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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화. 넌 편안히 있었잖아 (314/367)


314화. 넌 편안히 있었잖아
2023.03.01.



 
라틸은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겉옷을 벗고 장갑을 협탁에 내려놓았다.

의자에 앉아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긴 신발을 벗으려 끙끙대자, 서넛이 슬며시 몸을 굽혀 신발 벗는 걸 도와주었다.


“너무 작은 거 신으신 거 아닙니까.”

“갈 때는 딱 맞았는데 돌아다니면서 부은 겁니다.”

“그냥 복숭아뼈 정도로만 올라오는 신발이 나았을 텐데요.”

“그런데 이게 요즘 상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신발이랍니다. 상인으로 위장했으니 상인 같이 보여야죠.”

신발을 다 벗겨준 서넛은 자신의 팔 만큼 길쭉한 신발을 감탄하듯 바라보다가, 라틸이 가자미눈으로 째려보자, 한쪽에 잘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겁니까? 예상 일정보다 늦었습니다.”

시녀와 근위병들은 라틸이 잠행을 나간 줄 알고, 최측근들은 라틸이 카리센에 다녀오는 걸 알고, 이 중에서도 몇몇은 라틸이 다가 공작을 보러 갔단 것까지 알았다.

서넛은 모든 걸 아는 이들 중 하나였다.

라틸은 욱신거리는 종아리를 두 손으로 문지르며 대답했다.


“다가 공작 저택에서 일이 좀 생겨서 늦었습니다.”

“일이라니요?”

“다가 공작이 이성을 가끔 잃는 모양이더라고요. 딱 공작저 안에 들어가자마자 살인 사건이 나서. 한 사흘 정도 상단 전체가 거기 머물러야 했습니다.”

“이런.”

서넛은 혀를 차고서 물었다.


“일은 잘 해결된 겁니까?”

“일이…… 모르겠습니다, 잘 된 건지.”

서넛이 라틸의 다리를 가져다가 주물러주었다. 시원하다고 생각하면서 라틸은 등을 의자 등받이에 축 기댔다.


“애매하게 끝났습니까?”

“다가 공작이 식시귀인 건 맞습니다. 게스타도 확인했고요. 그런데 좀. 시간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게스타가 다가 공작에게 뭘 하긴 했는데, 그게 잘 됐는지…….”

라틸은 말을 하면서 무의식중에 시선을 옮겼다가, 서넛의 커다란 손 아래 밀가루 반죽처럼 쥐여 있는 자신의 다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어릴 적부터 기사들 훈련을 따라다니다가 발이 붓거나 다리가 부으면 서넛이 이런 식으로 붓기를 풀어준 건 맞는데.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긴 한데. 다 커서 결혼까지 한 다음 다리를 건네고 있으려니 민망해졌다.

어쨌든 자신은 이제 기혼이고 서넛은 미혼이 아니던가. 라틸은 슬그머니 다리를 거두어들였다.

서넛은 별생각 없이 있다가, 라틸이 귀가 빨개져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자 덩달아 주춤했다.


“아프셨습니까?”

“아픈 게 아니라…….”

민망했던 거라고, 라틸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눈동자를 굴렸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라틸은 괜히 서넛을 노려보았다. 서넛은 난데없이 라틸의 분노에 찬 시선을 받자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라틸은 헛기침을 하고서 자신의 무릎 끝을 내려다보았다.


“아닙니다.”

하지만 말하고 나니 영 민망해서, 라틸은 얼른 서넛을 나가라고 쫓아냈다. 그를 쫓아낸 라틸은 문을 닫고서 서넛이 주물러 준 덕에 굵기가 조금 달라진 두 다리를 번갈아 보았다.

한쪽은 붓기가 그새 조금 빠져 있었고 다른 한쪽은 아직 퉁퉁 부어 있었다.


‘오늘은 게스타랑 타시르도 피곤하겠지. 다가 공작에 관한 건 내일 게스타한테 마저 묻자.’

라틸은 그렇게 생각하고서 종을 흔들어 시녀들을 부른 다음, 목욕을 하겠으니 준비를 하라 지시했다.

곧 시녀들은 하녀 한 무리를 데리고 들어와 따뜻한 물을 받고 안에 입욕제를 풀어 녹이기 시작했다.

라틸은 침대에 늘어져 있다가, 시녀들이 “준비가 되었습니다.”라고 부른 뒤에야 어슬렁어슬렁 욕실로 걸어갔다.

옷을 벗고 욕조 안에 들어가자 그리핀을 타고 오느라 조금 긴장했던 어깨 근육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리핀이 잘 날아도 까마득히 높은 허공에 있다 보면 신경이 쓰이는 법이다.


“목욕 시중을 들어드리겠습니다, 폐하.”

“어. 그래.”

하녀와 시녀들이 물러가고, 라틸의 곁에는 시녀 한 사람만 남았다.

그런데 목욕이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다. 조용히 목욕 시중을 들던 시녀가 슬그머니 “폐하.” 하고 불렀다.

라틸은 목욕 기둥에 새겨진 조각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왜 그러느냐.”

시녀는 잠시 주저했다. 라틸은 고개를 돌려 시녀를 보았다. 그녀는 애런델이었다.


“왜 그러지?”

라틸은 시녀가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자 친절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그러자 조금 용기가 생겼는지, 시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제가 마음에 둔 남자가 있습니다. 폐하께서 중간에서 조금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결혼을?”

“예.”

라틸은 눈을 끔뻑거렸다. 기혼인 여자 왕족이 자신의 미혼 시녀들이 좋은 정략결혼을 하도록 도와주는 일이 많긴 했다.

미혼 귀족들이 시녀나 시종 일을 하는 건, 결혼에 무척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했고. 귀족들이 시녀나 시종으로 지원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데 있기도 했다.

그러니 애런델이 이런 부탁을 하는 건 특이한 일은 아니긴 한데…….

아무래도 라틸은 다른 왕족들보다 시녀들을 가까이하지 않다 보니 좀 떨떠름한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고 거절하자니, 다른 왕족들은 다 해 주는 일을 자신만 해 주지 않는 것 같아 신경 쓰였다. 혼자 치사한 왕족이 된 느낌이랄까.

결국 라틸은 너무 황당해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밝게 물었다.


“누구와?”

“근위기사입니다, 폐하.”

“근위기사. 근위기사 좋지. 이름이 무엇이지? 나도 아는 사람이냐?”

“예……. 서넛 경입니다.”

라틸은 웃고 있다가 당황해서 볼이 굳었다. 애런델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서 라틸의 등을 거품물에 적신 스펀지로 문질렀다.


“서넛 경이 폐하를 깍듯이 받드는 모습을 보면서 반했어요. 참 듬직하고 멋진 분 같습니다.”

“서넛. 듬직하고 멋지긴 하지.”

라틸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넛은 인기가 아주 좋았다. 애런델이 이러기 전부터도 수많은 여자들이 그를 좋아한단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들을 때마다 인정할 수 없다고 외쳤을 뿐.

그런데 그 서넛과 결혼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다니…….


“폐하?”

라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애런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라틸을 불렀다.


“혹시 서넛 경과 혼담이 나오는 다른 영애가 있나요?”

“음. 글쎄. 중간에서 나서본 일이 없고 그런 얘기도 나눠본 적이 없어서. 차라리 그냥 네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혼담을 넣지 그래?”

“서넛 경의 부모님은 들어오는 혼담을 다 거절하고 있다고 들어서요. 하지만 서넛 경은 폐하께 충성심이 깊으니, 폐하께서 나서주신다면 거절하지 않으실 거예요.”

이럴 때 쓰라고 시녀나 시종들이 모시는 왕족에게 중간다리 역할을 부탁하는 거긴 한데…….

난감한 기분에 라틸은 욕조에 받은 물을 찰랑거리다 일어났다. 갑자기 따뜻한 물에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만 나가지.”

“서넛 경과는-.”

“결혼 생각이 있는지 떠보긴 하겠다. 하지만 서넛이 싫다는데 강요할 마음은 없어, 애런델. 나는 내가 아끼는 근위기사의 사생활을 멋대로 조종하고 싶지 않아.”

  

* * *

다음날.

라틸은 계란 프라이와 우유, 수프, 빵 두 덩이만으로 식사를 마치고서 집무실로 곧장 걸어갔다.

서넛도 바로 집무실로 왔다. 평소와 다른 바 없는 말끔하고 훤칠한 모습이었다.

라틸은 일을 하면서 중간중간 서넛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이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잘 살피니 여자 관리들이 유독 서넛 쪽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반면 다른 사람들 주위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닌다.

얼핏 보면 서넛을 피하는 거 같지만, 그들의 푹 숙인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서넛을 피하는 게 아니라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거리가 좀 멀어지면 슬그머니 서넛 쪽을 곁눈질하다가 고개를 숙이고 자기도 모르게 웃는 걸 보면 확실하다.

라틸은 다시 서넛을 보았다. 서넛은 누가 자기를 피해 다니건, 자기를 곁눈질하고 부끄러워하건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하지만 라나문의 무표정과 달리 냉담하지 않고 의젓해 보이는 무표정을 하고서 가만히 책상 위 서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다 라틸의 시선을 느꼈는지 힐긋 시선을 들고는,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어 나오는 놀리는 말투.


“그렇게 열띤 눈으로 보시면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그 장난스러움은 라틸이 한숨을 내쉬자 덩달아 사그라들었다.


“폐하? 고민이라도 있습니까?”

라틸은 시종장이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우고 다른 비서들도 모두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서넛에게 빠르게 물어보았다.


“서넛 경, 마음에 둔 사람 있습니까?”

“!”

질문을 던진 라틸은 전에 서넛이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 말을 떠올리고서 말을 바꿨다.


“연애하고 싶은 마음 있습니까?”

서넛은 잠시 주저하다가 물었다.


“그런 걸 왜 물으십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먼저 물었습니다.”

“……먼저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왜요?”

“있다고 했다가 이상한 사람 소개시켜 주시면 안 되니까요.”

정곡을 찔린 라틸이 휙 돌아보자, 서넛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말 그런 겁니까?”

그가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듯해서, 라틸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 시녀 중 하나가 서넛 경이 마음에 든다고. 나한테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달라고 했습니다.”

서넛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래서 제게 바로 물어보시는 겁니까?”

“물어만 보는 겁니다. 서넛 경이 거절하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연애할 마음이 있다고 하면요?”

“그러면-.”

네 마음대로 하는 거지, 나랑 무슨 상관이야. 라틸은 그 말을 하려다가 좀 기분이 이상해서 입을 다물었다.

왜 기분이 이상한가, 생각하며 서넛을 본 라틸은 그 역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단 걸 깨달았다. 서넛은 몹시 불쾌해하는 표정이었다.


  


“화났습니까?”

라틸이 슬그머니 묻자, 서넛은 부정하지 않았다.


“저는 들어오는 혼담을 전부 다 거절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제게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 첫사랑 때문입니까? 결혼했다는?”

“저는 결혼에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제 할 일 하면서, 폐하께 충성하면서,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단호한 말에 라틸은 기분이 좀 더 이상해졌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나쁜 기분도 좋은 기분도 서운한 기분도 아니었다.

라틸은 멍하게 서넛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알았으니까 그만 노려봐요.”

“노려본 게 아니라-.”

라틸의 과장된 말에 서넛은 반박하려다가, 자기 눈을 가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라틸은 멀뚱히 책상에 펼쳐진 종이를 바라보다가 서넛에게 지시했다.


“아, 게스타한테 사람을 보내서 점심 식사를 같이하자고 해요. 물어볼 게 있으니까.”

“예.”

그런데 얼마 뒤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게스타 님의 시종이 칼라인 님이 게스타 님을 해코지한 것 같다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답니다.”

라틸은 황당해서 입을 벌렸다.


“무슨 소리야?”

 

* * *



“상황이 급해서 다가 공작이 적들을 동물로 보게 만들었어요……. 하지만 다가 공작 방에 한 번 다녀왔으니 이젠 여우굴로 그자 방에 쉽게 갈 수 있어요. 가서 다가 공작을 완전히 꼭두각시로 재조립할 거예요…….”

게스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길게 설명한 말에 칼라인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배를 탔다고 모두가 친한 건 아니었다. 게스타와 칼라인이 그랬다. 칼라인이 멀뚱히 쳐다보자, 게스타는 소파에서 일어서며 당부했다.


“어쨌든 그래서 이틀간 자리를 비워야 하니까…… 폐하께는 나 대신 적당히 둘러 대줘요.”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리지 그래? 식시귀를 세 번째 해부하러 간다고.”

게스타가 노려보자 칼라인이 뭐 어떠냐며 어깨를 으쓱했다. 게스타는 휙 몸을 돌려 귀엽게 생긴 여우 가면을 쓰더니 곧장 사라져버렸다.

칼라인은 혀를 찼다. 갑자기 적당히 둘러대라 해도 곤란하지 않나. 게다가 자기 시종을 데리고 와서 저렇게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누가 봐도……?

이윽고 칼라인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저 음흉한 새끼. 혹시 일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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