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다가 공작의 의심
(311/367)
311화. 다가 공작의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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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화. 다가 공작의 의심
2023.02.19.
“아이니?”
다가 공작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멍하게 딸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니, 네가 왜……?”
다가 공작이 ‘아낙차의 로브’와 ‘아이니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입을 천천히 벌렸다.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다가 공작은 아무것도 알 필요 없었다. 라틸은 빙그레 웃고서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다가 공작의 머리를 후려쳤다.
“!”
짧은 신음을 토해내며 다가 공작은 바로 고꾸라졌다.
“식시귀도 기절하네.”
아니면 내가 로드라서 가능한 건가? 라틸은 중얼거리며 자신의 손과 다가 공작을 번갈아 보다가, 시계를 확인하고 동작을 좀 더 빨리했다.
우선 공작을 침상 머리 판에 기대어 앉게 한 다음 눈을 감겨주고 창문으로 걸어갔다.
대기시켜 둔 그리핀은 바로 위쪽 창틀에서 뭘 하는지, 창문 너머로 사자 꼬리 일부가 살랑이고 있었다.
“여보세요. 그리핀 씨.”
라틸이 꼬리를 두어 번 살짝 잡아당기자, 그리핀은 껑충 이쪽 창틀로 내려왔다.
[여기 있습니다요 로드! 어라? 로드 얼굴이 바뀌었습니다요?]
“게스타를 불러와.”
[로드 얼굴-.]
“빨리.”
그리핀은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라틸은 이번엔 아낙차의 얼굴로 다시 바꾼 다음, 문을 열고 앞에서 대기 중인 호위들에게 상냥하게 부탁했다.
“사람들을 잠시 물러줄 수 있겠어요?”
“무슨 일이십니까?”
호위는 한 뼘 정도 열린 방문 너머로 편안히 앉은 다가 공작을 힐긋 보았다. 다가 공작은 겉으로는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공작님을 치료하려 하는데, 곁에 사람들이 있는 걸 안 좋아하세요. 치료할 땐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지시거든요.”
이렇게 구체적인 사유를 들려준 적은 없으나, 아낙차가 다가 공작을 ‘치료’하기 전에 사람들을 물리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호위는 순순히 그러겠다 대답하고서 다른 이들을 챙겨 멀리 떨어졌다.
그들이 복도를 비워주자 라틸은 문을 닫고서 얼굴을 ‘사비’로 바꾼 다음 게스타를 기다렸다. 다행히 게스타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나타났다.
“사비 양.”
라틸은 문을 열어 그를 들인 다음, 안쪽에서 잠금장치를 잘 끼우고 게스타를 다가 공작 앞으로 데려갔다. 게스타는 잠든 것처럼 앉은 다가 공작을 보고 감탄했다.
“사비 양이 기절시키신 건가요?”
“응.”
“식시귀는 보통 이렇게 잠들지 못해요…….”
게스타는 다가 공작의 상태가 신기한 듯했지만, 지금은 식시귀의 기절 가능성에 대해 논의할 시간이 없었다.
“게스타. 지금 공작을 재조립할 수 있어?”
“네?”
“아낙차한테서 뭐 조종 장치를 가져와야 한다 했잖아. 그건 힘들 거 같아서. 아예 재조립하면 조종할 수 있다며.”
“그게…….”
게스타는 난처한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여기서요?”
여기서 다가 공작을 ‘재조립’하는 모습을 굳이 라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곤란해하는 표정은 귀여웠으나, 지금은 사랑스러운 후궁의 귀여운 모습에 심취할 때가 아니었다.
“시간이 없어서. 너무 오래 끌면 물린 호위들이 돌아올 거야. 아낙차가 보통 ‘치료’를 한다고 사람들을 얼마나 오래 물려두는지 몰라서.”
“폐, 사비 양 안 돼요. 처음부터 만드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재조립이잖아요. 먼저 한 사람이 한 걸 다시 처음부터 싹 갈아야 하는 거라 몇 시간 만에 할 수 없어요. 최, 최소한 빨리해도 이틀은 걸려요.”
게스타는 평소 작고 느린 목소리로 가끔은 더듬기도 하면서 말을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라틸이 급하다고 하자 덩달아 마음이 조급해졌는지 평소보다 조금 빠른 목소리였다.
“이틀이나?”
“네.”
“더 줄일 수 없어?”
“얼만큼이요?”
“두 시간으로.”
게스타가 절대로 안 된다고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젠장. 그럼 어쩌지? 다가 공작을 밖으로 빼돌리긴 힘든데.”
라틸은 초조해서 엄지 살을 씹었다. 아니면 또 좋은 기회를 엿봐서 여기까지 와야 하는데. 그 좋은 기회가 며칠이 될지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게스타가 그 모습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럼 사비 양, 다가 공작에게 명령을 하나 걸어 둘게요. 그거라면 20분 정도면 가능해요.”
“명령?”
“네. 닷새 후에 공작저를 떠나 외곽에 있는 숲으로 오라고요.”
라틸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정도면 충분해. 일단 밖으로 나오면 빼돌리기 쉬워지겠지.”
“그럼 저기…… 뒤돌아 계시면…….”
“나?”
게스타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틸은 흑마법사가 식시귀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고 싶었지만, 후궁의 부탁대로 벽을 보고 돌아섰다.
“쳐다보시면 안 돼요.”
“알았어.”
“정말로요.”
“알았다니깐.”
잠시 후 뒤에서 사각사각하는 종이를 오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왜 여기서 종이 오리는 소리가 나? 라틸은 호기심이 물씬 솟았으나, 게스타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절대로 돌아서지 않았다.
잠시 뒤에는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가끔 라틸의 심장을 철렁이게 할 정도로 낮고 그윽한 그 목소리였다.
그러고 있자니 마침내 게스타가 말했다.
“이제 됐어요…….”
라틸은 얼른 돌아섰다. 다가 공작은 아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자세로 몸을 뉘듯 앉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진짜 다 된 거야?”
“네.”
“그럼 넌 얼른 빠져나가 게스타. 나도 눈치껏 내려갈게.”
게스타를 내려보낸 라틸은 그리핀을 통해 그가 무사히 방에 돌아간 걸 확인한 다음에야, 다시 아낙차의 얼굴을 하고서 문밖으로 나갔다.
* * *
“다가 공작이 드디어 우리더러 나가라고 하네!”
다음날, 식사를 위해 2식당에 사람들이 모이자마자 상단주가 기쁜 얼굴로 발표했다.
“일정이 많이 밀렸지만 지금이라도 나갈 수 있으니 다행이지.”
그렇게 말한 상단주는 작은 목소리로 다가 공작가를 조금 욕하고서 서둘러 먹으라고 일행을 재촉했다.
“또 마음이 바뀔 수 있으니 빨리 먹게. 빨리.”
상단 사람들은 척하면 척이어서, 상단주가 지시를 하자마자 아까의 세 배는 되는 속도로 팔과 입을 움직여댔다.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제 속도대로 먹는 사람은 라틸과 타시르, 게스타 뿐이었다.
상단주는 ‘이래서 온실 화초들은’ 하고 속으로 혀를 찼으나, 겉으로는 그런 내색 없이 웃고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식사가 끝나자 타시르를 살짝 불러다 물었다.
“타시르 님은 이제 다른 곳으로 갈 셈인가?”
“예. 여기까지만 오면 될 일이니까요. 충분히 알아봤습니다.”
“충분히 알아보다니?”
“카리센이 엉망이란 거요.”
“!”
“안심할 수 있겠네요.”
방긋 웃는 타시르를 잠시 멍하게 보다가, 상단주는 주위를 둘러보고서 단단히 당부했다.
“나랏일도 나랏일이지만, 타시르 님. 내가 어릴 때부터 지켜보아 왔으니 조카라 생각하고 한마디 하겠네.”
“네. 말씀하시지요.”
“후궁의 불륜은 폭풍을 몰고 올 일이네.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절대로 그러지 말게.”
상단주의 오해를 눈치챈 타시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물론입니다.”
* * *
상단 일행이 떠나자 다가 공작은 나쁜 일을 도맡아 하는 심복을 불러다 지시했다.
“상단 사람들 중에 ‘사비’라는 이름의 여자가 있다. 그 여자를 죽이도록 해라.”
“예.”
심복은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바로 물러났다. 솜씨 좋고 영리한 이란 걸 알기에, 다가 공작은 곧 느긋하게 침상에 기대어 앉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구겨졌다. 그는 이불보를 꽉 움켜쥐고 어젯밤 보았던 딸을 떠올렸다.
밤중, 갑자기 아낙차가 입는 로브를 쓰고 나타난 딸은 그에게 달려들어 엘보우 어택을 날렸다.
그 후로 기억이 끊겼다. 다가 공작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의문은 그의 방문 앞을 지키던 호위의 말을 듣자 더욱 아리송해졌다.
“어제저녁에 이상한 일이나 침입을 시도한 수상한 자는 없었느냐.”
“예. 담당 의원이 두 번 다녀간 걸 제외하면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의원이 두 번 오다니? 아이니는?”
“황후 폐하께선 오지 않으셨습니다.”
“뭐?”
그는 분명 딸을 보았는데. 사람들은 그 시각에 온 게 아낙차라고 한 것이다.
‘아낙차가 내 딸을 흉내 낸 건가?’
다가 공작은 곧장 아낙차를 불러 물어보았다.
“어제 혹시 내 딸을 흉내 내 날 찾아왔나?”
아낙차는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다가 공작이 인상을 찌푸리고서 자신을 매섭게 쳐다보자, 아낙차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되물었다.
“공작님. 생각해 보세요. 제가 왜 그런 짓을 하나요? 전 언제든 공작님을 만날 수 있는데요?”
그럴듯한 말이었다. 아니, 사실이었다.
다가 공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쩌면 찾아온 사람이 정말 아이니였을지도 모른다.
아이니는 그의 말을 잘 듣긴 하지만, 그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일이 몇 가지 있지 않던가.
예를 들어…….
“혹시 아이니가 헤움의 목을 찾았나?”
이런 것들.
다가 공작의 질문에 아낙차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르고 있답니다.”
안도한 다가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으나 곧장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직 안도할 게 아니었다.
어제 그를 습격한 범인이 아낙차일지, 아이니일지, 아니면 아이니를 흉내 낸 교묘한 3자일지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무섭게도.
* * *
다가 공작가를 나온 라틸은 상단과 헤어진 다음 수도 외곽에 있는 숲에 들어갔다.
공작가에서 다가 공작이 나온다면 마차를 타고 나올 테고, 마차가 지나갈 만한 길은 몇 되지 않는다.
그중에서 게스타가 공작에게 명령해둔 방향까지 고려하고 나니 다가 공작의 동선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라틸은 숲에 있는 낡은 오두막을 찾아낸 다음, 몇 가지 필수적인 가구와 먹을거리를 사 놓고서 닷새간 다가 공작을 기다렸다.
타시르에게는 당장 동원 가능한 암살자들을 여기로 모은 다음, 다가 공작 일행이 오면 습격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그리고 정말로 5일째 되는 날. 다가 공작이 호위 네 명만을 데리고 수도 외곽 숲으로 들어왔다.
게스타가 뭘 어떻게 한 건지 평소보다 조금 얼빠진 얼굴이었다. 게다가 호위들에게 왜 여기 오는지 말하지도 않은 듯 호위들도 비슷하게 얼빠진 표정이었다.
“다가 공작은 꼭 잡아 와.”
“나머지는요?”
“잡아서 묶어두면 좋고. 싸우다 죽으면 어쩔 수 없고.”
타시르가 라틸의 명령을 부하들에게 전하자, 흑림의 암살자들이 공작 일행을 재빨리 습격했다.
공작의 호위들이 죄다 있었으면 좋았겠으나, 지금 공작이 데리고 있는 호위는 수많은 암살자들을 상대하기엔 수가 너무 적었다.
공작이 ‘갑자기’ 호위를 아주 적게 해서 여기에 산책이 오고 싶어서, 사람들이 만류하는데도 고집해서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얼마 가지 않아 공작과 호위들은 눈이 가려진 채 오두막 앞으로 잡혀 왔다.
“공작은 안에 데려가고. 호위들은 창고에 가둬.”
일 처리를 할 준비가 완벽히 끝나자, 게스타는 라틸에게 부탁했다.
“앞으로 이틀 동안은 절대로 저 안에 들어오면 안 돼요…… 아무도요.”
게스타가 눈 가린 다가 공작을 데리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라틸은 반은 안도하고 반은 기대하다가 아차 싶어 타시르를 보았다.
‘타시르한텐 이 상황을 뭐라 하지?’
조금 걱정이 되어 보고 있자니, 타시르도 시선을 느꼈는지 같이 라틸을 마주 보았다. 잠시 그 상태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자니, 타시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비 양. 내가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해 아주 궁금한 게 있는데요.”
게스타가 왜 다가 공작을 데리고 이틀이나 오두막 안에 틀어박혀야 하는지 묻겠지. 라틸은 속으로 한탄하면서도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봐.”
타시르가 진지하게 물었다.
“오두막을 못 쓰면, 우린 오늘 밤에 어디서 자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