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6화. 벽을 부수고 직진하는 타입 (316/367)


316화. 벽을 부수고 직진하는 타입
2023.03.08.


라나문은 의아한 눈으로 시종장을 보다가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시종장은 다급히 소파에 앉았다. 라나문은 이어 카르둔을 불러 차를 가져오라 하려 했지만, 시종장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지금 뭘 마시러 온 게 아닙니다, 라나문 님.”

라나문은 카르둔에게 나가 있으란 눈짓을 보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보시지요.”

시종장은 초조하게 있다가, 카르둔이 문을 닫고 나가자 재빨리 입을 열었다.


“라나문 님. 라나문 님은 공신의 아들에다 최고 명문가의 후계자입니다.”

당연한 소리에 라나문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렇지요.”

“그뿐입니까. 거기에 대적자란 게 밝혀졌습니다. 심지어 타리움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란 소리까지 듣고 있지요.”

이번에는 사실에 근접해도 부끄러울 만한 소리였으나, 라나문은 역시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왜냐. 사실이니까.

시종장은 그 당당한 모습을 보며 아이구 아이구 한숨을 내쉬었다.


“라나문 님께 부족한 걸 찾는 게 더 힘들 겁니다. 그런데 대체 뭐가 부족해서 이 모든 걸 가지고 밀리고 계십니까?”

“내가 밀린다고?”

“폐하께 총애를 못 받고 계시잖습니까. 폐하께서 돌아가면서 두 달씩 후궁들이 하렘을 책임지도록 하겠다 하셨습니다. 국서 역할을 한 번씩 맡겨 보시겠단 거지요. 그 첫 번째 책임자로 타시르 님을 골랐습니다. 말이 됩니까?”

라나문이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화날 정도는 아니지만 불쾌하게 여기긴 하는 듯했다.

시종장은 자기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라나문 님 조건을 가지고선 밀리는 게 더 힘들 겁니다. 그런데 밀리고 계세요. 그뿐입니까. 가십 잡지에서 매달 후궁들을 두고 투표를 하는데요, 초반에는 늘 1, 2위를 다투던 분이 지금은 막 뒤로 밀렸다 올라왔다 그러십니다.”

“내가?”

라나문의 표정에 좀 더 불쾌감이 또렷해졌다


“예! 라나문 님이요!”

시종장은 단호하게 말하고서, 라나문이 알고 싶어하지 않을 과한 정보까지 덧붙여주었다.


“최근 1위는 인어였고, 2위는 아직 얼굴도 이름도 공개되지 않은, 아니, 아예 들어오지도 않은 후궁 기르골입니다!”

자극한 효과가 있었나. 라나문의 표정이 굳었다.

시종장은 조심스레 권했다.


“차라리 술에 취한 척 폐하를 찾아가보시면 어떻겠습니까? 폐하께서 최소한 내치진 않으실 겁니다. 술 깨는 약이라도 주시겠지요.”

“나는 술을 마시면 바로 잠듭니다.”

“아이고.”

시종장은 한탄했으나, 여기서 별다른 방법이 나올 것 같진 않자 마지못해 일어서며 충고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 * *

이어 타시르를 찾아간 시종장은 라틸의 지시를 제대로 전해주었다.


“폐하께서 후궁들께서 번갈아 가며 하렘 책임자 역할을 해보라 하십니다. 그 첫 번째 책임자로 발탁하신 게 타시르 님이고요. 원래는 국서가 하는 일이지만, 아직 국서께서 안 계시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지요.”

마음은 라나문에게 있었으나 시종장은 타시르를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라나문이 국서가 되길 바랄 뿐 타시르를 좋게 평가하기도 했고.

그가 차분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알려주자, 타시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번갈아 한다면 몇 주? 몇 달? 얼마큼 하는 겁니까?”

“폐하께선 두 달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혹시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바로 제게 말씀하시면 돕겠습니다.”

시종장의 친절한 설명에 타시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장은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갔다.

시종장이 나가자, 벽에 붙어 서 있던 히얼란이 눈이 커다래져서 타시르에게 달려왔다.


“소단주님, 소단주님, 이거…… 이건……!”

몹시 흥분한 걸 보니, 이 일은 라틸이 타시르를 가장 신뢰한다는 간접적인 신호로 해석한 듯했다.


“흥분하지 마.”

타시르는 웃으면서 히얼란을 흘기고는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그냥 차례대로 보는 것뿐이니까. 모두가 얻는 기회야. 그러니 더 잘해야 하지만.”

“그래도요! 제일 처음 타시르 님을 고르시다니……!”

감격에 겨운 히얼란을 내버려 두고서 타시르는 시종장이 아까 가져다준 파일첩을 훑어보았다.

하렘 내에서 쓰이는 물건과 돈, 귀중품, 예산 등이 적혀 있는 장부와 계획안 등이었다.

고용인들에 관한 내용도 세세하게 다 나와 있어서, 타시르는 신중하게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그런데 30분 정도 꼼짝도 하지 않고 관련 서류를 훑어보고 있을 때였다. 문밖에서 “타시르 님. 라나문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는 소리가 났다.

그 말에 곁에서 같이 서류를 보던 히얼란이 재빨리 물었다.


“숨길까요?”

타시르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괜찮다 말하고서 문을 열어주란 눈짓을 했다. 히얼란은 얼른 문가로 다가가 문을 열어주었다.

타시르는 그제야 서류를 책상 위에 놓고서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라나문 님 아니십니까.”

빙그레 웃으면서 부르자, 라나문은 고개를 까딱이고 들어오다가 탁자에 흩어진 서류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이게 뭐냐고 묻지는 않는다.

그 반응을 본 타시르는 시종장이 자신에게 오기 전 라나문에게 다녀갔단 걸 알아차렸다.

시종장이 라나문을 지지하는 건 비밀도 아니니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좋은 날에 좋은 얼굴을 보니 정말 좋네요.”

타시르는 라나문의 반응을 모른 척하고서, 얼른 곁으로 다가가 슬그머니 팔짱을 끼며 웃었다.

라나문은 눈썹을 움찔했지만 뿌리치는 대신 소파로 걸어가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전에 클라인이 널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했지.”

“그랬지요. 라나문 님은 상관없다 하셨고요.”

타시르는 맞은편에 앉아 서류를 모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상관이 생기신 모양입니다?”

“…….”

라나문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불쾌감이 어렸다. 그 떠보는 미소가 불쾌했다.

평소라면 그런 감정을 느끼자마자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라나문은 인정해야 했다. 이 상인은 황제에게 사랑을 얻진 못할지언정 신뢰는 얻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황제에게 그 어떤 것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눈앞에 있을 때 황제의 시선을 붙들어두는 것 외엔.

그에겐 타시르 같은 이가 필요했다. 라나문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쥔 저울. 내 쪽에 추를 실으려면 뭘 하면 되지?”

 

 

* * *

라나문이 타시르를 찾아가고 두 남자가 날카롭게 머리를 굴리며 긴박한 눈치 싸움을 벌이는 그 시각.

클라인은 그런 것 없이 라틸에게 돌진했다.


“폐하!”

라틸은 단정한 차림의 집무실 사람들과 대비되는 번쩍번쩍한 차림의 클라인이 나타나자 순간 눈이 부셨다. 그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그의 옷에 알알이 박힌 보석에서 나온 광채 때문에.

라틸이 손을 내렸을 땐 클라인이 책상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클라인.”

라틸이 얼이 빠져 이름을 부르자, 클라인은 해맑게 웃으면서 물었다.


“폐하의 방에서 폐하를 기다려도 괜찮을까요?”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야? 라틸은 입을 쩍 벌렸다. 물론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복도에서 기다릴 때보단 장족의 발전이긴 했지만…….


“어…….”

“고맙습니다!”

아니, 허락한 게 아닌데.

라틸이 생각하느라 말을 끄는 사이, 클라인이 휑하니 나가버리자 곁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비서가 작게 웃었다.

그러다 라틸이 쳐다보자, 비서는 사색이 되어 안 웃은 척 황급히 손을 놀렸다.

저게 보통 반응인데. 라틸은 신들린 듯 서류 정리에 몰두한 비서를 한 번, 클라인이 다녀간 자리를 한 번 보고서 짧게 웃었다.

그래도 귀엽긴 하다니까.

* * *

업무가 끝나기 전, 사람을 보내서 정말로 클라인이 자기 침실에 있는지 확인한 라틸은 비서에게 저녁도 2인분 방으로 보내라 지시했다.

그러고서 방으로 가다가, 그래도 나름 후궁인데 너무 건조한가 싶어 화원에 가서 꽃다발을 하나 만들었다.

꽃다발을 들고 침실 앞에 가보니 마침 그쪽으로도 음식을 실은 웨건이 도착해 있었다.

라틸은 일부러 몸을 옆으로 피하고서, 하인들에게 먼저 음식부터 방 안에 들이라 눈짓 몸짓으로 신호했다.

그들이 방 안에 들어서자, 라틸은 꽃다발을 들고 문 뒤에 몸을 숨긴 채 혼자 비실비실 웃었다.


“이 자식, 120벌을 갈아입고 간신히 고른 옷에 음료수를 쏟아?”

그 미소는 클라인의 고함을 듣자마자 한숨으로 변했지만.


“내가 이 디테일을 맞추기 위해서 자그마치 여섯 시간을-.”

클라인의 언성이 계속 흘러나올수록 문 앞에 선 클라인의 시종과 호위의 표정이 점점 파랗게 질렸다.

라틸은 결국 로맨틱한 분위기는 관두고 얼른 안으로 들어가 그에게 꽃다발부터 안겼다.


“폐하…….”

클라인은 라틸이 자기 고함 소리를 다 들었을 텐데도 아무렇지 않은지, 감동 받은 얼굴로 꽃을 안고 웃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앞뒤가 똑같기도 어려울 거야. 라틸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하인에게 얼른 나가라 손짓했다.


“폐하, 저자 때문에 제가 121번째로 갈아입은 옷이 이 꼴이 됐습니다. 이거 좀 보세요. 일부러 여기랑 여기는 접고 이쪽은 펴서 점잖으면서 야한 분위기를 내려 했는데 그냥 축축한 미역이 되어 버렸다고요!”

“네가 미역이 되어도 좋은걸.”

“폐하, 저 음식 나르는 하인이 너무 빤질빤질하게 생긴 거 아닙니까? 일부러 저렇게 실수를 해서 연약한 척 폐하 눈길을 잡아보려는 게 티가 납니다.”

“클라인.”

“제가 뭔 소리 했다고 슬픈 척 떨던 거 좀 보세요. 일부러 폐하 앞에서-.”

“클라인?”

“……네.”

“그 하인이 뭘 어쨌건 내 눈엔 다른 사람은 보이지도 않아. 그게 중요하지. 안 그래?”

“……진짭니까?”

“진짭니다.”

라틸이 그의 코끝에 자기 코끝을 가져다 대자, 클라인은 그제야 진정이 됐는지 귀가 붉어져서 꽃다발을 꼭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어제는 피곤하실 거 같아서. 일부러 안 오고 참았습니다. 하루 종일 참느라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예민해진 거 같습니다.”

평소랑 똑같던데 뭘. 라틸은 클라인의 욱하는 모습이 걱정되면서도 그런 모습이 귀엽긴 하다 보니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 * *

식사를 마치자마자 클라인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해서, 라틸은 결국 밖에서 대기 중인 바닐을 불러 물수건으로 그를 씻게 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폐하께서 카리센에 가신 후로 잠을 거의 못 주무셨어요. 거기서 황자님도 안 좋은 일을 겪었다 보니 진정을 못 하셔서…….”

바닐은 잠이 든 클라인의 옷 단추를 조금 풀어주고 손과 발과 목덜미, 얼굴 등을 물수건으로 닦으면서 수시로 대신 사과했다.


“괜찮아.”

라틸은 클라인이 제대로 못 자고 기다렸단 이야기를 들자 좀 안쓰러워져서, 천천히 씻기라 지시한 뒤 자신은 욕실에 들어가 씻고 나왔다.

잠옷 차림으로 나와 보니 바닐은 이미 물러갔고 클라인은 침대 한쪽에서 잘 자고 있었다.

옆으로 두 바퀴 굴려도 잘 자는 걸 보니 완전히 잠든 듯해서, 라틸도 옆자리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하지만 눕자마자 클라인이 다시 두 바퀴를 굴러와 라틸을 끌어안았다.


“!”

이 자식 이거 깬 거 아냐? 라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았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두 바퀴를 다시 굴리고서 살펴보니, 그냥 침대 중앙에 회귀 본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라틸은 그를 더 밀어내길 멈추고서 클라인의 팔을 끌어안고 가위에 눌렸다.

그러다 깨어나 보니 도미스의 과거 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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