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3화. 의문을 가진 사람이 셋 (313/367)


313화. 의문을 가진 사람이 셋
2023.02.26.



 
라틸은 얼른 게스타에게 다가가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며 물었다.


“이틀 걸린다더니. 어떻게 이렇게 빨리 끝냈어?”

게스타는 쑥스러워 웃고 있다가, 손수건에 묻어나온 피를 보자 당황해 허둥거렸다.


“이거, 피가, 피는-.”

“다가 공작 피지? 괜찮아. 많이 안 묻었어.”

게스타는 입을 우물거렸으나 결국 말을 꺼내지 못하고 시선을 떨구었다. 대답은 그 상태로 나왔다.


“상황이 급한 거 같아서 노력했어요.”

‘노력으로 메꿀 수 있는 거였어?’

이틀 걸린다던 작업을 몇 시간으로 줄인 건데? 처음부터 넉넉하게 시간을 불렀던 걸까?

라틸은 의구심이 조금 들었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미소를 유지했다. 게스타는 라틸의 눈치를 보고서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너무 빨리해서 조금 걱정되는 부분도 있지만요…… 그래도 당장 자기가 납치당했던 거나 우리를 만난 일은 모를 거예요…….”

라틸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살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다시 오두막 안에 들어가서 그 ‘걱정되는 부분’을 신중하게 해결하라 권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다가 공작의 호위에 이어 여기로 보낸 병사들마저 모두 잡아넣지 않았던가.

병사들이 줄줄이 사라졌으니, 추가 병력이 올 게 분명하다. 슬슬 정리하고 자리를 피해야 했다.


“폐하?”

라틸이 말이 없자 게스타가 걱정스럽게 불렀다.


“잘했어.”

때로는 만족스럽지 않아도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때였다.

라틸은 무리해서 일을 진행하는 대신, 게스타의 등을 두드리고서 타시르에게 다가가 지시했다.


“암살자들은 다 돌려보내.”

“이제 끝입니까?”

“어. 우리도 돌아가자.”

이후 타시르가 흑림 암살자들을 불러 흩어지게 지시하는 동안, 라틸은 염색한 그리핀에게 몸집을 키워 오라 했다.

전처럼 그리핀이 하얀 새로 염색하고 나타나자, 막 흩어지려던 암살자들이 놀라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얀 새다……!”

“크다……!”

암살자들은 암살자들 주제에 무척 솔직하게 탄성을 뱉었다. 라틸은 그리핀이 성질을 내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리핀은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였다.

쟤는 관심받는 걸 좋아하는구나. 라틸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게스타와 타시르를 불렀다.


“두 사람 다 이쪽으로!”

그리핀은 클라인에 이어 다른 둘까지 자신이 운반해야 할 처지가 되자 몹시 기분이 상한 듯 툴툴거렸다.

하지만 약속한 대로 그 툴툴거림을 눈에 띄게 표현하진 않았다.

가장 앞에 앉은 라틸만 그런 그리핀의 목덜미를 주무르며 연신 칭찬해주었고, 그리핀은 조심스레 비행했다.

게스타는 그리핀에게 별 감흥이 없는 듯 조용히 타서 조용히 머물렀다.


“이야, 날아가니까 좋네요 폐하.”

이 자리에서 신이 난 건 타시르뿐이었다. 그러면서도 타시르는 그리핀의 이상한 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 새. 목덜미 안쪽, 안쪽이 검은데?’

그의 시선이 목덜미 안쪽은 검은색인 새의 깃털과 다가 공작에게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는 게스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 * *

한편, 아이니는 하이신스의 업무를 대행하기 위해 재상 및 기타 여러 인물들과 모여 있었다.

그녀는 황족이 아니라 황제가 될 가능성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제왕학을 익힌 적이 없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서도 배우지 못했다.

다가 공작이 멀쩡했더라면 도움을 많이 받았겠지만, 그는 식시귀로 부활한 뒤 사람을 습격하고 싶어 하는 충동이 강해져 제대로 회의에 참석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 탓에 아이니는 요즘 직접 황제의 일거리를 처리하느라 밤에 제대로 자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기에 이 상황에 더욱 스트레스를 받았다. 경험 없는 사람이 갑자기 중임을 맡았으니 잘 해내야 한단 의욕은 강하지만, 실무를 맡은 하이신스의 측근들은 그녀에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그들을 쳐내려니 언제 하이신스가 깨어날지 모른다. 설령 쳐내더라도 이렇게 빨리 쳐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그녀가 ‘어쩔 수 없이’ 대리 황제 노릇을 하는 게 아니라 권력을 노린 것처럼 보일 테니까.

타리움의 황제가 그녀와 다가 공작이 하이신스를 저 꼴로 만든 거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한 지금, 그녀가 하이신스의 측근들을 다 쳐내버리면, 정말 야망 때문에 황제를 의식불명으로 만들었단 오해를 사기 쉬웠다.

그렇다고 다가 공작의 측근들이 큰 도움이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하이신스의 측근들과 달리 아이니를 돕기는 했으나 못 미더워했다.

그들에게 있어 아이니는 상징이자 우상이었지, 그들과 함께 일을 할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다가 공작이 몸이 좋지 않다며 두문불출하자, 공작의 측근들은 점차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우려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하겠는가. 아이니는 어쩔 수 없이 다가 공작의 측근들과 하이신스의 측근들을 붙인 다음, 그들이 경쟁하며 내미는 의견들 사이에서 쳐낼 건 쳐내고 보완할 건 보완하는 식으로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런데 한창 골머리를 앓고 있자니, 그녀의 시녀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황후 폐하. 공작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급한 일이란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급한 일이 아니라면 굳이 사람을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이니는 대번에 알아듣고서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와 복도를 조금 걸어가자 시녀가 사용하지 않는 빈방 문을 열어주었다.

방 안에는 심부름꾼이 모자를 벗어 두 손으로 들고 서 있었다. 심부름꾼은 아이니를 보자 꾸벅 인사를 올리고서 작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황후 폐하. 공작님이 숲으로 간 뒤 하루가 지나도록 오지 않으십니다.”

“뭐?”

아이니는 깜짝 놀라 물었다.


“사람을 보내 찾아보았느냐?”

“예. 하지만 보낸 사람들도 오지 않고 있습니다.”

심부름꾼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 눈치였으나 거기서 말을 마무리 지었다. 시녀가 걱정스럽게 아이니를 바라보았다.

아이니는 서둘러 회의실로 간 다음, 급한 볼일이 있으니 이 안건은 내일 이야기하자 말하고서 궁을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급히 공작저에 도착해 어머니를 찾아가 보니, 공작부인은 둘째 딸 라이디를 끌어안고 훌쩍이고 있었다.


“라이디, 유모한테 가서 케이크를 구워 달라고 할래?”

아이니는 언니를 보고 좋아하는 동생을 적당한 핑계를 대서 내보내고서 공작부인에 다급히 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아버지가 숲에 가서 안 오다니요?”

“그냥 간 게 아니야. 사실은 납치당한 것 같단다. 숲에 호위 넷만 데리고 산책 가셨다가…….”

아이니는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에 몸을 비틀했다.


“납치요? 그 얘길 왜 이제야 하시는데요!”

“너는 다른 일로 바쁘잖니. 범인이 고작 셋뿐이라니 우리 선에서 해결하려 했지.”

“범인을 알아요?”

“목격자 말론, 퍼퓸 로즈 상단을 따라왔다가 중간에 헤어진 손님 셋이라더라.”

“호위들을 보내셨어요?”

“보냈지. 하지만 보낸 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어. 그래서 널 부른 거야.”

아이니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버지가 잘못되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식시귀가 된 뒤로 아버지는 아주 많이 강해졌으니까.

다만, 사람의 살을 뜯고 싶어 하는 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할 뿐이지.

아이니가 걱정하는 건 아버지가 숲에 들어가서 지나가던 여행객이나 자신의 호위를 습격하는 일이었다.

애초에 아버지가 숲에 간 것도 이상했다. 아버지가 숲에 갈 일이 뭐가 있어서!


“황궁 병사들을 풀어 찾아볼게요.”

아이니는 울먹이는 어머니를 달래고서 골치 아픈 머리를 문지르며 큰방에서 나갔다.

말은 황궁 병사들을 푼다고 했지만 막막했다. 병사를 보내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정말 숲에서 사람이라도 뜯어 먹고 있다면? 병사들이 그 모습을 본다면?

하이신스가 갑자기 쓰러져버리고 다가 공작조차 힘이 없는 이 상황에서 아이니가 그나마 국민의 지지를 받고 귀족들을 모을 수 있는 건, 그녀가 대적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가 공작이 식시귀란 게 알려지면 사람들은 바로 라나문이나 타리움 황제 쪽으로 돌아서 버릴 것이다. 대적자가 셋이나 되니까.


“공작님!”

“대체 이게…….”

그런데 바쁘게 계단을 내려가고 있자니, 입구 부근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납치 되었다던 다가 공작이 멀쩡히 들어오고 있었다.


“아버지!”

아이니가 놀라서 계단을 다급히 내려가자, 다가 공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너도 이렇고 다른 사람들도 이렇고. 왜들 이리 놀라는 거냐.”

아이니는 황당해서 외쳤다.


“아버지가 납치되었다고 들었으니까요!”

“납치?”

그러나 다가 공작은 자기가 오히려 더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전혀 납치되었다 풀려난 사람 같지 않았다.


“납치된 게 아니에요?”

아이니가 재차 묻자, 다가 공작은 헛웃음을 뱉었다.


“그럴 리가. 산책 갔다가 돌아오는 길인데.”

“산책을 이렇게 오래 하셨다고요?”

“그래. 다람쥐를 보았지. 다람쥐가 참 많더라.”

“다람쥐……요?”

“요즘 다람쥐들은 어찌 그리 커다란지. 사방이 다 다람쥐였어. 다람쥐들이 죄다 나를 보고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데 참 기묘했지.”

다가 공작이 고개를 젓고 계단을 올라가자, 긴장해서 곁에 있던 하녀와 하인 몇몇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한껏 긴장했다가 안심해서 웃어댔다.

아이니도 바짝 긴장한 게 민망하기도 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다가 공작의 바지 아랫단에 묻은 피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병사들은? 아버지를 데리러 간 병사들은 다 어디 간 거지?’

 

* * *

카리센에 갈 때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느라 며칠이 걸렸지만, 올 때는 몇 시간 만에 수월하게 도착했다.

라틸은 궁전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타시르와 게스타는 우선 각자 처소로 보내 쉬게 하고, 자신은 집무실로 갔다.

급한 일이 있었다면 칼라인이 뱀파이어를 보냈을 테니 별 일 없었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없던 새 오간 안건을 대략으로라도 훑고 싶었다.


“폐하, 세상에. 곧장 여기로 오신 겁니까? 우선 좀 씻고 쉬시지요!”

집무실에 있던 시종장은 라틸을 보자마자 놀라 외쳤다.


“괜찮아요.”

라틸은 손을 젓고서 책상 앞에 앉아 몇 가지 일을 검토한 다음에야 펜을 내려놓고서 방으로 돌아갔다.

무거운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고 있자니, 방 앞에 근위병들과 함께 서 있는 서넛이 보였다.

다른 근위병들은 근위대장인 서넛이 곁에서 내내 같이 있자 신경 쓰이는지 괴로운 표정이었고, 서넛은 홀로 무표정했다.

그러나 표정 없던 얼굴은 라틸을 보자 대번에 화색이 돌더니, 눈 깜짝할 사이 그는 라틸의 바로 앞으로 달려와 있었다.


“폐하.”

너무 뱀파이어 속도로 온 게 아닌가, 라틸이 염려될 정도로 빠르게 다가온 서넛은 잠시 말을 멈추고 라틸을 찬찬히 살피더니 무사한 걸 확인하자 활짝 웃었다.


“왜 이렇게 늦게 오신 겁니까.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조금 일이 생겼습니다. 아니, 근데 나 빨리 오지 않았습니까?”

“약속한 기한보다 늦어지셨지 않습니까. 찾아다녀야 하나 걱정했습니다.”

“약하면서…….”

“연약해서 그런가, 세상이 다 겁나는 거 투성이입니다. 걱정도 더 많습니다.”

서넛은 점잖게 굴고 있었지만, 표정이 너무 밝아서 반가워하는 티가 강하게 났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근위병과 시녀들은 그리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라틸이 카리센에 간 일은 최측근들만이 알았으나, 근위병들과 시녀들도 라틸이 잠시 자리를 비운 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라틸이 근처로 잠행을 나갔다 온 거라 알고 있었다.

게다가 서넛은 라틸이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니, 사적으로도 친한 사이였다. 반가워할 만했다.

그러나 서넛을 마음에 들어 하는 시녀 애런델은 서넛이 황제를 보자마자 표정이 환해지고 목소리가 밝아지는 걸 보며 본능적으로 주춤했다.

좋아하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은 좀 더 잘 보게 되는 법이었다. 그녀는 서넛이 황제에게 다정하게 구는 목소리를 듣자 불안한 마음이 치솟았다.

애런델은 결국 고민 끝에 라틸에게 서넛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알리고,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주십사 청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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