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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화. 이 얘긴 꼭 해주고 싶었어 (321/367)


321화. 이 얘긴 꼭 해주고 싶었어
2023.03.26.



 


“옆.”

“예?”

“옆에도 묻었어, 타시르.”

“아.”

라틸이 손가락으로 반대쪽 입가를 가리키자, 타시르가 손수건으로 얼른 그쪽을 문질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많이 놀랐어?”

“예. 생각한 거보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더 놀랐습니다.”

“넌 머리가 좋으니 짐작한 줄 알았어.”

“짐작도 어느 선이어야 하지요. 대적자인데, 그냥 어둠의 힘을 사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그건 아이니고.”

“예?”

“아이니는 진짜 대적자인데 자기 아빠를 식시귀로 만들었잖아.”

물론 식시귀로 만들고 싶어서 만든 건 아니지만, 어쨌든 흔히 대적자가 할 거라 여겨지는 행동은 아니다.


‘이번엔 대적자가 둘이나 되지. 그 대적자 둘 다 전해지는 대적자들과 성격이 다르고. 이것과 관련 있을까?’

“그렇군요…….”

타시르가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손수건을 내려놓았다.

라틸은 그 눈치를 교묘히 살폈다.

일단 타시르는 기분 나빠 보이진 않는다. 이쪽을 막 악마 보듯 보는 것 같지도 않다. 다행인 걸까?


“질문할 거 없어?”

“대적자의 검은 그럼 어떻게 뽑으셨습니까?”

“몰라. 그냥. 힘주니까 뽑혔어.”

“아하.”

라틸은 또 타시르의 눈치를 잘 살피며 덧붙였다.


“내가 로드이긴 한데. 다른 사람들이랑 다른 건 하나도 없어, 타시르. 이거 봐. 평범한 사람이잖아.”

“황제시죠. 그것부터 안 평범하십니다.”

“평범한 황제잖아.”

라틸은 최대한 자신의 무난함을 어필하려 했지만, 타시르가 갑자기 정색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뭐가?”

“하나도 다른 점이 없어서야 됩니까.”

“어?”

“그렇게 악명이 높고 사방이 적인데 장점이라도 많아야 할 게 아닙니까. 무언가 힘이 있을 겁니다. 탐구는 해보셨습니까?”

“어어…… 아니.”

“해보셔야지요!”

타시르가 갑갑한 표정으로 라틸을 쳐다보자, 라틸은 떨떠름해졌다.

아니, 뭐야 이건. 이건 또 색다른 반응이잖아. 왜 네가 안타까워하는 건데?


“각성하기 전엔 힘이 없대.”

“각성이요?”

“어.”

‘사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속마음을 읽는다거나 하는 건 모든 로드 능력이 아닌 모양이니 드러내지 말자. 그건 서넛이나 칼라인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각성 전엔 그냥 별거 없어. 좀 힘이 셀 뿐이지. 그래서 그런가 봐. 우리가 전설처럼 아는 로드의 힘을 쓰려면 각성을 꼭 해야 하거든.”

“의외로군요.”

라틸은 타시르를 또 살폈다. 역시 기분 나빠 보이진 않았다. 많이 놀란 건 확실해 보이지만.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것과 별개로 호기심이 들긴 하는지, 타시르는 또 질문을 퍼부었다.


“그럼 각성은 어떻게 합니까?”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죽어야 해.”

“……폐하는 절 조금만 좋아하시죠?”

“왜 그래 아이스 타시르. 우리 사랑하는 사이 아니야?”

“사랑이 되기엔 95% 모자라지 않던가요.”

“그대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내가 그대를 사랑하면 괜찮대.”

라틸이 웃으면서 상체를 들이밀자, 타시르가 옆에 놓인 쿠션을 방패처럼 들어 올리는 바람에 라틸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스 타시르 핫 타시르 어디 갔어?”

“식어서 버렸습니다.”

그의 농담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신에게 이전처럼 대해주는 것 때문에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타시르는 라틸을 따라 웃으면서도 절대로 쿠션은 내리지 않았다.


“어쨌든…… 워낙 이미지가 안 좋잖아. 그래서 말하기 어려웠어.”

“이해합니다. 저라도 쉽게 말하지 못했을 겁니다.”

“응.”

라틸은 그런 타시르를 보며 씁쓸해졌다.

생판 남인, 물론 지금은 남은 아니지만, 어쨌든 남이었던 타시르는 이런 이야기를 다 받아주는데. 왜 오빠는 알아주지 못했을까.


‘타시르는 내가 차분하게 설명해서 괜찮고, 오빠는 무서운 전설을 먼저 접해서 그러나?’

마음이 일순간 갑갑해지려 해서, 라틸은 레안에 대한 생각을 얼른 치워버리고 타시르에게 다시 장난을 걸었다.


“타시르.”

“네, 폐하.”

“쿠션 내려도 돼.”

“무서워서 안은 게 아니랍니다, 폐하. 전 원래 뭐든 끌어안고 있는 걸 좋아해요.”

“그럼 쿠션 놓고 날 안고 있을래?”

“쿠션을 끌어안고 있는 걸 좋아합니다, 폐하.”

라틸이 가자미눈을 하고 째려보자, 타시르는 웃더니 쿠션을 놓고 라틸의 옆으로 다가와 정말로 꼭 안아주었다.

진짜 올 줄 몰랐던 라틸은 그 바람에 반사적으로 굳었지만, 마음은 반대로 물렁물렁해졌다.


“타시르.”

“네, 폐하.”

“로드에 대해 나쁜 말이 많은데. 난 세계 정복엔 관심이 없다.”

“왜요?”

“왜 아쉬운 목소리야?”

“정복 군주 같은 것도 멋지지 않습니까?”

“멋지지. 하지만 이미 타리움 영토는 카리센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넓잖아. 난 이대로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 타리움 국민들이 그런 전쟁 같은 데 안 휩쓸리고, 자기들 삶을 살게 하고 싶어.”

“제가 폐하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도울 겁니다.”

타시르가 라틸의 손을 자기 손으로 꼭 쥐고 속삭였다.

라틸은 또 심장이 울렁거리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뭐야 얘.

* * *

칼라인의 시종 데먼은 하품하면서 방 안에 들어왔다가 막 목욕하고 나오는 칼라인을 발견하고 인사했다.


“이제 오셨군요. 폐하께서 찾으셨는데.”

“주인이?”

“네. 그…… 사실대로 말씀드렸다가 또 그 미친, 아니, 하여튼 그자가 뭘 어떻게 할지 몰라서 그냥 잠깐 나가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칼라인이 한숨을 내쉬자, 데먼은 얼른 위로했다.


“그런 자랑은 그냥 상대를 안 하는 게 낫습니다, 단장님. 괜히 머리 써봐야 손해라니까요.”

하지만 칼라인은 데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건을 툭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어? 어디 가십니까?”

“게스타한테.”

“예? 또요?”

코앞에서 문이 닫히려 하자, 데먼은 뜨악해 따라가며 애원했다.


“그냥 엮이지 마시라니까요.”

하지만 칼라인은 그대로 걸어갔고, 결국 데먼은 게스타의 방 앞까지 따라가야 했다.

그래도 초조해서 입술을 씹고 있으려니, 게스타의 시종 트리가 문 앞에 나와 뚱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게스타는?”

“안에 계십니다.”

칼라인이 게스타에게 알리고 뭐고 할 것도 없이 문을 열어버리자, 트리는 기겁해서 외쳤다.


“칼라인 님!”

그러나 칼라인은 이미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쭉 걸어가는 건 아니었다.

칼라인은 첫 번째 입구에는 게스타가 여우굴을 못 만드는 걸 알았다. 다른 사람도 빠질 수 있으니까. 혹은 빠지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볼 테니까. 그래서 첫 번째 입구는 그냥 평범하게 걸어갔다.

게스타가 여우굴을 만든다면 자기 침실 안쪽, 두 번째 문 앞.

칼라인은 이 때문에 첫 번째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와 달리, 두 번째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는 발을 바로 땅에 딛지 않고 띄운 채 앞을 보았다.

게스타는 문과 바로 마주하는 창틀에 앉아 한 손에는 책을 든 채 있다가, 칼라인과 눈이 마주치자 아쉽다는 듯 웃었다.

칼라인은 그를 노려보며 문을 완전히 닫았다.

게스타는 칼라인과 방 안에 단둘만 남게 되자 친절한 척 말을 걸었다.


“여행길은 즐거웠어요……?”

누가 보면 칼라인에게 장거리 이동 특실 배표라도 끊어준 말투였다.

그러나 낚여서 또 화를 내는 대신, 칼라인은 덤덤하게 말했다.


“주인은 그 해부 이야기를 농담으로 들으셨다.”

“그런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 바다에 떨어뜨리지 않았잖아요.”

“앞으론 네 더러운 성질머리를 폭로하지 않을 테니 이쯤에서 그만둬. 한 번만 더 그런 짓을 하면.”

그러다가 칼라인은 갑자기 말을 뚝 끊고서 게스타를 보았다.

그러자 평소와 비슷한 표정인 듯하면서도 보는 사람이 귀신을 마주한 것처럼 오싹한 느낌을 받게 하는 눈빛이었다.

게스타는 픽 웃고서 책을 덮었다.


“그럼요.”

사실 게스타도 이쯤에서 멈출 생각이긴 했다. 칼라인과 ‘진짜’로 싸워봐야 둘 다 손해란 걸 알고 있으니까.


“다행이군.”

칼라인은 짧게 말하고서, 더는 볼일도 없다는 듯 그대로 나가버렸다.

데먼은 칼라인이 그대로 나오자 안도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또 어디 사막에 가신 줄 알았습니다. 늪이나요.”

그런데 칼라인이 자기 방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뜻밖에도 선 황후 행렬이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칼라인이 의아해서 멈춰 서서 쳐다보자, 선 황후는 그의 곁으로 오더니, 비밀을 공유한 사람만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자네를 찾아왔는데. 마침 나와 있군. 잠시 이야기 좀 할까?”

“예.”

선 황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먼이 얼른 먼저 뛰어가 방문을 열었다.

칼라인은 내색하진 않았으나 조금 긴장해서 선 황후를 따라 방 안에 들어갔다.

도미스는 고아였기에 칼라인, 도미스와 있을 때의 칼라인은 그녀의 부모님에 대해선 신경 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선 황후는 라틸이 사랑하는 어머니이기에 덩달아 좀 긴장되는 것이다.

칼라인이 들어오자 선 황후는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이야기가 길진 않을 거야.”

“예. 마실 건…….”

“생략하지.”

칼라인은 라틸의 성격이 도미스보다는 확실히 선 황후 쪽에 가까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게.

하지만 칼라인은 내색하지 않고 선 황후의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선 황후는 그가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라틸이 자네를 싫어하진 않아.”

“!”

“확실해. 내 딸 표정은 내가 잘 알지.”

“정말입니까?”

“그런데 뭘 좀 찝찝해하는 눈치던데.”

“!”

“그게 뭘까. 자네는 아나? 나는 모르겠거든. 두 사람 일이니까.”

칼라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선 황후는 그 변화를 지켜보다가 일어섰다.


“자네는 아는 모양이니 다행이야. 생각해보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자네를 밀어줄 생각이라.”

그러고는 선 황후가 바로 나가버리자, 데먼이 그녀를 배웅하러 나갔다 들어오며 혀를 내둘렀다.


“진짜 빨리 가버리시네요.”

그러다 데먼은 칼라인의 어두운 표정을 뒤늦게 발견했다.


“단장님? 아니, 그 짧은 시간 안에 무슨 대화를 나누셨길래 단장 표정이……?”

하지만 칼라인은 이야기를 할 기분이 아니어서 손을 내저어 데먼을 내보냈다.

방 안에 혼자 남게 되자, 칼라인은 고개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칼라인은 라틸이 ‘찝찝해하는 것’에 대해 듣자 무얼 말하는지 바로 깨달았다. 아마 도미스와 그가 사랑했던 것 때문일 거다.

도미스와 라틸은 분명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만, 라틸은 도미스를 사랑한 칼라인의 마음을 아무래도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받아들이진 못하는 눈치였다.

칼라인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에게는 도미스와 라틸이 한 사람이라, 그는 라틸이 신경 쓰는 그 지점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칼라인이 소파에 앉아 눈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있자니, 커튼 뒤에서 픽 웃는 소리가 났다.

그쪽으로 걸어간 칼라인이 커튼을 휙 들추자, 역시나. 커튼 뒤에 게스타가 서 있었다.


“네가 여긴 왜 온 거지.”

그 꼴을 본 칼라인은 놀라지도 않고 물었다.

게스타는 대답 대신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칼라인 님은 도미스를 사랑하는 거고, 저는 라트라실을 사랑하는 거지요. 폐하 눈엔 이 차이가 잘 보이는 모양이네요.”

칼라인의 얼굴이 섬뜩해지자 게스타는 얼른 사라졌다.

그새 텅 비어버린 커튼이 손안에서 부드럽게 떨어지자, 칼라인은 소파 등받이를 쾅 소리가 나게 내려쳤다.

* * *

며칠 뒤.

라틸이 평소처럼 업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비서가 안으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무슨 추태야.”

그걸 본 시종장이 꾸짖었으나, 비서는 “죄송합니다.” 하고 꾸벅 인사하고는 다시 라틸을 보았다.

라틸이 말해보라 손짓하자, 비서는 얼른 무릎을 꿇으며 보고했다.


“폐하. 카리센에서, 카리센에서 보낸 사절단이 오고 있답니다.”

시종장의 표정이 굳었다.


“카리센에서 왜?”

일전의 좀비 사건으로 카리센과 타리움의 사이는 굉장히 나빠져 있었다.

서로 창칼을 들이밀진 않았으나, 대화가 단절되는 바람에 중간에서 다른 나라들이 눈치를 볼 정도였다.

그런데 카리센에서 사절을 보냈다고 하니 좋은 짐작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반면 라틸은 태연하게 웃었다.


‘드디어 왔구나. 다가 공작이 대신관을 초빙하는 사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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