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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화. 기르골의 서약식 (2) (325/367)


325화. 기르골의 서약식 (2)
2023.04.09.


그때 신호를 받은 악사들이 각기 악기를 집고 아련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서약식에서 나올 음악이라기엔 너무 잔잔하고 신비로운 음악이었다. 나비가 날아갈 때 흘러나올 법한 음악.

그 음악을 받으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자, 고위 신관은 지나치게 흥미로워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표정을 관리했다.

하지만 곧 그의 표정엔 당혹스러운 실망감이 어렸다. 나타난 이가 붉은 베일을 덮어써 얼굴은 물론 온몸까지 가리고 있던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꼼꼼하게 온몸을 가렸다.

이건 황제의 취향인가 본인의 취향인가. 고위 신관은 당황해서 입을 벌리고 있다가 근처에 누군가 스윽(@쓱) 다가와 서자 얼른 입을 닫았다.

근처에 선 건 황제였다. 역시나 조금 난감한 표정의 황제.

고위 신관은 저 커다란 베일이 합의된 게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황제가 이마를 매만지는 사이, 자신을 꽁꽁 감춘 화제의 평민 후궁이 앞으로 다가와 섰다.

고위 신관은 그래도 전문가였다. 그는 혼란한 속내는 싹 감추고, 엄숙한 표정을 하고서 서약서를 그 후궁 앞으로 내밀었다.


“읽고 서명하십시오.”

속으로는 ‘그런데 여기 쓴 글씨가 보이나?’ 생각했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안 보이면 알아서 저 베일을 벗겠지.

하지만 평민 후궁은 베일을 벗지 않았다. 대신 베일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손이 컸지만 손가락이 길게 쭉 뻗어 시원하고 아름다운 생김새였다.

황제가 잉크를 찍은 깃털 펜을 내밀자, 후궁은 그 손으로 펜을 받아 들더니 정확한 위치에 정해진 칸이 다 튀어나오도록 크게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이름 옆에 예쁘게 그려진 하트.


“…….”

고위 신관은 힐긋 황제를 보았다.

다른 후궁들은 배경이 좋다. 심지어 평민인 타시르와 칼라인조차도.

그렇다면 배경이 아예 없는 이 평민 후궁이야말로 황제가 오롯이 마음에 들어서 들인 후궁일 터.

그런 후궁이 이 모양새라면 역시 폐하의 취향이……?

* * *



‘왜 저렇게 이상하게 쳐다보는 거야, 저 신관?’

옆에서 느껴지는 따끔거리는 시선에 라틸은 자꾸만 구겨지려는 인상을 애써 무덤덤하게 유지했다.

그 사이, 이름을 다 적은 기르골은 누가 볼 새라 자기 손을 다시 베일 안으로 슬그머니 집어넣고 있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라틸은 기르골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며칠 전에 찾아갔을 때도 얼굴을 안 보여주더니. 오늘은 베일로 다 가리고 나와?

부끄럽단 말은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 얼굴을 가리고 대체 뭔 짓을 하는 걸까 궁금할 뿐.

어쨌건 저 손은 다시 빼내야 했다.


“기르골 님. 폐하께서 이제 반지를 끼워주실 겁니다. 손을 다시 주시지요.”

고위 신관의 말에 기르골이 고개를 기웃하더니 곧 손을 도로 꺼냈다.

라틸은 미리 준비해 온 반지를 꺼내 그의 손가락에 천천히 끼워주었다.

그 과정 내내 후궁들과 윌랑 사절단의 눈빛이 죽일 듯 이쪽을 향해서 라틸은 좀 궁금해졌다.

설마 기르골. 저주를 퍼부을 손님들만 죄다 초청해 놓고서 자기만 방어막으로 베일을 둘렀나?

그 순간. 기르골이 반지를 낀 손을 쭉 펼쳐 제 눈앞에 보고 살피더니, 갑자기 뒤로 돌아서서 하객들에게 보란 듯 손등을 보였다.

동시에 하객들의 표정이 구겨지자, 베일 안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작게 시작된 웃음소리는 곧 모두가 들을 법한 커다란 웃음소리로 변해갔다.

클라인은 대놓고 ‘저거 미쳤나?’란 표정을 지었다.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고위 신관을 곁눈질했다.

고위 신관은 기르골을 앞에 두고서도, 이게 뭔가 싶은지 눈을 연신 비벼대고 있었다.


‘왜 이렇게 얌전히 구나 했다.’

라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다 웃었는지, 기르골이 라틸의 손을 잡더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자랑 끝. 제자님. 이제 불순물들은 다 보내고 둘이서 놀자.”

“불순……”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기르골이 라틸의 손을 깍지낀 채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라틸은 얼결에 그를 따라 뛰어갔다.

발목까지 가려지는 긴 베일을 쓴 채 기르골은 놀랍도록 균형을 완벽하게 잡고 달리고 있었다.

라틸은 그와 손을 잡은 채 정신없이 달리며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온실 안으로 들어오고부터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힘겨울 정도였다.

온실 안에는 사방에 꽃이 피어 있었다. 밤의 촉촉한 공기와 온실 내부의 따뜻한 공기가 뒤섞였고, 그 사이를 온갖 꽃의 향이 스며들었다.

그 짙은 꽃 내음과 사방에 펼쳐진 꽃밭들……

라틸이 꿈속에서 보는 경치들보다 더욱 꿈 같은 광경들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기르골이 라틸을 가볍게 들어 올리더니 어딘가에 눕혔다.

다른 곳보다 좀 더 높은 곳이었다. 사방이 활짝 피어난 꽃들로 가득 찬…….

라틸은 기르골과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꽃 안을 파고 들어가 안쪽을 더듬거렸다.

침대였다.

침대 위에 꽃을 두툼하게 뿌려두어서 꽃밭과 차이가 나지 않은 것이다.

침대 휘장까지 전부 다 꽃을 달아 둔 터라, 이곳에도 꽃향기가 가득했다. 라틸은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 상태로 기르골을 올려다보다, 라틸은 그와 잡지 않은 손을 이번에는 위로 뻗었다.

베일을 잡고 천천히 아래로 당기자, 다리에서부터 허리, 목덜미를 천천히 드러낸 베일이 마침내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드러냈다.

하얗고 긴 속눈썹 사이로 제가 좋아하는 꽃처럼 붉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서 가장 선정적인 그의 입술이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안녕, 신부님.”


눈을 마주하자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인사했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여전히 그와 꼭 잡은 손가락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 욱신거렸다.

그의 입술이 순식간에 라틸의 입술을 덮었다.

라틸은 향기에 취할 것 같단 기분을 실감했다. 내내 꽃을 먹어대더니, 그의 입에서도 봄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라틸은 그의 등을 붙잡았다.

침대를 몇 바퀴 굴렀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아 있었고, 그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느껴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르골의 베일은 저만치 굴러다니고 있고, 그의 셔츠는 온데간데없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다시 입을 맞추어왔다. 아주 짧게.

아쉽게 입술이 떨어지자, 기르골이 이마를 맞대더니 허스키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신부님. 내가 맛있어?”

“넌 말을……”

“신부님은 맛있어.”

기르골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라틸은 두 손으로 그의 눈을 가려버렸다.

* * *



“빌어먹을 새끼!”

큰소리로 외친 윌랑 왕자는 주먹으로 벽을 내려치고서 씩씩거렸다.


“날 조롱하는 거다.”

“왕자님……”

“분명해! 대놓고 반지를 보이던 꼴을 봐라!”

시종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왕자가 눈가에 눈물까지 글썽이자 입을 다물었다.


“왕자님, 울지 마세요. 뭐하러 그런 자 때문에 우십니까.”

“폐하는 내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몇 번이나 날 찾아오고, 내게 스승을 붙여주고 그랬어!”

“왕자님……”

“그런 걸 그놈이 낚아채서 뺏어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막판엔 날 모욕했어! 일부러 날 초대해 놓고 반지를 보이면서 조롱했다고!”

왕자가 소파를 걷어차고 그 위에 앉자 호위가 얼른 위로했다.


“뭐하러 그 여우 같은 놈을 신경 쓰십니까. 관심 둘 필요도 없습니다, 왕자님. 어차피 왕자님은 타리움 황제를 좋아하지 않으셨고요.”

“내가 관심이 없으니까 더욱 열이 받는 거다! 관심도 없는데 놀아난 거니까!”

윌랑 왕자는 술병을 꺼내 잔에 따라 몇 잔 마시더니, 쾅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으며 이를 갈았다.


“기르골 그놈. 절대로 가만히 못 두겠다. 이대로 당하고 가만히 있으면 난 그놈한테 놀아난 게 된다.”

윌랑 왕자로서는 화가 날 만도 했다.

기르골이 보란 듯 황제를 유혹해 후궁이 되는 모습이나 일부러 초대해 놓고 반지를 자랑한 것 등 모두 다 화가 나지만, 결정적으로 기르골을 여기에 데려온 게 그 자신이란 것. 그게 가장 화가 났다.


“적당히 때를 보아서 해칠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호위도 화나긴 마찬가지인지라 차갑게 다짐했다.


“때를 보아? 아니.”

그러나 윌랑 왕자의 자존심은 이미 넝마처럼 헤어진 후였다.

황제가 만날 때마다 그를 챙기는 걸 보고 ‘날 좋아하나?’ 생각했던 일 때문에 더욱 자존심이 상했다.


“기르골 그놈이 하녀와 바람나게 할 거다. 황제가 직접 그를 내치게 만들 거야.”

시종은 당황해서 말했다.


“하녀요? 하지만 왕자님, 후궁은 동성 측근 밖에 둘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왕자의 표정엔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안다.”

“예?”

“하지만 하인들을 하나하나 벗겨서 확인하는 건 아니지.”

“설마, 왕자님……!”

“분명 아페라가 발목이 좋지 않아 일을 관두려 했지.”

시종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페라는 윌랑 왕실 무희 중 하나로, 5초만 눈을 마주쳐도 사랑에 빠지게 된단 매혹적인 외모와 뛰어난 춤 솜씨로 이름나 있었다.

윌랑에는 그녀에게 반해 가슴앓이하는 청년들 숫자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아페라에게 75억 퀘펜을 줄 테니, 이 일을 맡아줄 수 있는지 물어보아라.”

“칠, 칠십오억 퀘펜이요?”

어마어마한 금액에 시종이 입을 떡 벌렸다.


“위험도가 큰일이니까. 만약 하겠다고 하면 남장을 시켜 내 하인으로 들여보내. 기르골은 내가 데려온 사람이니, 하인을 세 명 정도 보낼 수 있을 거다.”

 

* * *

정신을 차린 라틸은 기르골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서 있는 걸 보았다.

라틸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는 분명 라틸의 옆에서 눈을 편안하게 감고 있었다.

라틸이 중간에 자자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끊어 버리자 입이 부루퉁 나오긴 했지만, 곧 그조차 미소로 물들었다.

그런데 왜 저런 서글픈 표정이지?

게다가 여기는…… 숲이다.


‘몸이 움직이지 않아.’

“왜? 왜 날 버리고 가는 거야?”

그가 하는 이상한 질문에 저절로 대답이 흘러나왔다.


“외부의 적보다 무서운 게 내부의 적이래.”

“적? 내가 아가씨의 적이야?”

그 목소리와 대화를 듣고서야, 라틸은 이곳이 도미스의 꿈이란 걸 알아차렸다. 보통 때는 바로 알아차려 졌는데. 이번에는 기르골이 연달아 나온 것이라 잠시 헷갈린 것이다.

현실의 라틸은 기르골을 구경하는가 싶었는데, 그사이에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찰나를 사이에 두고 행복해하던 기르골과 서글픈 기르골을 연달아 보자 아주 기분이 묘했다.


“난 아가씨의 편이기로 했잖아, 도미스.”

기르골의 동공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지만, 도미스는 모르는 듯했다.


“칼라인이 아가씨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때도 난 늘 아가씨의 편이었어. 우리는 계속 친구 하기로 한 거 아니야?”

“그래서 널 데려갈 수 없다.”

“!”

“칼라인은 안야의 편이어서 안야를 위했어. 그래서 내게 상처를 줬지. 넌 내 친구라면서 날 궁지로 몰아넣었다. 매번. 네가 의도한 게 아닌데도.”

도미스의 머릿속에 기르골과의 좋은 시간이 연달아 지나갔다.

하지만 도미스는 칼라인에게 그랬듯, 기르골에게도 그 어떤 것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널 데려갈 수 없어, 기르골. 넌 날 위해 날 해치니까.”

“도미스…….”

“칼라인이라고 예뻐서 데려가는 건 아냐. 그를 신뢰하지 않아. 그를 믿지도 않아. 하지만 최소한, 그는 ‘로드’에겐 충성하지. 그 충성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난 그를 이용하기 위해 데려가는 거야.”

“나도 이용해.”

도미스는 대답 대신 돌아섰다.

돌아서기 전, 라틸은 기르골의 표정이 완전히 맛이 가는 걸 확인했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던 칼라인이 손을 뻗어 도미스를 잡으려 했으나, 도미스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고 홀로 걸어갔다.

도미스는 각성을 하면서 철저하게 누구도 믿지 않으리라, 결심한 게 분명했다.

라틸은 도미스가 느끼는 지독한 고립감과 외로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다 눈을 뜨자, 기르골이 바로 앞에 있었다.

붉은 눈동자는 멀쩡했다. 젠가가 잘 박혀 있다.

그걸 보는데, 아까 뜨거워졌던 눈시울이 결국 눈물을 뱉어냈다.

눈가를 타고 흐른 눈물이 베개로 떨어지자, 그가 눈가를 혀로 핥았다.


“왜 울어, 제자님?”

라틸은 그의 목덜미에 머리를 묻고 눈을 감았다.


“네가 울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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