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울지 마 타시르
(322/367)
322화. 울지 마 타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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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화. 울지 마 타시르
2023.03.29.
“하여, 공작께선 당시 경황이 없는 데다 모든 사람을 의심해야 했기에 타리움에도 도움을 청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일이 너무 오래 지나 하이신스 폐하를 더 이대로 두기 곤란한 데다, 타리움에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도 않는바, 대신관님을 청해 하이신스 폐하를 치료하고 싶습니다.”
카리센 사절은 몇 달 만에 입장이 확 바뀌었다.
구구절절 하는 말에 타리움 대신들은 표정이 미묘해졌다.
관리들은 서로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라틸은 짐작하던 내용이지만 일부러 내색하지 않느라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내내 사절을 쳐다보았다.
“이런. 다가 공작에게 그런 사연이.”
그러다가 안타깝다는 듯 말하자, 서넛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너무 연극투입니다.”
라틸은 그 말을 무시했으나, 카리센 사절단은 라틸과 서넛의 모습을 보고 긴장했다.
황제가 최측근과 작게 대화하는 모습이 그들의 눈에는 ‘어때? 진심 같아?’ ‘꿍꿍이가 있어 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주고받는 말처럼 보였다.
사실 카리센 입장에서도 갑자기 타리움 사절이 자기들처럼 나오면 수상하게 여기긴 할 것이었다.
시키니 하긴 하지만, 그들 역시 다가 공작이 갑자기 바뀐 태도로 타리움을 대하자 의아했다.
이 때문에 카리센 사절은 타리움 황제가 그들의 제안을 두고 뭐라 모욕하려나 싶어서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의외로 라틸은 친절하게 대꾸했다.
“하이신스 황제는 여기서 유학 생활을 한 적도 있지. 짐과도 한때 친구처럼 지냈다. 당연히 아픈 친구는 도와야지. 대신관을 보내주겠네.”
라틸의 말에 카리센 사절들은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다가 황급히 동시에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 * *
그 시각.
타시르는 기분이 좋아서 히얼란을 데리고 춤을 추고 있었다.
히얼란은 창백해진 채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같이 춤을 추었는데, 하필 그때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히얼란은 그만 춤을 추고 싶었으나, 타시르는 히얼란을 데리고 빙글빙글 돌아 문 앞으로 가서 직접 물었다.
“누구지?”
“타시르 님. 상단에서 왔단 사람이 도련님을 찾습니다.”
그제야 춤이 멈추어서, 히얼란은 황급히 균형을 잡고 섰다.
“상단?”
타시르는 히얼란을 놓고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문 앞에 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타시르는 의외라 생각했다. 상단은 상단인데, 퍼퓸 로즈 상단 사람이었던 것이다.
왜 왔지? 의아하지만 타시르는 내색하지 않고 웃으면서 권했다.
“들어와. 히얼란. 차 좀.”
“네.”
히얼란이 나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스치듯 들어온 상인은, 몹시 피곤한 듯 보였다.
“앉지.”
타시르는 상인에게 긴 의자를 가리켰다.
그런데 앞서 걸어가다 보니, 뒤에서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타시르가 돌아보니, 그 상인이 따라오지 않고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뭔가 일이 있긴 있구나. 타시르는 대번에 알아보고서 물었다.
“무슨 일이지?”
“타시르 님. 분홍 머리 여자가 저희 상단 사람들을 납치해서 타시르 님과 다른 두 명이 누구인지 알아내려 했습니다!”
상인은 빼지 않고 외쳤다. 타시르는 인상을 찡그렸다.
“다가 공작저에서 나간 후에?”
“예. 직후는 아니었고 좀 시일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리고?”
“정체를 말하라고 협박했지만 상단주님은 끝내 입을 다무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상단주님을 살해하고…….”
“!”
상인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타시르는 눈이 커다래졌다.
“어르신이…… 돌아가셨다고?”
“네. 그걸 보고 겁먹은 몇 명이 타시르 님 이름을 말해버렸습니다. 다른 둘에 대해선 몰라서 말하지 않았지만요.”
상인은 계속해서 울었고 타시르는 표정이 서늘해졌다.
친부모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릴 때부터 보아 온 삼촌 조카 같은 사람이긴 했다.
그런데…… 죽었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조심하셔야 합니다, 타시르 님.”
상인이 재차 당부했다.
이후 히얼란이 차와 간식을 준비해서 들어왔을 때 상인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타시르만 한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 벌써 갔습니까?”
히얼란은 어리둥절해 두리번거리다가 타시르가 입술을 깨물면서 난 상처를 보고 더욱 놀라 물었다.
“왜 그러세요?”
* * *
라틸은 카리센 사절에게 일단 하루나 이틀 머물라 지시한 뒤 하렘으로 걸어가며 계산했다.
대신관만 보내는 건 안심이 안 된다.
하지만 뱀파이어들을 호위로 보낼 순 없어. 칼라인도 대신관은 불편해하잖아.
뱀파이어들을 보냈다가 일이 터지면 오히려 내분이 일어나.
그럼…… 일단 백화랑술 쪽에 말해보자. 백화에게 직접 대신관을 데리고 갔다가 와 달라고 해야지.
라틸은 그런 식으로 대신관을 찾아가 할 말을 떠올리며 계속 걸어갔다.
그런데 걷다 보니, 타시르의 시종 히얼란이 울면서 뛰어오는 게 보였다.
‘뭐지?’
왜 저러나 싶어 보다가 얼결에 멈춰 서자, 히얼란은 라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멈추어 서더니 엉엉 울며 애원했다.
“폐하. 저희 소단주님 좀 도와주세요.”
“무슨 소리냐? 타시르를 도와달라니?”
“그게…….”
라틸은 묻자마자 대답을 듣지도 않고 타시르의 방이 있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다급히 뛰어가 보니 문 두 개는 완전히 닫혀 있었다.
평소에도 문은 닫혀 있지만, 라틸은 순간적으로 ‘세상에! 문을 닫아 두다니 어디가 아픈가 봐!’ 생각하고서 얼른 문을 두드렸다.
“타시르? 타시르. 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소리가 나더니, 문이 덜컥 열렸다.
문을 열자마자 풍겨오는 술 냄새에 라틸은 인상 찌푸렸다.
“폐하.”
타시르는 웃었으나 라틸은 다급히 물었다.
“술 마셨어?”
“아닙니다.”
“냄새나는데.”
“술을 부었거든요. 카펫에.”
“왜?”
“취한 기분을 내고 싶어서요. 그런데 취하면 안 되니까. 머리 써야 하거든요. 정신 흐트러지면 안 됩니다.”
라틸이 들어가라고 손을 젓자, 타시르가 몸을 옆으로 틀어주었다.
라틸이 안으로 들어가자 타시르는 직접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러나 안 취했다면서, 막상 그는 몸이 비틀했다.
라틸이 얼른 잡아주자, 타시르는 그대로 몸을 라틸에게 기대고서 라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조금 따끈하긴 하지만 열이 나진 않았다.
‘아픈 건 아닌가.’
라틸은 타시르가 장난치는 줄 알고 웃다가, 그가 눈을 꽉 감고 이마를 찌푸린 걸 발견했다. 장난치는 게 아니었다.
“타시르. 왜 그래? 무슨 일인지 알려주어야지. 응?”
“대적자요.”
“어…… 응.”
‘갑자기 왜 대적자?’
“그냥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라틸은 심장이 철렁했다. 타시르가 난데없이 대적자 이야기를 꺼내면서 웃는데, 눈동자가 평소보다 날카로웠다.
“타시르?”
대체 무슨 일인데 애가 이래? 라틸이 재차 이름을 부르자, 타시르는 그제야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더니 이마를 떼며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지금 좀. 흥분해서.”
“무슨 일인데? 말해봐. 내가 해결해주마. 그럴 수 있는 권력자다. 알잖아?”
라틸은 타시르의 손을 쥐고 꽉 힘을 주었다.
그러고서 빤히 쳐다보자, 타시르는 그제야 털어놓았다.
“아낙차가 그때 저를 도와주었던 퍼퓸 로즈 상단주를 죽였다고 합니다.”
“아낙차가? 아니. 어떻게? 그때 분명 저택에서 무사히 나왔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상단을?”
“며칠 뒤에 죽인 걸 보니 다가 공작이 꼭두각시가 됐단 걸 알아봤나 보지요.”
라틸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낙차는 흑마법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초보라고 해서 당연히 모를 줄 알았는데. 알아봤구나!
“다가 공작은 폐하의 손에 있으니 그런 명령을 못 할 테고. 아낙차를 지금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아이니 황후……겠지요.”
“그래서 대적자를 죽이자고 한 거야?”
“네.”
라틸이 보기엔 아낙차의 독단적인 행동일 확률이 높았다. 아이니는 어쨌든 클라인을 죽이는 것도 끝까지 막으려 했으니.
하지만 아낙차가 그런 독단을 내릴 수 있는 건 분명 아이니가 뒤에서 힘을 주고 있기 때문이겠지.
아낙차가 지금 그곳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은 아이니가 주는 것일 테니.
라틸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자, 타시르가 마른세수를 하더니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돌아와서 말했다.
“이번에 카리센 사절단이 왔다 들었습니다. 대신관님을 청하러 온 거겠죠. 저도 같이 다녀오게 해 주십시오, 폐하.”
“가서 뭐 하려고.”
“오랜만에 본업을 좀.”
“황궁에 사람이 몇인 줄 알고”
“…….”
“죽을 각오로 간단 소리는 하지 마라. 죽을 각오 안 하고도 복수할 수 있어. 네 아내가 황제다, 타시르. 이 일엔 나도 관련이 있고.”
라틸의 쓴 말에 타시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라틸은 자기가 뱉은 말에 자기가 갑갑해져서 역시 한숨을 쉬었다.
‘맞아. 내가 아니었다면 상단주가 이 일에 엮이지도 않았겠지.’
“일을 같이 처리해. 하지만 네가 직접 가서 암살하는 건 안 돼. 아이니는 다가 공작이 꼭두각시가 된 걸 알았으면서도 사절을 보냈어. 대신관을 보내는 것도 재고해야 할 판이야. 널 보낼 수는 없다.”
타시르는 입술을 달싹였으나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홧김에 말을 꺼내긴 했지만, 자신도 실현 가능성이 작단 점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라틸은 일단 타시르를 데리고 소파에 가서 앉힌 다음 등을 토닥이면서 고민했다.
일이 이렇게 됐는데, 계획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라틸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하자. 하이신스는 대신관을 보내지 않고 치료할 방법을 찾아볼게.”
“그게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폐하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카리센에 가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그 전에 불가능했지. 하지만 이젠 가능할지도 몰라.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전에 게스타가 여우굴로 다가 공작한테 다녀왔다고 했지. 혹시 그 방식을 또 쓸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하이신스가 깨어나면 다가 공작 패는 버리겠어.”
“버리다니요?”
“그놈이 식시귀인 걸 세상에 밝혀야겠다.”
되도록 대적자와 싸우지 않고 넘어가려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아이니는 널 흑마법사라고 오해한 거야. 최소한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다 여기거나. 널 어떤 식으로든 공격하려 할 테지. 먼저 선수를 쳐야겠다.”
* * *
타시르의 방에서 나온 라틸은 곧장 게스타를 찾아가서 대신관을 데리고 하이신스에게 다녀올 수 있는지 물었다.
“네? 제가요?”
“전에 다가 공작을 재조립하러 갔을 때. 네 방에서 그쪽으로 바로 갔잖아.”
“그건…… 한 번 이미 그곳에 다녀온 상태여서…….”
“그리핀이랑 칼라인을 붙여줄게. 한 번 그쪽에 몰래 잠입했다 온 다음, 길을 만들어서 대신관을 데리고 다녀와 줘.”
게스타는 쩔쩔매는 표정으로 손을 꼼지락거리다 물었다.
“이론상 가능하긴 합니다…… 하지만 대신관님이 여우굴을 지나가려 하실까요……?”
“넌 흑마법사이지만 대신관에게 치료도 받을 수 있잖아. 여우굴을 지나가면 막 어두운 힘이 느껴지고 그래?”
“아니요.”
“그러면 괜찮잖아. 이동마법이라고 해.”
이후 라틸은 집무실로 간 다음 시종장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했다.
* * *
타리움에 보낸 사절단이 돌아왔다.
아이니는 사절단이 데려왔을 대신관을 맞이하기 위해 집무실을 나가 홀로 갔다.
그런데 홀 안의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의아해서 묻자, 사절단 대표가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눈치를 보며 말했다.
“황후 폐하. 타리움 황제가…… 하이신스 폐하를 고치는 건 당연히 협력하고 싶지만, 카리센 황궁 여기저기에 삿된 존재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보니 대신관님을 보내기 무섭다고 하십니다.”
아이니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삿된 존재? 여기에 삿된 존재가 어딨단 거지?”
“그게…….”
“말해라.”
“미셜 후작님이라고…….”
아버지를 꼭두각시로 만들었으니 공개적으로 모욕하려는 건가, 생각하던 아이니의 눈이 커다래졌다.
“누구?”
“어? 나?”
다가 공작의 측근인 미셜 후작은 난데없이 삿된 존재라는 소리를 듣고 당황해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는 황당한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으나, 아이니는 웃을 수 없었다.
‘라트라실. 설마…… 주위를 공격해서 내 손으로 아버지를 쳐내게 할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