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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화. 선수 치기 (310/367)


310화. 선수 치기
2023.02.15.



“다가 공작이? 나를?”

라틸이 방 안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게스타, 타시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하녀가 찾아와 다가 공작이 ‘사비 양’을 찾는다고 했다.


“알았어. 이따 찾아뵐게.”

“저…… 지금 오라 하셨습니다.”

“그럼 옷 좀 갈아입고 갈게. 물을 쏟아서.”

“예? 예.”

하녀는 방 안에 두 남자가 차 마시는 걸 힐긋 보고는 눈살을 찡그리며 문을 닫았다. 남자 둘을 방 안에 두고 옷을 갈아입는다고 하자, 라틸이 핑계를 대고 시간을 끌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문이 닫히고 라틸이 소파 가까이 걸어오자 타시르가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며 웃었다.


“위험하니 같이 가시지요.”

그는 자연스럽게 라틸의 팔에 자신의 팔을 꿰었지만, 라틸이 다른 곳을 보는 사이 게스타가 그의 뒷덜미를 잡고 당겨버리자 뒤로 도로 딸려나와야 했다.

타시르가 눈썹을 치켜뜨고 웃으며 쳐다보자, 게스타는 손을 얼른 내리고는 라틸에게 부들부들 떠는 강아지처럼 말했다.


“저, 저랑 같이 가요. 타시르 님은 생긴 게 무서워서 다 경계하지만 저는 온순해 보이니 경계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 순둥이 도련님, 나는 무섭게 생긴 게 아니라 고혹적으로 생긴 거야. 자기가 가지지 못한 분위기라고 해서 시샘하면 안 돼.”

“가지지 못해도 자부심이 있으니 당당하게 잘 사시네요…….”

라틸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상대를 놀려대는 타시르와 달달 떨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게스타를 두 손으로 떨어뜨리고서 말했다.


“혼자 갔다 올 거야.”

 

* * *

게스타와 타시르는 위험하다고 했지만, 라틸은 공작을 한 번 보고 올 뿐이니 괜찮다고 달랬다.

식시귀를 상대하는 건 헤움과 싸워 보아서 자신 있었다. 헤움은 검술 실력이 꽤 높은 듯했지만 결국 라틸에게 지지 않았던가.

식시귀는 라틸을 보면 움츠러드니, 생전에 아무리 강했다 한들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식시귀가 되어 힘이 세진다지만, 힘이 세진 건 라틸 역시 마찬가지였고.


“정 걱정되면 외부 상황을 계속 살펴줘.”

라틸은 그렇게 말하고서 문밖으로 나갔다.

하녀는 옷을 갈아입겠다던 라틸이 아까 복장 그대로 나오자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말없이 돌아서서 길을 안내했다.

다가 공작의 방 앞에는 호위들이 여럿 서 있었는데, 하녀가 라틸을 안내해 데려오자 다들 이번에는 붙잡지 않았다.


“여기로 들어가면 됩니다.”

하녀가 문을 열어주었고, 라틸은 지체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하녀는 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라틸은 그 자리에 서서 다가 공작을 보았다. 다가 공작은 침상에 앉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곁에 그 로브를 눌러쓴 여자가 함께였다.


‘대체 저 여자가 누구길래 계속 옆에 둘까. 진짜 아낙차인가?’

궁금하면 알아보면 될 일이다.


“절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다가 공작님. 공작부인.”

라틸은 일부러 모른 척 로브 쓴 여자를 공작부인이라 부르며 다가갔다. 공작은 ‘공작부인’ 소리에 인상을 굳혔다.

로브 쓴 여자가 아내라고 오인받는 게 불쾌한 내색이었다. 저 로브가 아낙차일 확률이 한층 더 높아졌다.


“이 사람은 공작부인이 아니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두 분이 계속 붙어 계시기에.”

라틸은 실실 웃으면서 얼른 사과하는 척하고 재차 물었다.


“그런데 저는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다가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로브 쓴 여자가 라틸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듯 가만히 서서 되묻기만 했다.


“그쪽은 상단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지?”

“일은요. 여러 가지 배우면서 이것저것 익히는 거지요.”

“이런 자리에 훈련 중인 사람을 데리고 오진 않을 듯한데.”

“훈련생도 이런 자리에 따라와야 훈련이 되지요. 쉬운 자리만 따라다니면 훈련이 됩니까.”

로브 쓴 여자는 몇 마디 더 질문했고, 그때마다 라틸은 연신 넉살 좋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한 번씩 다가 공작의 눈치를 살폈는데, 다가 공작은 라틸이 무난히 대답할 때마다 고개를 살짝씩 젓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로브 쓴 여자가 질문을 멈추고 다가 공작을 향해 돌아서는 순간. 라틸은 앞으로 넘어지는 척하며 그녀의 로브를 잡아당겼다.


“!”

여자의 로브가 반쯤 뒤로 넘어가며 모자가 벗겨지고 얼굴이 드러났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일부 드러났으나, 여자는 재빠르게 로브를 도로 당겼다.


“죄송합니다. 마님 로브가 너무 길어서 발이 걸렸어요.”

라틸은 몹시 미안한 척 재빨리 사과했다. 하지만 얼굴 일부와 저 특이한 머리카락을 본 것만으로도 이미 저 여자가 아낙차란 걸 확신하고 있었다.


‘아낙차가 다가 공작을 되살리고, 다가 공작이 그것 때문에 아낙차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나 보다.’

아낙차는 화가 난 듯 다가 공작의 옆으로 가며 라틸을 쳐다보았다. 눈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보나 마나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고 있을 게 뻔했다.

라틸은 몹시 미안한 척하면서 다가 공작 쪽을 보았다.


“저기, 그런데 왜 절 부르신 건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공작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더니 뜻밖에도 아낙차에게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게.”

아낙차는 몸을 움찔했지만, 순순히 시키는 대로 방 밖으로 나갔다. 아낙차가 나가자 공작은 손을 뻗어 협탁에서 웬 무난한 가면을 꺼내더니, 라틸에게 건네며 지시했다.


“이걸 써보게.”

“이걸 왜요?”

“써보게. 내가 찾는 범인이 가면을 쓰고 있었거든.”

“하하 그 범인이 저와 비슷하게 생겼습니까?”

아낙차가 나가자 라틸은 좀 더 편안해진 마음으로 공작이 건넨 가면을 썼다. 공작은 라틸 곁에서 바들바들 떨면서도 그 모습을 꿋꿋하게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니군. 절대 아니야. 하긴. 목소리 체형 전부 다 다른데, 애초에 말이 안 됐지.”

“그런데 왜 제게 가면을 씌우셨나요?”

라틸이 물었으나 다가 공작은 쌀쌀맞게 명령했다.


“이제 나가라.”

다가 공작은 라틸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리 다정하지 못한 사람인 모양이다.

라틸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대답했다.


“그러겠습니다.”

 

 

* * *



“그 여자가 내 얼굴을 봤으니 죽여야 합니다.”

라틸이 나간 후 돌아온 아낙차는 무서운 말을 부드럽게 했다. 다가 공작은 아낙차가 자신을 불완전한 식시귀로 만든 일로 싫어하게 되었지만, 어쨌건 두 사람은 현재 한패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 솜씨 좋은 여우 가면 흑마법사가 그를 맡아주겠다고 하기 전에는 아낙차를 데리고 있어야 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 사비라는 여자. 가까이 두기만 해도 느낌이 너무 나빴다.


“하지만 여기서 또 사람이 죽어 나가면 문제가 생길 거네. 상단 사람들을 풀어주고, 밖으로 나가거든 죽이라 해야겠어.”

 

* * *



“다가 공작 뒤에 있던 여자는 아낙차였어.”

라틸이 방에 돌아오자마자 한 말에 타시르와 게스타가 조금 놀란 눈을 했다.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길래 그냥 벗겨서 봐버렸지. 내가 자기 얼굴을 확인했으니 아마 그냥 두려 하지 않을 거야.”

타시르는 직접 물을 끓여 커피를 타면서 말했다.


“하지만 폐하가 여기 계신 동안엔 손대지 못할 겁니다. 조만간 여기서 나갈 수 있겠군요.”

“맞아. 그래서 말인데, 타시르. 넌 다른 나라에도 ‘부하’들이 있다 했지?”

게스타는 타시르가 암살자란 걸 모르기에, 라틸은 일부러 흑림 암살자들을 ‘부하’라고 표현했다.


“네. 많지요.”

타시르가 흔쾌히 대답하자 라틸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물었다.


“외부에서 다가 공작을 납치할 수 있어?”

“암살은 가능하겠죠. 하지만 납치라면 ‘조용히’는 힘들 겁니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기 손톱을 손톱끼리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그럼 다가 공작이 우릴 내보내기 전에 일을 치러야겠네.”

“일이요?”

이 부분부터는 타시르가 알아선 안 될 일이었다. 라틸은 그런 게 있다 둘러대고서 둘을 데리고 식사를 한 다음, 타시르가 상단주와 대화를 하러 간 틈에 게스타를 따로 데려다 명령했다.


“게스타. 그리핀에게 방 안 상황을 알아본 다음 나한테 오라 해.”

“네…….”

“그리고 넌 계속 대기하다가…… 내가 다가 공작 방 앞에 사람들을 잠시 물러두고 널 부르면 바로 그쪽에 올 수 있겠어?”

“폐하를 위해서라면…….”

게스타가 힘있게 대답하자, 라틸은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고서 얼른 그리핀을 보내라 재촉했다.

그러고서 따로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약 세 시간이 지났을 무렵 그리핀이 라틸을 찾아와 방 안 소식을 들려주었다.


[로드, 그냥 막 얘기를 하고 있던데요? 별거 없었소!]

“누구랑 누가 무슨 얘기를 하던데?”

[로브를 쓴 인간과 침상에 누운 식시귀 둘이었습니다요. 뭐라더라? 식시귀는 로브 쓴 인간에게 자기를 제대로 치료할 방법도 모르면서 왜 멋대로 손을 댔냐고 화를 내고, 인간은 자기가 꼭 식시귀를 고쳐주겠다 합니다요. 기가 막혀라. 인간이 식시귀를 어찌 고친다고.]

“다른 얘기는?”

[그냥 그 얘기만 반복하던걸요. 아, 식시귀가, 더 뛰어난 흑마법사가 근처에 있으니 찾아봐야 한다 하고, 인간은 생판 남을 어떻게 믿냐 하고. 막 그러고 있습니다요.]

“잘했다.”

라틸은 얼추 상황을 파악했다.


‘게스타가 그랬지. 다가 공작 상태가 이상하다고. 다가 공작이 아낙차와 손을 잡긴 했는데 그 일로 틀어졌나 보다.’

생각을 마친 라틸은 그리핀에게 다시 지시했다.


“공작 방을 엿보다가, 공작이 혼자 남게 되면 나한테 다시 알려줘.”

그리핀이 날아가자 라틸은 얼른 가방에서 아낙차가 입고 있던 로브와 비슷한 색상의 로브를 찾아내 걸쳤다.

궁전에 있을 때의 아낙차는 자신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돋보이게 해 줄 화사한 옷을 입고 다녔지만, 여기서는 눈에 띌 수 없어서인지 무난한 검정 로브 차림이었다. 라틸에게도 그 색상 로브는 있었다.

30여 분을 더 기다리자, 마침내 그리핀이 다시 나타났다.


[식시귀가 혼자 남았습니다요, 로드!]

라틸은 그리핀의 머리를 쓸어주고서 로브를 둘둘 만 다음 그리핀에게 건네며 지시했다.


“그걸 들고 후원으로 와.”

그다음 라틸은 혼자 방을 빠져나가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후원으로 걸어가서 그리핀에게 로브를 받아 걸쳤다. 얼굴은 일부러 아낙차의 얼굴로 만들었다.

그러고서 다가 공작의 방 앞으로 태연히 걸어갔다.


“확인 한 번 하겠습니다.”

공작의 방 앞에 있던 호위는 라틸을 보자 그렇게 말했지만, 라틸이 슬쩍 로브에 달린 모자를 들춰내 얼굴 일부를 보여주자 바로 안으로 들어가게 해주었다.

라틸은 방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다가 공작은 침상에 누워 있다가, 라틸을 보자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가라 했는데 왜 또 온 거냐.”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어 왔으니, 사람들을 잠시 물려주실 수 있겠어요 공작님?”

라틸은 아낙차를 싫어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의 말투를 잘 알았다. 라틸이 상냥하게 아낙차 목소리를 흉내 내며 다가가자, 다가 공작이 눈썹을 찡그렸다.


“급히 해야 할 일이라니?”

“공작님을 치료할 방법을 찾은 거 같아서요. 지금 고쳐드릴게요.”

라틸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가 공작은 처음에는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하지만 어디서 이상한 점을 눈치챈 건지, 라틸이 세 발자국 정도 앞에 섰을 때 갑자기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손을 뻗어 종을 울리려 했다.

라틸은 재빨리 다가가 공작의 팔을 잡아 비틀고서 한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종을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에 치워두고서 웃자, 공작이 입이 가로막힌 채 새어나가는 소리로 ‘누구냐’라고 물었다.

라틸은 가면을 살짝 쓸면서 한 손으로 로브를 벗었다.


“!”

로브 안에서 드러난 얼굴은 이번에는 아이니였다. 기겁해서 눈을 부릅뜬 다가 공작에게, 라틸은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왜 그러세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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