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구해줄게 하이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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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화. 구해줄게 하이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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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화. 구해줄게 하이신스
2023.04.02.
아이니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서 빈정거렸다.
“라트라실 황제가 많이 화가 났나?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군.”
카리센 사절단과 함께 돌아온 타리움 사절단은 그 말에도 그저 미소만 지었다.
아이니는 그자를 차갑게 바라보다가 미셜 후작을 보며 말했다.
“삿된 존재는 오히려 그쪽에 있을 텐데. 자네에게 괜히 불똥이 튀었군.”
미셜 후작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전 당당하니까요. 신전에서 검사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니는 다시 타리움 사절단을 보았다.
타리움 사절단은 그 이야기가 나오자 기다렸단 듯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게 해주시면 좋지요.”
뻔뻔하긴. 미셜 후작이 아무 관련이 없단 걸 자기들도 잘 알고 있으면서. 주군이나 부하나 어쩌면 저렇게들 똑같을까.
아이니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 타리움에서도 한 명을 지목해 같이 조사를 받게 시킬까 생각했다.
당연히 대상은 타시르다. 흑마법사일 확률이 상당히 높은.
하지만 막판에 아이니는 마음을 바꾸었다.
라트라실은 자신의 아버지가 식시귀란 걸 알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걸 어떤 식으로 쓰려는 건지 모르니, 이쪽에서도 패를 하나 쥐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좋아.”
아이니는 단호하게 말하고서 턱을 치켜들었다.
“미셜 후작이 신전에서 검사받는 걸 보여주지.”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타리움의 사절이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겉으로 보기엔 아주 공손한 태도였으나, 아이니는 서늘한 눈으로 그자를 내려다보며 경고했다.
“하지만 타리움에서도 수상한 자가 있을 시, 바로 우리와 같은 대응을 해야 할 것이다.”
“폐하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 * *
“폐하께서는 왜 굳이 미셜 후작을 지목하신 겁니까?”
라틸은 업무 도중 잠시 커피를 마시며 퍼즐을 가지고 놀다가, 서넛의 질문에 옆을 보았다.
“그게 갑자기 궁금합니까?”
라틸이 웃으면서 묻자, 서넛은 순순히 인정했다.
“네. 저는 폐하께서 다가 공작 일을 꺼낼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다가 공작이 ‘식시귀다운’ 짓을 사람들 앞에서 하게 만드시거나요.”
“아. 그런 방식도 생각해 봤는데요.”
“예.”
“그러면 너무 쉬우니까.”
“쉽다고요?”
“이쪽에서 다가 공작을 공격해주면, 아이니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아버지를 버려야 하잖습니까.”
“?”
“그러면 재미없지. 아버지를 식시귀로 만든 건 자기인데, 나만 원망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날 원망하면서 힘을 내게 둘 순 없습니다.”
서넛의 입이 벌어졌다.
“혹시…….”
“아이니는 다가 공작이 범인인 걸 알면서도 제 손으로 아버지의 죄를 묻고 가야 할 겁니다. 이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결국 그 사람도 결정해야겠죠. 스스로 아버지를 내치던가. 아버지보다 더 큰 악이 되던가.”
“!”
“그때가 되면 과연 누가 로드 같을까? 나? 아이니?”
라틸은 못되게 웃고서, 안 풀리자 그냥 부숴버린 퍼즐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서넛은 ‘폐하요’라고 속으로 올라오려는 대답을 꾹 삼켰다.
* * *
그 시각.
라틸의 명령을 받은 칼라인은 ‘그만큼 빨리 달릴 수 없는’ 게스타를 업고 카리센으로 뛰어가며 한 걸음마다 욕 255마디를 내뱉고 있었다.
그리 효과는 없는 짓이었다. 게스타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으니까.
게스타의 귀에 칼라인이 엄청난 속도로 내뱉는 욕은 입에 물을 담고서 ‘가글가글’ 할 때 나는 소리처럼 들렸으니까.
“양치할 때 나는 소리 같아요.”
“뭐?”
“칼라인 님 목소리요……. 풉.”
칼라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게스타를 패대기쳐 버렸다.
* * *
바닥을 또 구르고 싶진 않은지 게스타는 이후로는 입을 다물었다.
칼라인도 게스타와 둘이서만 더 오래 있긴 싫었기에, 더는 빠른 욕을 뱉지 않고 달리는 데 열중해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다.
카리센의 수도에 온 둘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궁전 근처로 가보았다.
칼라인은 어둠을 뚫고 빛을 내는 수많은 창문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게스타도 인상을 찡그렸다.
“하이신스 황제가 저 중 한 군데에 있단 거지? 저걸 다 확인해야 한다고?”
칼라인이 차갑게 말했다.
“그러게 그리핀을 데려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 새가 주둥이 놀리는 걸 듣고 있으면 마음이 바뀔걸요…….”
“너보단 낫겠지.”
“돌아가자마자 보내줄 테니 같이 생활해 보세요…….”
칼라인은 게스타를 차버리려다가, 게스타가 손가락으로 바닥에 뭔가를 그리려는 듯하자 발을 도로 내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서 명령했다.
“그 잘 굴리는 머리나 굴려 봐. 저걸 네놈과 같이 하나하나 확인하다간 들킬 게 뻔하니까.”
소리 없이 방 안에 들어설 수는 있지만, 아무리 소리 없이 다녀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궁전에서 문이나 창문을 열면 발각되기 쉬웠다. 특히나 지금처럼 방비가 삼엄한 때라면 더욱.
게스타는 미간을 찡그리고서 반짝이는 창문들을 쳐다보다 제안했다.
“일단…… 중간중간 불이 흐릿하거나 꺼진 곳부터 살피지요.”
“어째서?”
“하이신스 황제는 오랫동안 쓰러져 있으니까요. 불을 꺼두거나, 켜두더라도 어둡게 해둘 것 같아요. 밝은 곳에서 계속 자면 눈이 피곤할 테고.”
칼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 * *
평소처럼 업무를 보고 있을 때였다.
“폐하. 게스타 님의 시종이 찾아왔습니다.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라틸의 시종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
업무 도중이기에 말을 전하면서도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라틸은 게스타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활짝 웃었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일을 잘 처리하고 돌아오면 트리를 보내겠다고, 이미 게스타와는 말이 된 상태였다.
라틸은 지나치게 입이 히죽 벌어지려는 걸 억지로 관리하며 지시했다.
“지금은 좀 바쁘고. 오후 세 시 정도에 대신관과 셋이서 차를 마시자고 전해라. 얘기는 그때 듣지.”
‘이렇게 해야 자연스럽겠지.’
“네.”
시종이 물러나자 사정을 모르는 시종장이 ‘폐하께선 라나문 님에게 관심이 없지만, 게스타 님에게도 관심이 없구나’ 싶어서 흐뭇하게 웃었다.
이후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라틸은 오후 두 시 반이 되자마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하렘으로 걸어갔다.
게스타의 방을 찾아가니, 이미 대신관이 도착해 게스타와 마주 앉아 대화 중이었다.
라틸이 들어오자, 대신관은 일어서서 인사를 하면서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들으셨습니까? 게스타 님이 이동 마법을 사용한다 하십니다.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그 마법이요!”
게스타가 하이신스를 치료하러 가야 한단 이야기를 나름대로 잘 둘러대 둔 모양이었다.
“아, 나도 들었다. 알고 놀랐지. 우리 게스타가 정말 굉장한 사람이야.”
라틸이 흐뭇하게 웃자 대신관이 순수하게 기뻐하며 같이 좋아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너무 잘 속으니까 미안하잖아……. 라틸은 그 밝은 미소를 보며 조금 속이 쓰렸으나, 대신관에게 진실을 털어놓는 건 타시르에게 털어놓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정말로 조심조심해야 했다. 어쩌면 평생 숨기고 가야 할지도 모르고.
‘이 생각은 나중에.’
일단은 하이신스를 치료하는 것부터 생각하자. 라틸은 복잡해지는 생각을 옆으로 치우고서 물었다.
“자이신. 하이신스를 치료하러 다녀올 거란 이야기는 들었지?”
“네. 계속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폐하.”
고개를 끄덕인 라틸은 게스타와 눈을 맞추었다.
게스타는 쑥스러운 얼굴로 우물거리고 있다가, 라틸이 눈짓하자 주머니에서 분필을 꺼내서 바닥에 마법진으로 보이는 걸 그렸다.
‘원래 저런 걸 그렸던가?’
다가 공작에게 다녀올 때는 그냥 휙 온 것 같았는데.
라틸은 그 섬세한 그림을 보고 의아했지만, 올 때 갈 때 방법이 다르려니 싶어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어쩌면 마법진을 그리지 않아도 되지만 일부러 대신관 때문에 그리는 시늉을 할지도 모르고.
대신관은 그 모양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게스타가 분필을 내려놓자마자 마법진이 동그란 통로처럼 변하자 감탄했다.
“세상에. 꼭 여우굴처럼 생겼네요!”
“!”
라틸은 사레가 들려서 기침이 나오려는 걸 참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게스타도 정곡을 찔려 움찔했는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한지 모르는 대신관은 그저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라틸은 몇 번 헛기침하다가 대신관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가자.”
대신관이 거대한 놀이터에 막 도착한 사람처럼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걸까요?”
라틸은 어깨를 으쓱하고 게스타를 보았다.
대신관도 이 이동진을 만든 게 게스타란 생각이 들자, 질문 방향을 바꿔 바로 게스타에게 청했다.
“아, 이렇게 하지요. 게스타 님이 먼저 시범을 보여주시면 제가 바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게스타가 그를 톡 밀어버렸다.
“들어가아아아아아아아!”
대신관이 하려던 말이 메아리처럼 여우굴을 울리며 빠르게 멀어져갔다.
라틸은 눈이 톡 튀어나와서 게스타를 쳐다보았다.
게스타는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무서워서 못 가더라고요. 살짝 밀어줘야 잘 가요.”
“어…….”
살짝 밀긴 했지. 톡 밀었으니까.
라틸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나도 밀 거야? 비명이 되게 빠르게 멀어지던데. 속도가…….”
“폐하는 제가 안고 이동할게요. 그러면 덜 무서울 거예요…….”
“그럼 자이신은…….”
왜 민 거야?
라틸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으나 게스타는 알아듣고서 얼른 대답했다.
“제가 자이신 님을 안고 갈 수는 없잖아요…….”
아니 왜. 안고 가면 되지. 물론 덩치 차이가 좀 많이 나긴 하지만.
하긴. 게스타가 자이신을 안으면 안는 게 아니라 깔아뭉개지겠지. 특히 이렇게 빠르게 가속도가 붙어 내려가는 곳에서는.
아니, 그런데 정말 여기를 내려가야 해?
라틸이 멍하게 있자니, 게스타가 조심스레 다가와서 두 팔로 라틸을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눈을 감아 보세요.”
라틸은 생각보다 게스타의 품이 커다랗다는 데에 놀랐다.
라틸도 훈련을 많이 받아서 몸의 근육과 골격이 잘 발달한 편인데. 게스타의 품 안에 쉽게 들어가지는 게 신기했다.
라틸은 그냥 이동하기 위해 끌어안았단 걸 알면서도 좀 쑥스러워 웃었다.
게다가 게스타와 이렇게 꼭 안고 있으려니, 아까 대신관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조금 걱정되었던 마음이 싹 내려앉았다.
마음이 완전히 편안해지는 그 순간. 몸이 급강하했다.
“끄아아아아아아!”
라틸은 비명을 질렀다. 편안해졌던 마음은 한 번에 다 뒤집어진 상태였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딱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즈음. 심지어 갑자기 몸이 옆으로 꺾인다.
정정해야 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느낌이 아니었다. 절벽에 구불구불한 미끄럼틀을 설치해두고서 거기를 급강하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러다 진짜 안구가 빠질까 봐 걱정이 될 즈음에는 갑자기 몸이 ‘핑’하고 튀었다. 몸이 새총에서 발사된 돌이 된 것처럼.
라틸은 숨을 헐떡이며 머리를 빠르게 저었다.
여우굴에서 그대로 튕겨 나와 벽에 머리를 박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게스타가 자신을 끌어안고 멀쩡히 서 있었다.
“눈 감으시라니까요…….”
눈이 아직도 휙휙 도는 것 같아 게스타를 보자, 게스타가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눈, 눈 감으면 안 이래?”
“네…….”
“갈 땐 감을게.”
꼭. 꼭.
라틸은 속이 울렁거려서 게스타의 어깨를 잡고 헛구역질을 하다가, 뒤늦게 대신관이 떠올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이런데. 자이신은 괜찮나? 혼자서 갑자기 떨어졌는데?’
어두운 방 안, 예전에 잠깐 보았던 하이신스 방 내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멀미가 나는데 찡한 마음이 섞이자 속이 더 메슥거린다.
라틸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걸 참느라, 게스타에게 몸을 더 기댔다.
그러고서 “자이신이 없는데.” 하고 작게 중얼거리다가, 마침내 대신관을 발견했다.
“!”
대신관은 하이신스 위에 몸을 겹치고 기절해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얼굴은 안 겹쳐져서 그나마 다행일까. 그리고 둘 다 의식이 없는 것도.
“자이신 님은 의외로 간이 작네요.”
게스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라틸은 게스타가 분명 웃고 있다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