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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화. 드디어 손에 넣었다 (312/367)


312화. 드디어 손에 넣었다
2023.02.22.



 
상황은 완벽한 듯 보였으나, 슬쩍 빠져나간 미꾸라지가 하나 끼어 있었다.


‘공작님이 납치됐다.’

다가 공작이 ‘사비’를 죽이기 위해 상단에 보낸 측근 암살자였다.

공작의 심복 암살자는 사비를 암살할 기회를 엿보면서, 상단이 밖으로 나갈 때부터 이미 따라가고 있었다.

세 사람이 상단과 헤어질 때는 목표물을 따라 그 셋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 셋은 수도 외곽에서 다른 일행들과 합류했고, 이후 오두막을 기점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뭘 하는지는 그도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했다. 가까이 가면 들킬 가능성이 높아 보여서, 최대한 거리를 많이 둔 탓이었다.

어쨌든 교묘하게 틈이 나지 않자 내내 조용히 따라다니고 지켜보기만 했는데. 결국엔 이런 장면까지 보게 된 것이다.

저자들이 공작님을 먼저 납치하다니! 이건 또 예상치 못한 경우였다. 적들의 숫자가 자신보다 훨씬 많고 솜씨도 뛰어나단 걸 파악한 암살자는 오기를 부리지 않았다.

그는 공작의 명령을 따르는 대신 바로 공작가로 돌아가 공작부인을 찾아갔다.


“공작님께서 어떤 자들에게 납치되었습니다, 마님.”

측근 암살자는 공작부인에게 자신도 암살 명령을 받았단 걸 제외하고 보고했다. 공작부인은 측근 암살자를 공작의 평범한 측근으로만 알고 있기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납치라니?”

“며칠 전까지 여기에 머물다 간 상단 일행이 범인입니다. 그 상단에 낯선 이들이 끼어 있었는데, 그중 셋이 주축이 되어 공작님을 납치했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 대체 어디에서? 그이는 몸이 안 좋아 내내 집에만 있는데 납치라니!”

“모르겠습니다. 공작님께서 호위 넷만 데리고 갑자기 수도 외곽에 있는 숲으로 가셨습니다.”

공작부인은 몹시 당황해서 호위대장을 불러다 얼른 공작을 구출해오라 명령했다.


“그자들의 위치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측근 암살자가 나서서 길 안내를 자처하자, 호위대장은 서둘러 수많은 호위병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 * *

이를 모르는 라틸은 오두막 앞에 커다란 담요를 깔고 앉았다.

흑림 소속 암살자들은 그 앞에 모래를 쌓은 다음 나무를 얹어 밤에 쓸 모닥불을 만들어주었다.

게스타가 다가 공작과 건물 안에 틀어박히기 전, 다른 사람들이 먹을 음식은 미리 꺼내 두었기에 하루 동안 먹고 마실 것도 충분했다.

암살자들은 눈치를 보다가 눈치껏 모습을 감추었고, 라틸은 타시르와 나란히 앉아 있게 되었다.


“여행 온 느낌이네요.”

타시르는 겉보기엔 완전히 둘만 남게 되자 흐뭇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라틸은 그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바로 뒤편에서는 게스타가 무시무시한 작업을 하고 있겠지만, 타시르는 그런 것까진 모르기에 아주 평온했다.


‘아니지. 남의 나라 공작을 납치했는데도 평온한 거잖아. 얘도 평범하진 않아.’

라틸은 타시르는 평온할 만하다고 수긍하다가, 뒤늦게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타시르는 여전히 멀뚱멀뚱했다.


“너 대범하구나.”

라틸이 중얼거리자, 타시르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저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시니 절대 질리진 않으시겠습니다.”

“사람한테 질리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시간이 지나면 더 좋아지는 거지.”

라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얼른 꼭두각시가 된 다가 공작이 보고 싶었다. 라틸은 다가 공작이 싫었지만, 그가 꼭두각시가 된다면 이전보다는 좋게 보아줄 용의가 있었다.

* * *

해가 질 무렵이 되자 조금 쌀쌀해졌다. 하지만 모닥불을 피우면 좀 더울 것 같은 애매한 날씨여서, 라틸과 타시르는 커다란 담요 하나를 같이 덮어썼다.

라틸은 혹시라도 타시르가 이 상황에 대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까 봐 주기적으로 그를 곁눈질했다.

게스타가 지금 뭘 하는지, 식시귀가 된 다가 공작을 독학한 마법사인 게스타가 뭘 어떻게 처리할 수 있단 건지 등 타시르가 할만한 질문은 넘쳐났다.

그러나 타시르는 질문 대신 시답지 않은 이야기만 하거나, 아까 미리 삶아서 포장지로 싸 둔 감자만 건넬 뿐이었다.

결국 라틸은 참지 못하고 먼저 묻고 말았다.


“넌 궁금하지 않으냐? 이 상황이?”

타시르는 태연히 대답했다.


“호기심을 누르는 건 참을 만합니다.”

“참기 힘든 건?”

“호기심을 채우려다 신뢰를 잃는 겁니다.”

“!”

“그러면 견디기 어려울 거 같습니다.”

그가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어두워서일까. 그의 다크서클도 잘 보이지 않게 되자, 어두운 눈가 때문에 위험해 보이던 인상이 흐릿해지면서 감춰진 이목구비가 또렷해졌다.

얼굴 한쪽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보였고, 다른 쪽은 음영이 져서 평소보다 타시르를 또렷한 인상으로 만들어주었다.

라틸은 그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여 마주 바라보았다.

문득 예전에 불법 경매장에서 그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죽을 뻔한 일이 떠올랐다. 대신관이 없었더라면 분명 죽었을 것이다.

라틸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콧등을 살짝 쓸어보았다. 타시르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서 라틸의 눈을 계속 바라보기만 했다.

내려간 손이 그의 입술에 닿자, 손가락이 간지러워졌다. 폭신하고 말랑하고 부드러운 입술은 머릿속에 지금과 어울리지 않는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라틸은 천천히 손가락을 도로 거두었다. 그가 보여주는 신뢰로 가득한 태도에 마음이 울렁였다.

라틸은 지금이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얼굴에 열기가 도는 것 같았다. 괜히 눈동자가 옆으로 씰룩 움직이면서 타시르의 시선을 피하게 되었다.

라틸은 자기 팔뚝을 문지르다가 발치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옆을 보았다.

타시르는 무릎에 팔을 얹고 머리를 괴고서 라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도 부끄러워 보이지 않는다.


‘뭐, 저쪽은 날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

라틸은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저 안에 사랑은 없어도 신뢰가 있다면…….


“무슨 생각 하십니까, 사비 양?”

“이번에 돌아가면…… 잘 정리해서 네게도 상황을 알려줄게.”

“상황이요?”

“돌아가는 상황.”

타시르가 놀란 듯 가느다란 눈을 조금 커다랗게 떴다. 그래도 가느다랬지만.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어떤 걸 알게 되어도, 너는 내 편으로 있을 건가?”

“당연한 일입니다. 이 타시르는 그대의 사람이니까요.”

라틸은 흐뭇하게 웃고서 앞쪽으로 향하게 하고 팔을 끌어안았다. 그러다 팔에 이마를 대고 머리를 묻어버렸다. 조금 잠이 몰려왔다.

* * *

그리고 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흑림의 부하들은 초조하게 소곤거렸다.


“저거 괜찮은 건가?”

“그러니까. 우리 수장님은 폐하의 후궁 아니야?”

“지금 불륜…….”

“폐하께서 아시면 난리 날 거 같은데.”

타시르는 사비가 라틸인 걸 알기에 아무렇지 않게 라틸에게 다정하게 대했지만, 사비의 실체를 모르는 부하들의 눈에는 이 상황이 몹시 위험하게 보였다.

세상 어느 황제도 자기 후궁이 다른 이성을 마음에 두는 걸 원하진 않을 거다. 후궁들을 들여놓고 잘 찾아가지도 않는 황제라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우리가 입 다물면 돼.”

“우리가 입을 다물어도 저렇게 둘이 붙어 다니면 누구든 알게 될 거 아냐.”

“명색이 흑림 수장이신데 알아서 하시겠지.”

“아니 암살자 수장인 거랑 티 안 나게 불륜하는 게 무슨 상관이라고?”

“그래, 나는 옛날 여자친구랑 우연히 마주쳐서 5분 잠깐 이야기했는데, 24시간을 못 채우고 다 들켰다고!”

부하들이 타시르의 불륜에 신경 쓰느라, 오두막에는 신경 쓰지 못하는 게 라틸에겐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부하들이 상사의 불륜에 관해 걱정스럽게 속닥거리고 있을 때였다. 먼 곳에서부터 불길한 바람이 불어왔다.

암살자들은 조용히 수다 떨던 걸 멈추고 미어캣처럼 고개를 치켜들었다. 라틸도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번쩍 뜨고 허리를 들었다. 타시르도 괴었던 팔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먼 곳에서 수풀이 바스락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 저녁에 누군가 숲에 들어선 것이다.

숲이라고는 하지만 수도 근처이기에, 사람들은 굳이 숲에서 야영하려 들지 않았다. 몇 걸음만 걸어가면 따뜻한 이불과 먹을거리가 있는 여관이 수두룩한데. 굳이 야영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 늦은 시각에 들어오고 있다. 그것도 조용하고 은밀하게.


“아직 이틀이 다 채워지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야 한다.”

부하들은 수군거리던 걸 멈추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라틸도 타시르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불러보았다.


“누군가 오나 보다.”

“다가 공작가 사람들이 빨리 알아차렸군요. 부하들까지 여기 잡아뒀는데.”

“그러게.”

라틸은 몸을 일으켰다. 타시르도 자기 부하가 숨어 있는 나무 아래로 가서 물었다.


“몇 명 정도 이쪽으로 오고 있지?”

대답은 조용하게 전해졌다. 수신호로 주고받은 말이라 라틸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타시르는 다 알아들었는지, 바로 라틸을 돌아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인원수가 많은 것 같습니다,”

“여기에 다가 공작이 잡혀 있단 걸 의심하고 오는 게 아닌가 봐.”

아예 여기 있단 걸 확신하고 오는 것이니 병력을 대거 동원했을 것이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여럿이 올 수는 없으니까.

라틸은 타시르를 보았다.


“싸울 수 있겠어?”

타시르가 장난치시냐는 듯 웃자, 라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은 사수해야 해.”

라틸은 중얼거리고서 얼굴을 슬쩍 문지르고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타시르는 멀뚱히 서 있다가 ‘사비’의 얼굴에서 갑자기 아이니로 변하자 흠칫해서 옆으로 물러섰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렇게 해야 적들이 더 교란될 거 같아서.”

라틸이 얼굴을 난데없이 바꿔버리자 혼란스러워하는 건 암살자들은 ‘저거 참 편하겠다’고 속닥거렸다. 타시르는 연신 라틸의 얼굴을 기웃거렸다.

라틸은 대기하고 있다가, 주위로 다가오는 발소리들이 많아지자 찬찬히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 습격자들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확실히. 다 도착하지 않은 것 같은데도 그 숫자가 암살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황후 폐하?”

그러다 나타난 병사 중 몇몇이 ‘아이니’의 얼굴을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라틸은 혹시나 싶어서 검을 한 손에 뽑아 쥐고 우선 명령부터 해보았다.


“볼일이 있어 아버지를 모시고 나온 것이니, 다들 돌아가라.”

“저 안에 공작님이 계신 건 확실한가 보군요.”

“글쎄.”

“공작님을 돌려주신다면 저희도 돌아가겠습니다. 왜 이러시는진 모르겠지만, 공작님은 몸이 좋지 않으시니 이러지 마십시오, 황후 폐하.”

라틸은 대답 대신 검을 세웠다.

* * *

이어서 벌어진 싸움은 처음에는 다가 공작의 병사들에게 우세했다. 그들은 배로 차이 나는 인원수 덕택에 몇 번이나 오두막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써도 오두막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조금만 아슬하다 싶어도 바로 ‘아이니 황후’가 달려와 그들을 낚아챘기 때문이었다.

다가 공작의 호위병들은 아이니의 날랜 몸놀림을 보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다 성장한 후에도 검술 연습은 전혀 하지 않고 살았는데,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 강해지다니. 대적자라 그런 건가, 생각하면서도 좀 억울할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자 승기는 점차 다가 공작 쪽에서 빠져나갔다. 라틸과 타시르는 한 번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한 명씩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

다른 암살자들 역시 모두 혹독한 수련을 거쳐 흑림에 포함된 이들로, 누군가를 습격하는 일에는 능숙하고 또한 뛰어났다.

차라리 여기가 평지였더라면 인원수의 강점을 잘 살려 다가 공작 일당이 계속 유리했겠으나, 숲속이란 지형은 인원수의 이점을 살리기 어려웠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을 무렵. 제대로 서 있는 건 몇 사람 되지 않았고, 그 몇 사람조차 모두 라틸 일행이었다.


“다가 공작 병사들을 묶어서 창고에 넣어.”

라틸의 지시에 타시르와 부하들은 기절하거나 쓰러진 병사들을 모두 다 창고에 묶어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라틸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다시 얼굴을 ‘사비’로 돌리고 오두막을 보았다. 오두막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때. 안쪽에서 문이 열리더니, 놀랍게도 다가 공작이 걸어 나왔다. 라틸은 인상을 찡그렸고 타시르의 손길도 허리에 찬 검 손잡이로 내려갔다.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모여들었던 암살자들 역시 경계해 그쪽을 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리는 다가 공작의 모습에, 라틸은 일이 잘못됐나 싶어 오두막 안쪽을 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다람쥐가 많다니!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전부 다 왕다람쥐라니! 저기도 다람쥐고 여기도 다람쥐고!”

그런데 위협적으로 걸어 나온 다가 공작은 혼자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고 화난 얼굴로.

게다가 다가 공작이 ‘다람쥐’라면서 보는 것들은 전부 다 사람들이었다.

이게 뭔가 싶어 인상을 구기고 있자니, 오두막 문이 열리고서 게스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게스타는 이마와 뺨에 피가 조금 묻어 있었는데,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쑥스럽단 듯이 웃으며 말해주었다.


“지금 다가 공작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전부 다 동물로 인식하고 있어요,”

라틸의 얼굴이 환해졌다.


‘게스타가 다가 공작한테 뭔 짓을 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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