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9화. 사람 마음을 다루긴 어려워 (319/367)


319화. 사람 마음을 다루긴 어려워
2023.03.19.


좋은 방법을 생각했으니 써먹어야 한다.

다음날. 라틸은 일을 하다가 시종장에게 막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사블레 후작. 라나문에게 국서가 할만한 일을 하나 맡겨보고 싶은데. 뭐가 있을까요?”

운만 띄어도 사블레 후작은 당장 두 팔을 걷어붙이고 아주 바쁜 일을 찾아올 게 뻔하다. 왜냐. 라나문 일이니까. 그는 라나문 편이니까.

역시나.


“라나문 님이요?”

라틸의 말에 반색한 사블레 후작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가더니, 40분 정도 뒤에 들어와 알렸다.


“축제나 연회 준비를 시켜보는 게 좋겠습니다. 예산 문제는 잠깐 임시로 건드리기 까다로우니까요.”

“곧 있을 축제가 뭡니까?”

“단풍 축제입니다.”

딱 좋네. 라틸은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고서, 점심 식사 때가 되자 직접 하렘으로 라나문을 찾아가 식사하며 이 이야기를 꺼냈다.


“라나문. 곧 있을 단풍 축제를 네가 개최해 봐.”

라나문은 당장 교본에 그려 넣어야 할 듯한 완벽한 자세로 식사를 하다가 조금 놀란 눈으로 라틸을 보았다.


“축제를요?”

“어. 보통은 국서가 하는 일인데. 아직 내겐 국서가 없으니까. 앞으로는 이런 일들도 한 명씩 돌아가면서 맡겨볼 거야.”

라나문의 시종인 카르둔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벌어졌으나, 라나문은 의외로 떨떠름해 보였다.

설마…… 그 귀찮음 많은 성격이 여기까지 발휘된 건 아니지? 라틸이 속으로 생각하고 있자니, 다행히 그건 아닌 듯 라나문은 순순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하렘 일은 타시르 그자에게 맡기신 줄 알았는데요.”

“단풍 축제는 나라 축제잖아. 하렘 축제가 아니고. 타시르에게 맡긴 건 하렘 내부 관리지. 국서는 그것들을 모두 다 맡아서 하는 거고.”

하지만 아마 대부분 일은 네가 맡아서 하게 될 거야, 라나문. 네가 대적자로서 열심히 활동하겠단 그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라틸은 속으로 음흉하게 웃으면서, 겉으로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굴려서 잘 시간도 없게 만들어주마.’

 
* * *

황제가 나간 뒤. 카르둔은 참지 못하고 만세를 불렀다.


“폐하께서는 라나문 님을 신뢰하시나 봐요!”

“…….”

“하렘을 관리하는 건 하렘 내에서만 아는 일이죠. 하지만 축제를 직접 개최하면 온 국민이 라나문 님의 업적을 알게 된다고요. 그럼 다들 라나문 님이 폐하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고 있단 것도 알 거예요.”

흐뭇하게 웃은 카르둔은 얼른 곁으로 와서 라틸이 놓고 간 서류를 보며 재촉했다.


“얼른 살펴보세요, 도련님. 네?”

“난 이런 건 해본 적이 없는데.”

“전에 게스타 님과 타시르 님이 연회 준비를 할 때 폐하 비서가 도와주었다고 들었어요. 도련님도 한번 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폐하께 말씀드려 보세요. 비서를 붙여주실 거예요.”

“그런가.”

평소보다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라나문이 서류를 집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더니 황제가 기특하다고 여겼나 보다. 바로 이런 중요한 일거리를 주다니.


‘이 일도 대적자로서의 일도 완벽하게 해내겠다. 그러면 폐하께서는 이것보다 더 내게 신경쓰시겠지.’

 

* * *

한편 저녁 무렵.

디제트에서부터 쉬지 않고 뛰고 뛴 칼라인은 가까스로 황궁에 돌아왔다.


“단장님. 대체 어디 가셨던 겁니까?”

칼라인은 웬만한 거리를 전속력으로 달리고서도 옷자락조차 구겨지지 않는다. 그런 칼라인이 완전히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자, 그의 시종인 데먼은 놀라서 물었다.


“여우굴. 디제트. 음흉한 자식.”

칼라인은 세 글자로 상황을 정리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데먼은 그것만으로도 바로 알아듣고서 “아.” 하고 탄식했다. 여우굴에 빠져서 디제트까지 갔다 오셨구나.

그러게 왜 게스타 님의 취미가 해부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하셔서는……. 칼라인이 황제에게 그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복수를 염려했던 데먼은 혀를 끌끌 찼다.

이후 30분 정도가 지나자, 칼라인이 목욕을 마치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다른 후궁들과 달리 스스로 몸을 닦고 옷을 챙겨 입은 칼라인은, 데먼에게 따라오란 말도 없이 게스타의 처소를 찾아갔다.

그놈의 멱살을 잡고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항의할 생각이었다.


“게스타는?”

“……안에 계시는데요.”

한껏 긴장한 트리를 쫓아내고서, 칼라인은 게스타의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았다.

그러고서 돌아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는 또 아래로 몸이 뚝 미끄러졌다.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동그란 미끄럼틀 같은 곳 안에서 칼라인은 이를 갈았다.


‘그 음흉한 여우 가면 자식. 내가 진짜 죽여버릴 거다.’

 

* * *



“칼라인은?”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친 라틸은 칼라인을 찾아갔다가 그가 아직도 없자 황당해서 데먼에게 물었다.

데먼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어디 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사라지셨어요.”

그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아는 게 있는 것도 같았다.

라틸은 더욱 화가 났다. 이거 놀러 간 거 아니야?


“어제도 없었잖아.”

“예.”

“오늘도 없고.”

“예…….”

“멀리 갔어?”

“아마 그리 멀리 가진 않으셨을 겁니다.”

아마 멀리 안 갔는데 뱀파이어 속도로 이틀이 넘게 걸린다고? 어마어마하게 먼 곳에 간 모양인데?

아니면 뱀파이어 속도로 돌아올 마음이 없을 만큼 재밌는 곳에 갔나? 혼자?


“폐하? 심부름꾼을 보내 볼까요?”

라틸이 입을 들썩거리고 있자니 데먼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아니, 괜찮다. 즐겁게 있나 보지. 짐이 괜히 끼어 방해할까 염려되는군.”

라틸은 됐다고 손을 내젓고서 돌아섰다.

* * *

데먼과 헤어진 라틸은 곧 칼라인에 대해 빠르게 잊었다.

타시르의 처소 근처를 지나가자, 이번에는 타시르 생각이 떠올라 마음이 갑갑해진 탓이다.


‘타시르에게 이것저것 얘기해 주겠다고 했는데…….’

왜 막상 말하려니 용기가 나지 않을까?

어느 순간은 용기가 턱 끝까지 치솟고, 고작 몇 마디 하는 거 하나도 어렵지 않다고 여겨지는데.

어느 순간이 오면 한때 타시르가 아버지의 명령으로 자신을 조사하기까지 한 게 떠올랐다.


‘날 선황의 암살자라 의도한 적도 있는 타시르인데. 내가 전부 다 얘기해주면 날 또 의심하게 되진 않을까?’

아직 선황의 암살자가 누구인지도 찾고 있는 도중 아니던가.


‘쉬운 선택은 적구나.’

물론 라틸만 이러진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고민할 거리가 많겠지.

어머니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좋은 가문 출신에 황태자비 시절을 거쳐 황후 자리에 오는 정통성 있는 황후였으나, 결국 치솟는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신전에 틀어박혀 버렸다.

한때 다른 귀족과 다른 바 없던 순수한 모습은 아낙차를, 아낙차를 따르는 귀족들을, 아낙차를 사랑하는 남편을 상대하면서 차츰차츰 변해갔다.


‘아! 맞아.’

그러다 라틸은 하렘을 나설 즈음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엄마는 나보다 연인 관계에 대해 잘 알 거야. 엄마한테 조언을 구하면 라나문 건은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틸은 그 길로 곧장 어머니가 지내고 있는 방으로 찾아갔다.

어머니는 방 안에서 차분하게 책을 읽다가, 라틸이 들어오자 웃으면서 맞아주었다.


“무슨 일이니?”

이미 아낙차를 제외한 선황제의 후궁들은 라틸이 관례에 따라 별궁에 흩어 보냈고, 다들 그곳에서 풍족한 돈을 받으며 즐겁게 지내고 있다.

어머니를 가장 괴롭게 했던 아낙차는 이미 실종되었고.

그 탓일까. 어머니는 예전에 여기에 머무를 때보다 표정이 훨씬 좋아져 있었다.


“같이 차 한 잔 마셔도 돼요?”

슬그머니 묻자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고 시녀에게 눈짓했다.

곁에서 같이 담소를 나누어주던 시녀 두 사람이 나가자, 어머니는 책을 옆에 내려놓고 편안하게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니? 이 시간에는 잘 안 오면서.”

“엄마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어요.”

“말해봐.”

“유혹하고 싶은 후궁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차분하게 앉아 있다가 라틸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변했다.


“유혹하고 싶은 후궁?”

“네.”

라틸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니는 웃음을 터트렸다.


“유혹은 후궁들이 해야지, 라틸. 네가 하는 게 아니라. 너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마음이 끌리는 이를 사랑해주면 되는 거란다.”

어머니의 표정은 후련한 것 같기도 서글픈 것 같기도 했다.

라틸은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후궁이기 때문에, 내가 황제이기 때문에 유혹만 받는 게 아니라. 정말 진심을 얻고 싶은 후궁이 하나 있어요.”

“진심을? ……설마, 라틸? 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니?”

어머니의 오해에 라틸은 ‘아니요’라고 빠르게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진실을 삼켰다.

어머니는 라틸이 로드라는 걸 몰랐다. 상대가 대적자라서, 편안한 삶을 위해 그의 진심을 노리고 있단 설명은 할 수 없었다.

라틸이 오해를 방치하자, 어머니의 입가에 재밌어하는 미소가 걸렸다.


“누구일까, 내 딸의 마음을 사로잡는 남자가.”

‘목숨줄이요.’

“칼라인이니?”

라틸이 대답하지 않자, 어머니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구나. 엄마가 보기엔 제일 괜찮던데.”

라틸은 머쓱하게 웃었다.

사실 첫인상에 끌렸던 이를 꼽으라면 아마 칼라인이 맞을 거다.

라틸은 그의 치명적이고 색정적인 아름다움에 처음 봤을 때부터 강하게 흔들렸다.

그가 ‘주인’하고 부를 때면 부끄러우면서도 심장이 울렁거렸다.

칼라인이 사랑하는 도미스란 여자가 누구일까 생각하면 마음이 좀 아프기도 했다. 어쩌면 라틸은 하이신스 다음으로 그를 사랑하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도미스가 자신인 걸 알게 되자, 안심이 되는 한편 그 마음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가 사랑하는 도미스가 자신과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가 사랑하는 건 도미스이지 자신이 아니란 생각도 계속해서 들었다.

뭔가 투명하지만 두꺼운 벽이 생긴 느낌이랄까.

어머니는 라틸의 그 애매모호한 표정을 눈여겨보았으나, 라틸이 다시 자신을 보자 얼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는 아빠랑 정략결혼을 한 거라. 어떻게 유혹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처음엔 그냥 좋게 지냈지. 사랑은 나중에. 레안이 태어난 뒤로 했단다.”

“!”

“내 아이를 함께 만든 사람이니까.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아이에게서 네 아빠의 모습이 보이니까, 그때부터 사랑하게 됐지.”

“아…….”

라틸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라나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부터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라틸은 보는 어머니의 눈동자가 따뜻해졌다.


“너는 내가 네 아빠를 사랑하게 된 다음 태어난 아이란다, 라틸.”

“그렇군요…… 감동적이네요.”

근데 도움을 별로 안 되네요. 라틸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다. 어떻게 해야 라나문의 마음을 차지할 수 있을까.


‘게다가 기르골. 기르골의 시선도 붙잡아 두어야 하잖아. 라나문이 날 사랑하게 하면서 기르골의 시선까지 잡아야 해. 젠장. 이게 가능해?’

시녀가 가져온 차를 몇 모금 만에 후루룩 마신 라틸은 얼른 일어섰다.


“벌써 가려고?”

“네. 일이 많아서요.”

‘생각난 김에 기르골한테도 가봐야겠어. 온실은 아직 공사 중인데. 기르골은 지금 뭐 하고 지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