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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화. 몸이 반응하는 사람 (309/367)


309화. 몸이 반응하는 사람
2023.02.12.



 
좀 성장한 후에는 궁전에 오지 않게 되었지만, 어린 시절 게스타는 제 어머니인 크렘슈틴 공작부인을 따라 자주 아낙차에게 놀러 왔다.

공작부인의 장자가 틀라와 또래이기 때문이었는데, 게스타는 따지자면 일종의 곁다리였다.

하지만 나이가 더 어린데도 더 얌전하고 조용한 아이는 형들 사이에서 끼어 놀지 못했고, 활달한 틀라도 게스타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다.

아이는 형들이 말을 타러 가거나 검술 놀이, 전쟁 놀이를 하면서 놀면, 자기는 혼자 풀밭을 돌아다니면서 풀을 뜯었다.

이 때문에 게스타가 사교계 활동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아낙차는 바로 게스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재상의 차남은 분명 라트라실의 후궁이 되었다 들었는데.’

아낙차는 머리에 쓴 로브 끈을 당기며 눈을 가늘게 떴다. 황제의 후궁이 왜 여기에 있지? 지금 카리센과 타리움은 어느 때보다 사이가 나쁜데?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게스타와 끌어안고 있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저 청년이 게스타라면…… 그러니까 저 여자는…… 불륜 상대인 셈이다.

아낙차는 여자의 얼굴을 샅샅이 보았다. 어두운 갈색 머리를 한 여자는 눈썹이 짙고 입술이 작은, 동그스름한 미인이었다.

분명 모르는 얼굴.

그런데 지금 황제의 후궁과 저렇게 꼭 끌어안고 좋아하고 있다.


‘밀월여행인가?’

단순히 밀월여행일 뿐이라면, 그게 그릇된 것이라 해도 그녀와 큰 상관이 없기는 했다.


“…….”

그러나 아낙차는 쉬이 의심을 풀지 않고, 경계심을 세운 채 계속해 걸어갔다.

일전에도 몇 번 아낙차가 방문한 적이 있었기에, 다가 공작의 집사는 그녀를 보자 인사를 하고서 얼른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아낙차가 방 안에 들어서자 집사는 바로 문을 닫고 나갔다.

다가 공작은 침대에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다가 아낙차가 들어오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낙차는 그제야 얼굴을 뒤덮었던 모자를 뒤로 넘겼다. 모자가 뒤로 젖혀지며 아름다운 분홍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렸지만, 다가 공작은 그녀를 보자마자 쌀쌀맞게 물었다.


“또 다른 흑마법사를 만났소만. 그자는 날 보자마자 내 상태가 이상하단 걸 알아차리더군. 이게 어떻게 된 일 같소?”

아낙차는 흑마법사 이야기에 심장이 철렁했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또 다른 흑마법사?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공작님?”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소.”

“무슨 말씀이신지. 가장 중요한 게 그거지요. 또 다른 흑마법사인지 흑마법사인 척 구는 괴짜인지, 공작님은 모르잖아요.”

부드러운 목소리는 남을 설득하기 좋았으나, 다가 공작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감탄해 마음을 누그러뜨릴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사람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이 끔찍한 식욕을 억누르지 않으면, 사랑하는 아내와 딸들 가까이 갈 수도 없다.

실제로도 충동에 휘말려 공작가에서 일하는 하인을 죽인 적이 서너 번 있었다. 다행히 시체를 바로바로 처리했지만 이게 계속되면 위험했다.

그는 새로운 흑마법사가 더욱 뛰어나다면 아낙차와 관계를 끊고 그쪽과 손을 잡고 싶었다.


“그건 내가 보면 알겠지. 그쪽은 그 흑마법사를 만나 내 ‘치료’를 넘기도록 하시오.”

아낙차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웃겨라. ‘치료’를 넘기라고? 일부러 식시귀로 만들었는데 그렇게 해줄 리가!

하지만 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아낙차는 다가 공작이 그 새로운 흑마법사란 이를 의심할 만한 정보를 주었다.


“그 흑마법사가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군요, 공작님. 오는 길에 보니 낯선 사람들이 여기에 머무르는 것 같던데요. 좀 수상하지 않나요?”

“상단 사람들이오. 신경 쓸 것 없소.”

“상단 사람이요? 그럼 내가 본 라트라실 황제의 후궁은 뭐였을까요?”

아낙차가 라트라실의 이름을 담자 다가 공작의 눈동자가 금세 새빨개졌다.

다가 공작에게 라트라실 황제의 이름은 금기나 다름없었다. 공작은 그 이름만 들어도 혈압이 수직으로 상승하고 눈가에 핏줄이 터져 씩씩거리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오는 길에 보았지요. 공작님의 정원에 있더군요. 그런데 공작님은 새 흑마법사를 구했다 하시고…….”

아낙차는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혹시 공작님을 현혹하러 온 타리움 사람이 아닐까요?”

 

* * *

라틸은 침상에 드러누운 채 다가 공작을 손에 넣게 되면 뭘 할지를 꼽아보며 즐거워했다.

일단 타리움에 사절단을 보내라 해야지. 대신관이 하이신스를 치료해달란 내용으로.

그리고…… 하긴. 사실 뭘 하라고 할 필요도 없다. 하이신스만 깨어나게 하면, 다가 공작이 가만히 있게만 만들어도 되었다. 나머지는 하이신스가 알아서 할 테니.

그런데 한창 즐거운 생각에 젖어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대답을 하고서 반쯤 상체를 일으키고 보니, 하녀가 우물우물 문가에 서 있었다.


‘이런.’

라틸은 자신이 황제일 때처럼 행동한 걸 깨닫고서, 얼른 문가까지 얼어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대답은 하녀의 뒤에서 지나가던 타시르가 해주었다.


“공작님이 상단 사람들을 다 부른다는데요, 사비 양.”

“다?”

“네. 다.”

왜 굳이? 라틸은 의아했지만, 하녀는 말을 전하러 온 것일 뿐 다가 공작의 속내까지 전해 듣진 못했다.

하녀가 쩔쩔매자, 라틸은 그녀를 보내고서 타시르, 게스타와 함께 상단 사람들을 따라 이동했다.

걸어가면서 다가 공작의 속내가 무엇일까 소곤거렸지만, 게스타와 타시르 역시 쉬이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일행은 큰 방 안으로 줄지어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가 보니 상석에 의자가 하나 있고, 다가 공작이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 뒤에는 로브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써 얼굴을 가린 사람이 있었는데, 다가 공작의 바로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공작부인은 아닌 거 같은데.’

대놓고 저렇게 집 안에서 붙어 있다니. 대체 누구길래?

라틸은 의아해서 로브 쓴 사람을 힐긋거렸다.

그 사람도 마침 이쪽 부근을 보고 있었는데, 라틸의 시선이 느껴지자 모자를 좀 더 눌러쓰며 고개를 돌렸다.


“상단의 일정은 늘 바쁘지. 이 사람 때문에 일정이 연기되어 무척 미안하군. 하지만 다들 들었다시피, 저택에서 나쁜 일이 있었어. 더 나쁜 건 사람을 죽인 범인이 안에 숨어들고 잡히지 않았단 거지. 자네들은 사건 후에 왔으니 범인일 리는 없지만, 그래도 공평하게 해야 하지 않겠나. 내가 범인의 얼굴을 알아서 하나하나 다 확인하는 중이니, 부디 기분 나빠하지 않고 가까이 와서 얼굴을 보여주고 가게.”

라틸은 다가 공작의 지시를 듣고서야, 저 로브 쓴 사람이 누구인지, 다가 공작이 뭘 원하는지 알아차렸다.


‘저 로브 쓴 사람이 게스타와 타시르 얼굴을 알아차렸구나.’

둘 다 알아차린 건지 둘 중 하나를 알아차린 건진 모르겠지만 분명하다.

다가 공작의 말이 정말이라면, 굳이 뒤에 로브 쓴 사람이 저리 가깝게 있을 필요는 없다. 차라리 공작을 호위할 이들이 서 있겠지.

그런데 호위가 아니라 저 사람을 뒤에 둔 건, 다가 공작은 핑계고 저 사람이 얼굴을 확인하게 만들어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싫다고 내빼는 건 누가 봐도 범인의 짓거리라, 우선은 순순히 얼굴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못 알아보면 다행인 거고. 제대로 알아보면…… 그때 가서 뭐든 하는 수밖에.

라틸은 소매 안쪽으로 숨겨온 무기 위치를 떠올리며 상단 사람들과 줄지어 섰다.

다가 공작은 신중한 척 상단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다음.”하고 말해댔다.

상단주 얼굴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다음.”하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순식간에 타시르의 차례가 왔다.


“앞머리가 왜 이리 긴가. 좀 치워 보게.”

라틸은 긴장했으나, 다가 공작은 타시르가 가발 앞머리를 걷어 보이자 바로 말했다.


“다음.”

‘그럼 게스타 얼굴을 알아본 건가?’

라틸은 긴장했다.

다가 공작은 게스타도 가발로 얼굴을 뒤덮고 있자, 지켜보는 자기가 다 갑갑하단 듯 제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쪽도 앞머리 좀 치워 보게.”

게스타가 슬며시 앞머리를 치웠고, 라틸은 배가 조이듯 아파왔다. 긴장감에 혀뿌리가 가렵고 손바닥이 간지러워졌다.


“!”

다가 공작이 게스타의 얼굴을 보고서 눈을 커다랗게 떴을 때는, 당장 앞으로 나서서 그의 목을 잡고 바닥에 메다꽂아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자네 참 잘생겼군!”

 

 
다가 공작은 이렇게 감탄하고는 또 말했다.


“다음.”

라틸은 의아해졌다. 게스타가 잘생기긴 했지만, 저렇게 보고 깜짝 놀라 눈을 부릅뜰 정도로 잘생겼나?

클라인이나 라나문이라면 모를까, 게스타는…… 그 정도는 아닐 텐데. 물론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은 얼굴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계속 그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느새 라틸이 얼굴을 보일 차례였다. 아예 가면으로 얼굴을 바꿨기에 이쪽은 앞머리를 걷고 말고 할 필요도 없겠지만.

라틸은 앞사람의 뒤통수가 옆으로 비켜서자, 성큼 다가 공작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내내 멀쩡하던 다가 공작이 라틸을 보더니 갑자기 손을 후들후들 떨기 시작했다.

손뿐만이 아니라 어깨, 목까지 떨더니, 나중에는 눈을 빠르게 감았다 떴다 하며 눈꺼풀까지 마구 떨어댔다.


“공작님?”

뒤에 로브를 뒤덮고 선 사람이 다가 공작을 놀라 불렀다.


‘여자다.’

혹시 아낙차는 아닐까? 라틸은 이런 생각이 떠올랐으나, 코앞에 상대를 두고서도 로브 모자를 들춰볼 수는 없었다.

다가 공작은 이제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옆으로 몸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다들 나가! 나가라!”

“집사를 시켜 의원을-.”

“나가!”

여자가 버럭 외치자, 상단주는 다급히 밖으로 나갔고 다른 사람들도 얼른 그 뒤를 따라 나왔다.

좋은 마음으로 제안했던 상단주는 뒤늦게 민망한지 작게 욕을 뱉었다.

문이 안쪽에서 ‘쾅’ 소리를 내며 닫히자, 상단주는 혀를 차고서 다들 돌아가자고 손을 저었다.


“방으로 가지. 다가 공작이 꾀병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네.”

 

* * *

다가 공작을 진정시킨 아낙차는 그가 소파에 눕게 했다.

라틸이 사라지자 가까스로 공포심이 가라앉은 다가 공작은 달달 떨면서도 아낙차에게 물었다.


“그래. 누가 후궁이었지? 후궁을 보면 신호를 해준다더니. 왜 아무 말도 없어?”

아낙차는 난처해졌다.

게스타를 본 게 확실하다 생각했고, 그가 여기에 그냥 왔을 리 없으니 상인 사이에 섞여 왔다 여겼는데.

막상 게스타라 ‘생각했던’ 사람이 앞머리를 들어올려 얼굴을 보이자, 인상이 비슷한 전혀 다른 사람이었던 탓이다.

그런데 다가 공작이 끙끙거리면서도 후궁이 누구냐고 묻자 대답하기 곤란해졌다. 이 와중에 ‘내가 뭘 잘못 봤네요.’라고 말하면 공작이 얼마나 화를 낼까.

그렇다고 거짓말하기도 어려웠다. 이건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금방 들통이 날 문제였으니.

난처해진 아낙차는 일부러 말을 돌렸다.


“공작님은 갑자기 왜 쓰러지셨나요?”

다행히 다가 공작은 그 일이 몹시 신경 쓰였던지 바로 대답했다.


“모르겠다. 한 명 유달리 기분 나쁜 사람이 있었어. 보자마자 공포심이 커다래졌지.”

아낙차가 눈을 빛냈다.


“그 여자가 흑마법사인가 보군요.”

“뭐?”

다가 공작은 황당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내가 만난 흑마법사는 목소리가 아주 낮은 남자였어.”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냈을지도 모르지요.”

“일부러 낮게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공작님의 몸이 제일 먼저 반응한 사람 아닌가요?”

아낙차의 말에 공작이 ‘그런가?’ 생각하고 있자니, 아낙차가 얼른 그를 재촉했다.


“그 여자를 다시 불러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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