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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화. 기르골의 서약식 (324/367)


324화. 기르골의 서약식
2023.04.05.


여기서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하이신스가 의식을 잃고 있다지만 그를 간호하는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방문할 것이다.

라틸은 울렁이는 속을 다스리기 위해 가슴팍을 두어 번 두드리고서 대신관에게 다가가 그를 흔들었다.


“자이신. 자이신.”

귀에 대고 몇 번 이름을 부르자, 다행히 대신관이 천천히 눈을 떴다.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던 그는, 자신이 깔고 있는 상대를 보자 기겁해서 허둥대다 침대에서 떨어졌다.

‘쿵’ 소리가 나자 라틸과 게스타, 자이신 세 사람은 모두 동작을 멈추고 문밖에 귀를 기울였다.


“…….”

특히 바로 그 공포의 미끄럼틀을 타고 싶지 않은 라틸과 자이신 둘은 정말로 쥐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히 밖에서 아무 소리가 나지 않자, 라틸은 안도해서 자이신에게 손짓했다.

빨리 치료해. 빨리.

자이신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옷매무새를 습관적으로 정리한 다음 하이신스의 옆으로 가 섰다.

라틸은 아직 좀 울렁이는 속을 누르며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하이신스를 가슴 아파 바라보았다.


‘하이신스…….’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하이신스가 이런 꼴로 누워 있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아렸다.

더이상 그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기로 했지만, 그래도 약한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제가 얼른 치료해드리겠습니다, 가엾은 폐하.”

그러나 아픈 마음은, 대신관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손을 우득우득 풀기 시작하자 오묘한 기분으로 변해버렸다.

라틸은 차마 하이신스가 얻어 맞는 걸 보지 못하고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그러고 있자니 눈의 사각지대 즈음에 걸쳐 대신관이 하이신스를 두드리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러다 “윽.” 하는 신음이 터지자 라틸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죽은 듯 누워 있던 하이신스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라틸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대신관이 하이신스의 입을 막더니 다시 눕히며 말했다.


“조용히 해야 합니다.”

하이신스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라틸은 얼른 그쪽으로 다가가 하이신스에게 ‘쉿!’ 하는 신호를 같이 하고서 눈으로 문을 가리켰다.

하이신스도 이곳이 자신의 방이란 것과 라틸의 얼굴, 대신관의 얼굴을 확인하자 눈으로 알아듣겠단 표시를 했다.

대신관이 하이신스에게서 손을 떼자, 그는 상체를 일으키더니 피를 한 움큼 토하고서 라틸에게 작게 물었다.


“라틸. 드디어 날 죽이러 왔어?”

“뭐야?”

“아무리 봐도 이 상황은…….”

“대신관이 널 치료해준 거야.”

“치료?”

하이신스가 입을 막고 기침하더니 다시 피를 토했다.

그는 손바닥을 물들인 피를 보다가 라틸을 멍하게 보며 진심이냐는 듯 물었다.


“치료?”

라틸은 헛기침을 하고서 대신관에게 몸도 치료해주라고 다시 신호했다.

대신관은 하이신스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이신스는 움찔했으나, 곧 몸이 빠르게 편안해지자 긴장해서 움켜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마침내 치료를 끝낸 대신관이 손을 떼자, 하이신스는 치료란 걸 인정하고 인사했다.


“고맙군. 대신관.”

대신관은 말없이 웃고 있다가 뒤늦게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 전에 카리센 사절-!”

하이신스는 씩 웃고서 대신관을 툭 치고는 게스타를 한 번, 라틸을 한 번 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어디까지 기억나?”

“좀비를 다 잡아놓고 쓰러진 거. 물려서.”

“네가 좀비로 변하려 하길래, 대신관 부적을 붙여서 진행을 막아뒀어. 그래서 좀비로 변하지 않은 거야.”

라틸은 잠시 하이신스의 옆에 앉아 그동안의 이야기를 빠르게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다가 공작이 그의 치료를 거부한 일, 클라인이 범인으로 몰려 큰일 날 뻔한 일, 그때 클라인에게 물려 다가 공작이 죽을 뻔한 일, 다가 공작과 먼 친척뻘인 아낙차가 이곳에 있다가 그를 식시귀로 부활시킨 일 등등을.

하이신스는 다가 공작이 식시귀가 되었단 부분에서 좀 놀랐지만, 그 외에는 비교적 차분하게 들었다.

심지어 다가 공작이 그의 치료를 막았다는 부분도.

라틸은 하이신스의 손을 무의식중에 잡으려다가 다시 손을 거두어들이고서 말했다.


“이제 네가 깨어놨으니 됐어. 모든 일을 바로잡아.”

하이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정신이 없을 텐데도 그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고 차분했다. 마치 모든 상황을 지켜보기라도 한 듯 초연한 모습이었다.

라틸은 안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신스라면 일을 잘 해결할 것이다.


“좀 더 지켜보다가.”

하지만 하이신스는 뜻밖의 말을 했다.


“지켜보겠다니? 깨어난 걸 알리지 않으려고?”

“어. 잠시 상황을 지켜보면서 깨어나기 가장 적당한 때를 찾아봐야겠어.“

 

* * *

타리움에 돌아오자마자 대신관은 바닥에 엎어져 멀미를 했다.

라틸은 게스타의 등짝을 한 대 때리고 싶은 걸 누르느라 인내심을 열심히 발휘해야 했다.

눈을 감고 이동하면 괜찮다더니. 그냥 눈을 뜨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눈을 감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차이였다. 오히려 더 아찔하면 아찔했지, 덜하지 않았던 것이다.

라틸은 대체 게스타가 평소에 여기를 어떻게 오가는지 신기해졌다. 본인은 멀쩡히 다니는 거 같은데. 익숙해져서 그러나?

그러고 있자니 등에 손길이 닿으면서 갑자기 몸이 편안해졌다.

라틸은 옆을 보았다. 자기도 힘겨워하던 대신관이 어느새 라틸의 곁으로 와서 신성력으로 어지러운 속을 진정시켜주고 있었다.


“자이신.”

라틸은 감동 받아서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정말로 고생 많았다.”

“괜찮습니다. 다친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건 제게도 기쁜 일인걸요.”

그런데 대신관의 대신관다운 말을 들으며 감동하고 있자니, 옆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놀라 뒤돌아보자 아까는 멀쩡해 보이던 게스타가 쓰러져 있었다.


“게스타?”

라틸이 놀라 다가가자 게스타가 눈을 힘겹게 뜨더니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힘을 너무 많이 썼더니 기운이 없어요…….”

“이런. 그래, 너도 고생이 많았을 텐데.”

라틸은 대신관 뿐만 아니라 게스타도 두 번이나 여우굴을 만들었단 걸 떠올리자, 그 끔찍한 이동 기분 때문에 잠시 그를 내버려 둔 게 후회되었다.

자책하고 있자니 게스타가 살그머니 속삭였다.


“폐하. 손을 잡아 주세요. 기운이 없지만 손을 잡아 주시면 기운이 날 것 같아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게스타는 목에 힘을 빼고 있다가 정색해서 고개를 들었다.

대신관이 게스타의 손을 잡고 신성력을 넣어주다가 맑게 웃으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게스타 님? 폐하보단 제 손이 더 기운 나지요?”

“…….”

 

 

* * *

하이신스를 치료해주고 돌아온 다음 날, 기분이 좋아서 평소보다 밝게 일하고 있는 라틸에게 시종장이 알려주었다.


“폐하. 온실이 완공되었습니다. 이제 새 후궁을 받아들이실 수 있습니다.”

라틸은 가볍게 서명하던 걸 멈추고서 괜히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라틸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 세 시간 뒤, 라틸은 약간 멍한 기분으로 기르골을 찾아갔다.

그에게 온실이 완공되었단 걸 알려주고 언제 후궁으로 들어올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미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지만.


‘이게 뭐라고 긴장될까.’

라틸은 손님용 궁전을 찾아가면서 몇 번이나 뒤돌아 돌아갈 뻔했다.

기르골을 후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오래 고민해야 했지만, 막상 진짜 서약서를 쓰고 돌아온다고 하니 게스타의 그 여우굴에 들어간 마냥 마음이 철렁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왜 이렇게 길은 짧게 느껴지는지. 어느새 기르골의 방문 앞이었다.

라틸은 두어 번 손을 들었다가 내리길 반복한 후에야 용기를 내어 노크했다.

가끔 그렇듯 안쪽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왔으리란 걸 기르골은 이미 알 게 뻔해서, 라틸은 그냥 문고리를 돌렸다.


‘어?’

그러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라틸은 문고리를 몇 번이나 덜컥거렸다.


“제자님.”

그러고 있자니 안에서 기르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보다 좀 더 늘어지는 목소리.

라틸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아차렸다.

기분이 좋은가 보네. 온실 완공 이야기를 들었나 봐.

라틸은 몇 번 헛기침을 하고서 자신도 일부러 밝게 말했다.


“문 좀 열어봐, 기르골. 그대 침실이 완공됐대.”

‘그래, 저렇게 좋아하는데 나도 같이 좋아해 줘야지. 아니면 기분 상할 거야. 기르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어도.’

하지만 밝게 말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들었어, 제자님.”

몽롱한 목소리가 들려올 뿐.

라틸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문 좀 열지. 서약식 이야기를 해야지.”

“부끄러워서 얼굴을 안 보여주고 싶어, 제자님.”

“…….”

그럼 뭐 어쩌잔 거야. 라틸은 뚱하게 문을 쳐다보다 물었다.


“그럼, 사람을 보낼까?”

이쪽은 일부러 말하기 편하게 직접 와 줬더니. 다른 후궁들은 서약식에 관해서 직접 논의하지 않았다고.


“안 돼.”

하지만 문을 열어주지도 않으면서 기르골은 가지 말라고 붙잡았다.

라틸은 한숨을 쉬고서 문고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이 상태로 이야기해, 제자님.”

“갑자기 왜 부끄럽단 거야?”

부끄러움이란 감정을 알기는 하나.


“나 결혼식 처음 해봐, 아가씨.”

라틸은 결혼식이 아니라 서약식이라고 정정해주고 싶은 걸 참았다. 그랬다간 서약식을 치우고 결혼식을 해달라 할 것 같아서.

어떻게 달래야 하나 생각하고 있자니, 문 아래로 종이쪽지가 스륵 나왔다.

라틸은 그걸 집어 들어올렸다.


“뭐야?”

“이렇게 해줘. 소소하게 적어 봤어.”

요구사항? 라틸은 생각 없이 쪽지를 내려다보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구사항은 야무지게도 적어놨네.’

서약식 분위기부터 인테리어, 초대 손님, 서약식 시간, 원하는 의상 디자인까지 다 이미 적혀 있었다.

역시 수천 살. 라틸은 혀를 내둘렀다.


“서약식은 왜 밤에 하고 싶은데?”

“내 시종은 해를 못 봐, 제자님.”

“왜?”

“뱀파이어거든.”

“칼라인 시종은 낮에도 잘 다니던데.”

“걔는 전대 로드가 만든 애라 그래.”

아. 로드가 만든 뱀파이어는 낮에 다닐 수 있고 아닌 뱀파이어는 낮에 못 다니는구나.

라틸은 전설과 달리 흑사신단 뱀파이어들이 햇빛을 잘만 받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럼 흑사신단 뱀파이어들은 전부 다 도미스가 만든 뱀파이어들이구나. 어쩐지. 데먼이 날 볼 때마다 지나치게 감격하더라니.’

라틸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느라 말을 멈추자, 안쪽에서 기르골이 똑똑 문을 노크하고 물었다.


“제자님. 거기 있어?”

라틸은 성질이 나서 문을 두드리고 싶어졌다. 저 수천 살, 진짜 까다롭네.


“제자님.”

“있어.”

“화려하게 해줘.”

“…….”

“제자님?”

“알았어.”

 

* * *

마침내 서약식 날이 되었다.

기르골은 데려올 만한 친지들이 없는지라, 초대 손님들은 기존의 후궁들과 윌랑 사절단이 전부였다.

놀라울 정도로 악의적인 초대 손님 명단을 보며 시종장은 당황해서 물었다.


“진짜 이 사람들을 초대한다 했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기르골이 고른 손님들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퍼부을 사람들뿐이었던 것이다.

욕을 먹으면서 서약식을 치르고 싶은 걸까? 그런 거라면 완벽한 선택지이긴 했다.


“그냥 그대로 해줘. 본인이 그게 좋대.”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온실 앞에 마련한 간소한 연회 장소에 빛이 한가득 들어왔다.

줄줄이 늘어선 기둥이 별처럼 피어났고, 그 사이에는 그 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사로 짠 융단이 깔렸다.

융단의 양옆으로는 손님들이 앉을 의자가 몇 개 놓였고, 기르골의 특별 요청에 따라 다른 후궁들은 사용해보지 못한 작은 웨딩 아치까지 놓았다.

서약식을 주관하러 온 고위 신관은, 대신관이 손님석에서 자신을 자꾸 멍하게 쳐다보자, 불편해서 연신 단추를 매만졌다.

사실 고위 신관이 눈치 보이는 건 대신관 뿐만은 아니었다.

손님이라고 온 이들의 표정이 죄다 험악했으니, 가장 앞에 서 있는 고위 신관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사이 나쁜 가문의 정략 결혼식에도 몇 번 참여해 보았지만, 그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고위 신관은 한숨을 내쉬면서, 황제에게 이 모든 걸 목록으로 작성해 요구했다는 그 소문 속 ‘평민’ 후궁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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