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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화. 무엄해 (317/367)


317화. 무엄해
2023.03.12.


도미스가 궁전을 벗어나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다.

라틸의 의식이 돌아왔을 때, 주위는 이미 어둑어둑했다. 희미한 등불 몇 개가 둥그렇게 이 주위에만 빛을 조금 주고 있을 뿐.

도미스는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 앞에는 믹스가 두려운 얼굴로 서 있었다.


“누구의 것이 될 건지 골라.”

이게 무슨 상황일까, 생각하고 있자니 입이 열리며 도미스가 말했다.

예전의 소심하고 상냥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사람이 바뀐 것처럼 서늘하고 차가워진 목소리였다.


‘각성하면 이렇게 되는 건가.’

라틸은 착잡해졌다. 이건 과거이지만 동시에 미래일지도 모를 일 아닌가.

하지만 라틸이 아무리 착잡하다 한들, 눈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믹스만큼은 아닐 것이다.

당황하면서도 두려운 얼굴…….

하긴. 그럴 것이다. 동정심에 도미스가 탈출하는 걸 도왔는데, 갑자기 일생을 걸고 선택까지 하게 되었으니.

게다가 여기서 ‘전 돌아갈게요.’라고 한다 해서 도미스가 ‘잘 가 안녕’하고 시원스레 보내줄지 말지도 모르는 상황 아닌가.

한참 만에야 믹스는 어렵게 입을 뗐다.


“함께…… 갈게.”

말이 끝나자마자 도미스가 믹스를 확 낚아채어 가더니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피 냄새와 맛이 그대로 전해져서 라틸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연신 ‘에퉤퉤 에퉤퉤’ 입안에 들이찬 피를 뱉으려 애썼다.

하지만 도미스의 기억 속에서 라틸에겐 통제권이 없었다. 결국 피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끔찍한 감각이 그대로 전해진 후에야 도미스는 그를 놓아주었다.

도미스가 믹스에게서 손을 떼자, 그는 흐르듯 풀썩 떨어졌다.


‘피 마시는 건 체험시켜주지 않아도 돼, 도미스!’

라틸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이건 쌍방향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게 아닌 상황이었다.

도미스는 이제 칼라인을 보고 있었다.

칼라인은 등불 하나를 들고 도미스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도미스가 자신에게 관심을 주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에이몬스 왕궁에서 소란을 피웠으니 추적자들이 붙을 거다. 왕이 정신을 차리고 나면 우리를 쫓으려 하겠지. 우선 클레렌드 대공저로 가자.”

“…….”

도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기만 했으나, 라틸은 도미스가 칼라인을 보자 심장이 울렁거리기 시작한 걸 알았다.

도미스는 칼라인의 얼굴에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차갑게 물었다.


“날 계속 따라올 거야?”

칼라인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을.”

긍정적인 대답인데. 도미스는 그 소리를 듣자 입꼬리를 올리며 속삭였다.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이리저리 잘 붙어 다니네, 칼라인?”

세 살짜리 아이가 들어도 조롱인 말에 칼라인의 표정이 굳었다.

아까 피를 빨려 기절했던 믹스조차 슬그머니 소리 없이 일어나며 이쪽 눈치를 살폈다.

그럴 만도 했다. 도미스와 칼라인 사이의 분위기는 잘 갈아둔 칼날 같았다.

바스러지기 직전의 모래처럼 부서진 칼라인의 표정을 물끄러미 보던 도미스는 한 번 더 그를 공격했다.


“내가 로드이기 때문에 따라오려는 거지, 넌?”

라틸은 도미스가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상처를 받는 걸 느끼고서 덩달아 괴로워졌다.


“도미스, 나는…….”

“주인이라 불러라. 무엄해.”

“!”

애정을 철저하게 감춘 도미스의 말에 칼라인의 표정이 무너졌다.

도미스는 그 표정을 똑바로 바라보다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아마도 믹스로 추정되는 이가 조심조심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 뒤로 좀 더 은밀하고 조용한 걸음이 따라붙었다.

도미스의 발걸음은 고용했고 심장은 느리게 뛰었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요란하게 꿈틀댔다.

라틸은 그 낯설고 두려운 기억 속에서 기르골을 찾았다.


‘기르골은 안 따라왔나? 어딨지?’

 

* * *

배에 얹어진 무게를 느끼며 라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진짜 클라인…… 잠버릇.’

한숨을 내쉰 라틸을 툴툴거리면서 옆을 보았다가 흠칫했다.

클라인은 깨어 있었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라틸을 물끄러미 보고 있기까지 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더니, 라틸의 배에 얹어둔 팔에 힘을 주어 자신에게 끌어당기며 물었다.


“잘 주무셨습니까?”

“가위에 눌렸다.”

“제가 옆에 있으니 긴장하셨군요.”

아니, 네 팔 때문에 그렇다라고 말하려던 라틸은 이어진 클라인의 말에 할 말이 사라졌다.


“사실 저도 가위에 눌렸습니다. 빨강 머리 여자가 침대 끄트머리에서 자꾸 쳐다보고 있었어요.”

“!”

 

* * *

꼬박 이틀에 걸쳐 다가 공작을 재조립한 게스타는 무거운 목덜미를 문지르며 여우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굴 밖으로 나와 카펫에 한 발을 디디면서 보니, 라틸이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게스타는 다리에 힘이 빠져 순간 휘청하고 말았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는 사이. 이쪽 기척을 느꼈는지 라틸이 신문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보았다.

게스타는 자신이 도착지점을 잘못 찾은 줄 알았다. 하지만 카펫이나 침대, 라틸이 앉은 소파 모두 그의 방과 같았다.


“폐, 폐하.”

게스타가 주저하며 중얼거리자, 라틸이 친근하게 웃더니 신문을 접어 옆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해부 다 하고 왔어?”

쑥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다가가던 게스타는 해부 소리에 심장이 철렁해서 라틸을 쳐다보았다.


“네?”

“칼라인이 그러던데. 네가 다가 공작 해부하러 갔다고.”

“!”

“취미라며.”

의식 너머로 여우 가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게스타는 분노로 떨리는 손가락을 감추기 위해 자연스럽게 등 뒤로 손을 보냈다.


“아, 아니에요.”

더듬더듬 해명한 게스타는 라틸의 표정을 살피고서 중얼거렸다.


“시간이 부족해서…… 다가 공작 건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해서 보고 온 거예요……. 해부하고 그런 게 아닌데…….”

게스타의 눈가가 빨개지자 라틸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당연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 안 해. 칼라인이 아마 농담한다고 그렇게 말했겠지.”

게스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놓으면서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칼라인 님은…… 제가 폐하께 칼라인 님보다 더 도움 되는 게 싫으신가 봐요……. 표현을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눈물이 차오르는가 싶더니 결국 주룩 흘러내리자, 라틸은 얼른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쓸어주었다.


“울지마. 남이 뭐라 한다고 네가 울 필요 없어.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나쁜 거지 네 문제가 아니잖아.”

“네…….”

너무 오래 울면 라틸이 질려 할까 봐, 게스타는 더 울지 않고 라틸이 이끄는 대로 소파로 가 앉았다.

라틸은 주전자에서 직접 따뜻한 차를 따라 건네주며 물었다.


“그럼 이제 다가 공작에 관한 처리는 다 된 거야?”

게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다가 공작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꼭두각시가 됐어요.”

라틸의 눈이 기쁨에 반짝였다.

하이신스에게 상처를 주고, 그로 인해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클라인을 죽이려 하고, 누명까지 덮어씌우려 한 그 인간에게 드디어 본때를 보여줄 수 있단 생각만으로도 통쾌해졌다.


“무슨 명령을 하고 싶으세요, 폐하……?”

“아, 그런데 게스타. 혹시 티가 나진 않을까?”

“티요?”

“다가 공작 상태가 이상해 보인다거나. 그런 식으로.”

“제가 그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들었다고 해서 의식이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보통 꼭두각시가 된 식시귀들은 자기들이 꼭두각시란 걸 잘 의식하지도 못해요.”

“정말이야?”

“네.”

라틸은 다가 공작이 자신을 보며 왕다람쥐라고 하던 걸 떠올렸다.

하긴. 그때도 자신이 왕다람쥐가 아니니까 ‘이 인간 미쳤나?’ 싶었지, 다가 공작 본인의 행동이나 태도만 떼어놓고 본다면 어설픈 구석은 없었다.


“좋아. 그러면 음…… 아, 하이신스. 다가 공작이 이렇게 명령하게 해. ‘하이신스 폐하 상태를 더 두고 볼 수 없으니, 타리움에서 대신관을 초빙하고 싶다’고.”

“네.”

“그리고 또…… 어, 그래. 자기가 자존심 때문에 괜한 욕심을 부려서 폐하께 폐를 끼쳤다고 사과하라 해.”

“네에…….”

“나한테도 사과하라 해. 클라인한테도. 그리고 세 번 머리를 박고서 나는 멍청이입니다를 외치라고…….”

“폐, 폐하.”

“어?”

“그건 너무 티가 나요…….”

라틸은 큼큼 헛기침을 했다.

하긴. 다가 공작 성격에 갑자기 온갖 데 사과하고 다니면, 아무리 자연스럽게 행동해도 이상하게 보이겠지.


“그럼 사과 부분은 빼.”

“네. 아낙차 님은 어떻게 할까요?”

“아낙차? 아아, 아낙차가 다가 공작 곁에 있지.”

아낙차뿐만 아니라 틀라 황자도 있을 것이다.

라틸은 턱을 괴고서 생각하다 지시했다.


“평소처럼 대하되, 자기 몸, 그러니까 다가 공작 몸 말이야. 거기엔 손대게 하진 말라 해. 그 치료란 것도 거절하라 하고.”

 

* * *



“하이신스 폐하 상태를 더 두고 보기 어렵군. 타리움에서 대신관을 초빙해야겠네.”

간만에 상태가 괜찮아진 다가 공작이 참석한 간만의 첫 회의였다.

다가 공작이 뱉은 첫 말에 그의 일파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이니는 가장 상석에 앉아 있다가, 역시 놀라서 아버지를 보았다. 하이신스를 치료하려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하는 게 놀라서였다. 왜 갑자기?


“공작님,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에 다가 공작의 측근 백작 하나가 떨떠름해 대놓고 묻고 말았다.

다가 공작 패거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몸 상태가 나쁘다면서 제대로 궁전에 오지 못하고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던 다가 공작은, 부쩍 상태가 좋아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람들 앞에서 케이크도 조금 먹고 차도 마셨다.

아이니는 그 모습을 안도해 바라보며, 아낙차의 치료가 점차 효과를 보고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몸 상태가 멀쩡해지자마자 이전의 자신과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다니?


“왜라니. 당연한 일을 하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우리 황제 폐하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데 언제까지 방치한단 거지?”

다가 공작의 말에 하이신스 황제 일파까지 영문을 몰라 떨떠름해졌다.

혹시 함정인가? 일부러 편을 드는 척 저렇게 해놓고 막판에 뒤집으려는 건가?

* * *

회의가 끝난 뒤, 아이니는 본궁에서 뚝 떨어진 작은 별원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본궁과 거리를 둔 지하실이 딸린 2층짜리 건물로, 현재 그곳에서 지내는 건 아낙차와 틀라 황자뿐이었다.

아이니와 본인들, 사흘에 한 번씩 청소하러 오는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아무도 그곳에 갈 수 없었다.

아낙차는 안경을 끼고 두꺼운 책을 한 손에 든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아이니가 나타나자 웃으면서 책을 내려놓았다.


“황후 폐하 아니십니까.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버지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다.”

“다가 공작님이요?”

“아버지가 며칠 전에 호위들을 몇십 명이나 죽였지.”

“네, 말씀해주셨잖아요. 하지만 그 후로 상태가 갑자기 부쩍 좋아지셨지요. 어쩌면 공작님은 제대로 뭘 먹지 못해서 이전엔 시름시름 앓았던 걸지도 모르겠군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오늘은 갑자기 하이신스 폐하를 치료하겠다며 대신관을 불러오라 하셨다.”

아이니의 말에 아낙차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정말인가요?”

“그래. 식시귀가 되기 전과 말이 완전히 바뀐 게 이상해. 한 번 살펴보아라.”

“예.”

아낙차는 아이니의 명령을 듣자마자 다가 공작저를 찾아가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저녁 무렵 나타난 다가 공작은 아낙차가 다가오려 하자, 손을 들어 막고는 할 말이 없다고 물려버렸다.

다음 날 아침에도 마찬가지.

그 냉대를 겪은 아낙차는 며칠 전, 다가 공작이 한 말을 떠올리고 곧장 아이니를 찾아가 말했다.


“최근에 다가 공작님께서 저보다 훨씬 실력 좋은 흑마법사를 만난 적이 있다 하셨습니다. 절 무르고 그 사람에게 공작님 치료를 맡기고 싶다 하셨어요.”

“훨씬 실력 좋은 사람? 그럼 좋은 일 아닌가?”

“아니요. 제가 보니, 그 흑마법사가 다가 공작님을 자기 꼭두각시로 만들어 조종하는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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