작을 죽일 수 있었을까.

그러나 범인은 사람들이 다가 공작에게 정신이 쏠린 틈을 타 미셜 후작을 죽이고 가짜 유서까지 쥐어놓았다.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라트라실 황제 쪽 지시일 확률도 높았다.

다가 공작으로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부터 그사이에 미셜 후작을 죽이는 것까지. 너무 교묘하지 않은가?

아낙차는 아이니의 분에 찬 표정을 빤히 보다가 웃으면서 달래듯 말했다.


“절 탓하셔도 어렵습니다, 황후 폐하. 꼭두각시가 되셨다 한들, 그분은 그래도 황후 폐하의 친부이시고 공작님이니까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분을 강제로 험하게 대하나요.”

아이니는 별원 벽에 기대어 서서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낙차는 창문 뒤에 선 틀라에게, 혹시라도 아이니 황후가 안으로 들어갈지도 모르니 헤움 황자의 목을 더 잘 치우라 눈짓했다.

그러다 아낙차는 아이니가 자신을 보는 걸 알아차리고 상냥한 미소를 띠었다.


“왜 그러시나요, 황후 폐하?”

“아낙차.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꼭두각시란 걸 알리면. 그러면 어떻게 되지?”

 

* * *

아낙차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니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다가 공작을 찾아가 실제로 알리는 것이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미셜 후작 일이라면…… 나도 미셜이 자진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단다. 그는 마음이 약하고 고지식하지. 함부로 그런 힘을 쓰지도 않고. 그런 힘을 썼다면 스스로 신전에 가겠다 하지도 않았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 일 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

“아버지. 혹시 가끔씩 평소와 전혀 다른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평소와 다른 생각이라니?”

“아버지가 할 법한 일이 아닌 다른 생각이요.”

“글쎄?”

“전에 상단 사람들 틈에 섞여 찾아와 아버지를 만난 그 흑마법사요.”

“찾았느냐?”

“그자가 아버지를 자기 명령을 듣는 꼭두각시로 만들었어요.”

다가 공작은 아이니를 내내 반갑게 맞이하다가, 아이니의 말을 듣자 대번에 표정이 굳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낙차가 그랬어요. 아버지 행동이 평소와-.”

아이니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 다가 공작의 분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날 멋대로 이 꼴로 만든 건 너와 그 여자였다!”

“!”

“내 의견 따윈 묻지도 않았지. 그래놓고 이젠 날 꼭두각시 취급을 해? 왜, 내가 너와 그 여자의 꼭두각시가 돼야 했는데 그러지 않으니 다른 사람 꼭두각시 같으냐?!”

“아버지!”

아이니는 놀라 외쳤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다가 공작은 이미 화가 난 얼굴이었다. 자존심을 제대로 꼬집힌 듯 그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아이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틀렸다.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

참담했다. 다가 공작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내부의 적만큼 위험한 건 없었다. 적들의 꼭두각시가 된 아버지라니.

그때, 다가 공작이 차갑게 빈정거렸다.


“날 꼭두각시 취급하기 전에 너야말로 자신을 제대로 보지 그러느냐.”

“전 늘 저를 제대로 보고 있어요. 지나칠 정도로.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덤덤하게 대답한 아이니는 몸을 일으켰다. 세뇌에 걸린 사람에겐 세뇌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나 보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보아야 했다.


“넌 대적자지만 셋 중 가장 미흡해.”

문을 열고 나가려던 아이니는 뒤에서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에 문고리를 잡은 채 멈추어섰다.

아이니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가 공작이 다리를 꼬고 앉아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황후가 될 수 없는 널 여기까지 데려와 준 것도. 대적자가 되기엔 미흡한 널 포장해준 것도 모두 나다. 내가 꼭두각시라고? 아이니. 너야말로 누구의 꼭두각시인 거냐.”

“!”

  

* * *



맞은편에서 커피를 마시던 칼라인은 게스타가 인형을 들고 하는 말을 들으며 혀를 찼다.

혓바닥에 칼날을 착용해도 저렇게 말하진 않을 텐데. 저렇게 남이 고통스러울 말만 골라서 하는 것도 재주가 아닐까.

그 시선을 눈치챈 걸까. 다가 공작 인형을 가지고 놀던 게스타가 인형을 든 채 물었다.


“왜 그러세요……?”

칼라인은 커피잔을 내려놓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러냐고?


“아이니는 확실한 대적자일 텐데.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지?”

게스타는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폐하께선 자신이 로드인지 대적자인지를 두고 계속 고민했잖아요. 뭔지 모르니까. 카리센 대적자도 그러면 재밌을 거 같아서요…….”

게스타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넌 진짜 못됐다. 아나?”

“아니요.”

 

* * *

그 시각. 타시르 역시 못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의 흑림 부하에게 묻고 있었다.


“미셜 후작은? 죽였대?”

“아직 관련해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부하는 대답하고서 잠시 의아한 눈으로 타시르를 살폈다.


“묻고 싶은 거 있으면 물어.”

시선을 받은 타시르가 덤덤히 대답하자, 부하는 옳다 싶어서 얼른 물었다.


“수장은 미셜 후작이 신전에 올 테니 죽이라 했잖아요. 왜 그자가 신전에 올 거라 생각한 겁니까?”

“그자는 검증에 자신 있을 테니까.”

“?”

“신전 부지를 암살자들이 다 샀단 것도 모를 테고.”

  

* * *

찾아간다. 만다. 찾아간다. 만다.

라틸은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 기르골이 라나문을 훈련시키고 있단 곳으로 직접 가보았다.

칼라인은 기르골이 또 세 치 혀를 놀려 라틸을 혼란스럽게 할 거라 했지만, 뭐든 일단 눈으로 봐야 했다. 남에게 전해 듣는 건 부족하니까.

게다가 칼라인은 500년 전부터 기르골을 싫어해 왔다. 그는 기르골에 한해서라면 더 나쁘게 말하니 객관성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연무장에 도착한 라틸은 보고 말았다.


“뭐 하는 거야, 도련님. 팔이 떨리잖아.”

“아니, 아니지. 팔이 떨린다고.”

“그렇게 팔 힘이 약해서야 원. 왜 이렇게 부실해?”

기르골이 훈련을 빙자해 라나문을 괴롭히는 모습을.

라나문에게 팔굽혀펴기를 시켜 놓고서 자꾸 팔을 툭툭 쳐대면서 팔이 흔들린다고 지목하고 있다.

‘사디’를 대적자로 알았을 때 가르친 훈련과는 좀 거리가 있는 훈련.


‘훈련은 맞아?’

그 모습을 얼마나 멍하게 보고 있었을까.

힐긋 시선을 돌린 기르골이 라틸을 발견하고는 웃으면서 손키스를 날렸다.

라나문도 덩달아 시선을 돌렸다가 라틸은 발견하자 입을 꾹 다물고 일어섰다.

라틸은 헛기침을 하고서 그들에게 다가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뭘 하고 있어?”

“여기 도련님이 대적자로서 훈련을 받고 싶다 해서 가르쳐주고 있었지.”

라틸이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자 기르골이 손을 뻗더니 자연스럽게 라틸의 눈언저리를 문질렀다.


“왜 그래 제자님. 사제는 필요 없어?”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말투.


‘나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려왔는데.’

라틸은 성질이 나서 괜히 그의 손을 툭 쳐서 내렸다.


“…….”

기르골이 허공에서 자신의 손을 보았지만, 라틸은 모른 척 라나문을 보았다.

라나문은 라틸에게 훈련 중인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운 듯 귀가 붉어져 있었다. 그 상태로도 표정만큼은 얼음이지만.

라틸은 수천 살 묵은 뱀파이어 옆에서도 조금도 밀리지 않는 라나문의 그 화려한 아름다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그가 대적자로서의 사명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려 했는데.

오히려 대적자 일에 관심이 없어 보이던 라나문은 그럴수록 대적자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

무슨 수를 써도 틀어지던 도미스와 안야, 자신과 아이니의 일이 떠오르자 라틸은 걱정스러워졌다. 혹시 그 연장선인가?

라틸은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 라나문에게 지시했다.


“라나문. 나랑 얘기 좀 하자.”

“제자님, 나는?”

“다음 차례. 대기해.”

 

* * *

라틸은 라나문을 데리고 그의 방으로 갔다.

카르둔은 라나문이 뜬금없이 기르골과 훈련을 하자 뭐가 뭔지 몰라 멍하게 보다가, 황제가 나타나자 얼른 다과를 챙기기 위해 조리실로 달려갔다.

그 사이. 라틸은 라나문과 커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라틸은 망설였다. 일단 데려오긴 했는데. 대체 라나문에게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네가 대적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하면 괜찮을까?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까?

무언가 대놓고 말을 하긴 해야 했다. 간접적으로 그를 유도하려 하면 할수록, 그는 라틸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에 너무 깊게 잠긴 걸까. 어느새 카르둔이 조리실에서 돌아와 라틸과 라나문의 앞에 멜론 두 접시와 차를 내려놓고 나갔다.

라나문은 침묵이 전혀 불편하지 않은 듯 조용히 라틸의 말을 기다리며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라틸은 잠시 멜론의 연한 녹색을 바라보다가, 심호흡을 하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라나문.”

“네, 폐하.”

“난 네가 대적자로서 뭔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라나문이 의외라는 듯 라틸을 바라보았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라틸이 손가락을 꿈틀거리자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폐하께서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입니까?”

“나는-.”

“아니면 폐하께서, 대적자를 적대하시기 때문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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