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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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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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는데요
2023.03.22.
라틸이 기르골을 찾아 계속 걸어가고 있는데, 뜻밖에도 그는 손님용 궁전 근처 길목에 보였다.
라틸은 반가워서 손을 들고 부르려다가, 기르골의 멱살을 잡고 있는 정원사를 발견하고 손을 도로 내렸다.
“!”
라틸은 눈이 커다래졌다. 뭐야. 저게 무슨 상황이야. 왜 기르골이 멱살 잡혀 있어?
“이 도둑놈! 꽃 도둑놈아! 너지? 네놈이지? 윌랑놈들이 오고부터 꽃이 사라졌어. 네놈이 확실해!”
“…….”
“그래, 네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거다. 응? 아주 이걸!”
다행히 정원사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라틸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그가 내뱉는 욕설은 전혀 다행이지 않았지만.
라틸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기르골은 웃는 얼굴로 멱살을 잡힌 채 가만히 있는데, 정원사가 그를 한 번 흔들 때마다 오히려 미소가 짙어지고 있었다. 독이 짙을수록 화려하다는 독버섯처럼.
‘으악!’
라틸은 더 보지 못하고 황급히 다가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냐.”
일부러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자, 정원사는 얼른 멱살을 놓고 허리를 숙였다.
“폐하.”
“무슨 일인데 대낮부터 멱살잡이냐.”
라틸이 다시 묻자, 정원사는 허리를 조금 펴더니 기르골 쪽을 매섭게 노려보며 설명했다.
“드디어 제가 꽃 도둑놈을 잡았습니다, 폐하. 이놈이 제 꽃을 훔쳐 간 범인입니다. 화원의 꽃은 모두 황실 예산으로 샀으니, 이놈은 황실 예산을 쥐어뜯는 도둑놈이기도 합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정원사는 손가락으로 기르골을 가리켰고, 라틸은 기겁해서 그 손가락을 도로 접어주었다. 이자가! 손가락 부러지려고!
“폐하?”
라틸의 배려를 알 리 없는 정원사가 당황해서 라틸을 불렀다.
라틸은 얼른 기르골의 어깨를 짚으며 설명했다.
“정원사. 이쪽은 곧 내 후궁이 될 사람이다.”
“예?”
“곧 내 후궁이 될 사람이라고. 멱살 잡고 흔들고, 도둑이라 욕하고. 그런 거 안 된다고.”
“하, 하지만…….”
“곧 황실 족보에 오를 테니 예의를 갖추어 대하라.”
라틸의 단호한 말에 정원사는 당황해서 기르골과 라틸을 번갈아 보았다.
“저 꽃 도둑놈이 후…….”
몹시 억울한 얼굴이었다. 사실 억울할 만도 했고.
그러나 곧 후궁이 된단 사람을 계속 꽃 도둑놈이라 할 수 없기에, 결국 정원사는 울상을 짓고 재차 라틸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라틸은 미안해졌다. 정원사가 미안할 게 뭐가 있겠는가. 이게 다 기르골 저놈이 꽃 도둑놈이라 그런 거지.
하지만 여기서 라틸이 기르골을 혼내면, 기르골은 머리에서 젠가가 툭 빠져나와서는 눈이 뒤집힐 뱀파이어였다.
아니, 라틸이 조금만 더 늦게 왔어도 정원사는 화원 어딘가에 사라진 꽃 대신 파묻혔을 확률이 높았다.
시무룩해진 정원사가 터덜터덜 걸어가자 라틸은 그제야 안도해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기르골은 실실 웃더니 기뻐서 물었다.
“내 편 들어준 거야, 아가씨? 날 지켜줬어?”
라틸은 너무 화가 나서 그의 뒤통수를 칠 뻔했다.
라틸이 노려보는데도 기르골은 눈이 희번덕해져서 자신의 가슴을 짚었다.
“감동받았어, 아가씨. 눈빛이 뜨겁네.”
“무슨 짓이야?”
“감사 인사를 하고 있어.”
“꽃. 꽃 말이다. 전엔 그래도 안 들키고 요령껏 뽑아가더니. 어쩌다 들킨 건데?”
‘감추려는 성의라도 좀 보여라.’
“온실 책임자가 그러더라고. 마음에 드는 꽃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몇 개는 밖으로 옮겨 심어야 해서 공간이 많이 남는대. 난 화원 꽃이 좋거든. 그래서 옮겨가려고 파는데 와서 저러더라.”
라틸은 목 뒤가 지끈거렸다. 저걸 말이라고!
“아니, 그럼 책임자한테 말해서 정식으로 옮겨 가야지!”
“그런가?”
“그래!”
“그럼 아가씨 말은…… 공사 책임자가 나한테 뭘 잘못 알려줬단 거야?”
이 뱀파이어 좀 봐. 절대로 자기 잘못은 없다네?
“책임자한테 이게 무슨 일이냐고 따질까, 아가씨? 내가 도둑놈 소리도 듣고. 지금 좀 상처받았어.”
기르골의 뻔뻔한 말에 기가 막혀서 혀를 차던 라틸은, 그가 책임자에게 찾아가겠단 소리에 식겁해서 미소 지었다.
“어휴, 마음 약한 소리. 그러지 마. 그대는 상처 안 받았어. 그댄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강해.”
기르골이 입술을 깨물었다. 웃긴 걸 참는 얼굴이어서, 라틸은 자신이 그에게 놀아났단 걸 알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젠장. 그래도 이제 황제인데. 몇천 살짜리 뱀파이어를 데려오니 황제인데도 내가 눈치를 보네. 몇만 살인가? 하긴, 무슨 상관이야. 천 살이나 만 살이나.’
그러다 라틸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근처 길에 누군가 우뚝 서 있었다.
라나문이.
라틸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렸다가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쟤는 왜 또 저기서 저렇게 보고 있지?
라나문은 라틸에게 축제 준비를 도와줄 비서를 붙여 달라고 오던 길이었으나, 라틸이 이를 알 리 없었다.
라틸은 그저 평소 오지 않던 길에 하필 라나문이 서 있자 당혹스러울 뿐.
심지어 라나문은 라틸이 자기 존재를 눈치채자 바로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라틸과 기르골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왜 저자가 여기에 있습니까, 폐하?”
평소보다 목소리가 배로 차가워져 있었다.
‘하필 여기서 라나문을 마주치냐…….’
라틸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니야. 괜찮을 거야. 라나문도 기르골이 여기에 머무르는 걸 알았잖아? 후궁 소문도 들었을 테고.’
그래도 가까스로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 했지만…….
“나도 곧 후궁이 될 거라서. 폐하와 우리 미래 계획을 얘기 중이었어.”
기르골이 웃으면서 한 말에, 라나문은 처음 듣는 표정으로 흠칫했다.
“후궁이라니요?”
라틸은 자신이 더 놀라 그를 보았다. 뭐야. 라나문은 기르골이 후궁이 되는 걸 아직 모르고 있었어? 어떻게?
기르골이 누구인지는 아는 눈치인데, 새 후궁이 되는 건 모르고 있었다고?
사람들이 새 후궁이라면서 기르골 이름을 언급하는 것 같았는데. 라나문은 정보가 느린가?
‘아니면…… 설마 라나문, 기르골 이름을 몰랐나?’
라틸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그 사이, 라나문은 차가운 눈으로 히죽히죽 웃고 있는 기르골을 보다가 다시 물었다.
“저자는 대적자의 스승인데 왜 후궁이 되는 겁니까.”
대답은 기르골이 했다.
“제자님과 나는 사랑을 하기로 했어.”
라나문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 대답을 듣다가, 라틸에게 평소보다 조금 더 다급하게 청했다.
“폐하. 저자에게 꿍꿍이가 있어 보입니다. 믿지 마십시오.”
라틸은 라나문이 대적자이고 기르골이 대적자들의 스승이며, 이들이 서로의 역할을 알고 있단 건 안다.
하지만 그 외 이 둘의 관계가 어떤지는 정확히 몰랐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절대로 좋은 사이는 아닌가 보다. 대적자와 스승이 왜 이러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말려야겠다 싶어서 라틸이 라나문을 달래려는 찰나.
기르골이 다정하게 웃더니, 라나문의 얼굴을 눈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예비 제자님은 질투가 심하네. 얼굴은 꽃 같고.”
목소리는 상냥했고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라틸은 그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뚝 떨어졌다.
‘꽃?’
기르골은 꽃을 먹는다. 즉, 기르골이 ‘얼굴이 꽃 같네’라는 걸 ‘뜯어먹을까’와 흡사한 발언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라틸은 황급히 기르골을 챙겨 그 자리를 떠났다.
“가자, 기르골. 라나문, 나중에 보자.”
기르골이 순순히 따라가자, 라나문은 그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게 보다가 헛웃음을 뱉었다.
카르둔은 라나문의 눈치를 보며 목을 움츠렸다. 이를 어째.
* * *
라틸은 라나문과 헤어져서 걸어가다가 기르골을 자기 방에 데려다준 다음, 집무실로 걸어가며 마음에 변화를 겪었다.
라나문이 기르골 정체를 갑작스럽게 알고 놀라는 걸 보니, 자칫 잘못하면 타시르와도 이런 꼴이 나겠다 싶어 걱정이 되었다.
그는 머리도 좋은데. 혼자서 이런저런 추측을 하다가, 나중에 진실을 급격히 알고 충격받는 거 아닐까?
결국 다음날.
라틸은 술을 조금 마신 다음, 굳게 다짐하고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타시르를 불렀다.
그러고서 먼저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들어왔다.
들어오다가 라틸을 보면서 묘하게 웃는데, 아무래도 눈치 빠르게 마음의 준비를 어느 정도 하고 온 듯했다.
라틸은 심호흡을 했다.
‘좋아. 말하는 거야. 어차피 한 번은 해야 했어.’
체할까 봐 일부러 음식도 소화되기 좋은 수프와 샐러드, 커피만 들이라 했다. 술도 마셨고. 하자.
‘정의감 넘치는 레안이라면 몰라도 타시르는 그런 타입은 아니잖아?’
굳게 다짐한 라틸은, 하녀들이 음식 차려놓고 나가자 차분하게 타시르를 바라보다가 그래도 한 번 먼저 운을 띄어 보았다.
“타시르. 먼저 물어볼 게 있다.”
“물어보시지요.”
라틸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늘 웃는 상의 얼굴. 마약상처럼 생겼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
뒤에서 어두운 짓을 하고 있을 것 같고 실제로도 그렇지만,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하는 사람.
그가 마차 폭발 때 자신을 감싸고 죽을 뻔한 일을, 힘없이 축 늘어지던 그 몸을 떠올리며 라틸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타시르. 너는 진실이 무엇이라도. 내가 어떤 사람이어도 내 편이 되겠느냐?”
“폐하의 사람이라 서명한 이상, 저는 폐하의 편일 수밖에 없습니다.”
타시르는 덤덤하게 대답했고, 라틸은 그가 사랑을 이유로 들지 않아서 차라리 안심했다.
그가 온갖 사탕발림을 하면서 ‘사랑하니까 폐하의 편’이라고 했다면 오히려 빈말 같았을 텐데. 그러지 않아서 차라리 나았다.
그래도 라틸이 입술을 달싹이자, 이번에는 타시르가 먼저 말했다.
“폐하. 저는 폐하와 한배를 타고 있습니다. ……역대 폐하들이라고 해서 늘 좋은 명령, 옳은 명령만 내리신 것도 아니고요. 아니, 사실 앞에서 처리하지 못할 명령이 대부분이었죠.”
“!”
“흑림은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 폐하의 망설임이 무엇이든, 저는 그걸 묻고, 품고 갈 겁니다.”
선황제의 이야기가 나오자 라틸의 눈동자가 떨렸다.
타시르는 그 눈동자를 보며 눈치챘다. 곧 말씀하시겠구나. 그 비밀이란 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길고 긴 여정이었다고.
타시르는 사실 라틸이 할 말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게스타는 마법사가 아니라 흑마법사일 것이고, 라틸은 어둠의 힘을 쓰는 데 거리낌이 없겠지.
칼라인 역시 일반 사람이라 하기엔 수상쩍은 면이 많으니, 어두운 종족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예상이 맞는다면 뱀파이어.
라틸이 타고 다니는 그 ‘거대하고 신성한 하얀 새’는 염색한 그리핀일 것이다.
라틸이 왜 이런 이야기를 못 했는지는 안다. 명색이 대적자인데, 이런 어둠의 힘을 쓴다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기겁하겠지.
심지어 곁에 신관들까지 두고 있으니.
그러나 타시르는 실용적이었다. 그는 라틸이 어둠의 힘을 사용하건 빛의 힘을 사용하건, 필요할 때 골라 쓰건 그리 개의치 않았다.
타시르는 속으로 즐겁게 생각했다. 폐하께서 비밀을 알려주면 어느 정도로 놀라는 게 좋을까.
아예 놀라지 말까? 아예 안 놀라면 폐하께서 오히려 더 서운해하시려나?
설마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의심하시려나?
그럼 그냥 놀라는 시늉을 할까? 그런데 놀라면 페하께서 불안해하시지 않을까?
그래, 조금만 놀라는 척하자. 타시르는 속으로 자신의 반응을 계산까지 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사실 내가 로드다.”
“풉!”
그러나 라틸이 정체를 털어놓는 순간. 타시르는 모든 계산을 잊고 입에 넣었던 커피를 도로 뱉어야 했다.
그는 황급히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멍하게 라틸을 쳐다보았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