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연습해뒀지
(306/367)
306화. 연습해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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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화. 연습해뒀지
2023.02.01.
마차 여행은 그리 고되지 않았다. 라틸은 이미 몇 번이나 마차를 타고 장거리를 오간 경험이 있기에, 가져온 책을 읽거나 창밖을 보다 잠을 자며 시간을 보냈다. 멀미도 하지 않았다.
타시르 역시 여러 상단을 끌고 외국을 오간 경험이 있어서인지, 태연하게 서류를 보거나 제 할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라틸이 걱정한 건 게스타였는데, 그래도 흑마법사이기 때문일까. 의외로 게스타도 잘 버텨서 마차 여행은 순조로웠다.
근위기사는 미리 계산한 동선대로 마차를 몰았고, 트리와 히얼란은 마부석에 있다가 이따금 마차가 멈추면 마부석에서 내려 스트레칭을 했다.
평화로운 며칠간이었다.
“우리 순둥이 도련님은 몸이 약하다더니 멀미도 안 해?”
물론 평화롭다는 건 라틸 한정으로, 타시르와 게스타는 라틸이 마차에서 내릴 때마다 쉬지 않고 서로를 공격해댔다.
“……하길 바라는가 봐요.”
“아니, 몸이 약한 척하기로 했으면 좀 확실하게 하는 게 나은 거 같아서. 내가 도와줄까?”
“괜찮아요. 신경 꺼요.”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어. 우리 친하잖아.”
“좀 질척거리네요. 생긴 거랑 다르게.”
“그래서 폐하가 좋아하시나 봐. 생긴 대로 놀면 재미없잖아. 아, 이거 순둥이 도련님 얘기야.”
후궁이 되면 모든 후궁은 다 똑같은 ‘후궁’ 신분을 부여받는다. 그런 것치고는 출신에 따라 사람들의 대우가 다르긴 했지만, 일단 법적으로는 그랬다.
그래서 타시르가 저렇게 말해대는 걸 막을 도리는 없었다. 원래 게스타는 누가 자신을 어떻게 부르건 신경 쓰지 않는 편이기도 했고.
하지만 타시르가 ‘순둥이 도련님’이라 부르며 능청스럽게 반말을 하면 몹시 기분이 거슬렸다.
뿐만 아니라, 타시르는 라틸이 옆에 있을 때도 게스타를 놀려댔다. 그때는 게스타가 대꾸하지 않고 웅크리고 있을 뿐.
그 덕택에 라틸은 타시르와 게스타가 아주 친하다고 제대로 오해해서, 나중에는 다 같이 식사를 할 때 대놓고 웃으며 말했다.
“너희 둘은 정말 친하구나, 타시르, 게스타. 의외인데 잘 어울려.”
게스타는 마지못해 웃었고, 타시르는 게스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서 히죽 웃었다.
“여기 와서 영혼의 친구를 찾을 줄은 몰랐습니다, 폐하.”
라틸은 웃었지만, 웃는 건 라틸뿐이었다.
근위기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차 안에서 싸워대는 타시르와 게스타를 보진 못했지만, 마부석에서 쉬지 않고 싸워대는 히얼란과 트리 때문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나중에는 정말로 둘의 입에 재갈이라도 물려 둘까,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시종들을 보면 윗사람들을 알 수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타시르와 게스타가 친하다고 좋아하고 있으니, 이걸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했다.
그렇게 한 사람만 평온한 마차 여행은 며칠 뒤, 다나산 국경에 도착하며 끝이 났다.
국경 지대에는 이미 마차 열 대로 이루어진 상단 일행이 나와 있었는데, 이들이 앙제스 상단과 사이가 나쁘다 알려진 비밀 아군 퍼퓸로즈 상단이었다.
상단주는 시계를 확인하며 기다리다가, 라틸 일행이 탄 마차가 근처에 멈추어 서자 고개를 쭉 빼서 안에 든 이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그러다 타시르가 나오자, 가발을 썼는데도 바로 알아차리고는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와 등을 몇 번 두드렸다.
“어서 오게.”
“도와줘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당연히 도와줘야지.”
상단주는 듬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타시르와 같은 마차에서 내린 라틸과 게스타를 보았다.
“저쪽 두 사람이……?”
“네. 상단에 섞여 들어가게 해 달란 제 친구들입니다. 폐하의 밀사들이죠.”
상단주는 밀사라 하기엔 너무 움츠리고 있는 게스타를 잠시 못 미덥게 보았으나, 라틸을 볼 때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틸은 허세를 부리는 데 뛰어났기에, 일부러 당당한 자세로 자신 있게 웃고 있던 덕이었다.
“여기는 사비 경이고, 이쪽은 게이미 경입니다.”
상단주는 깊게 얽히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가까이 오지 않고 고개만 까딱해 인사했다. 그러고는 타시르에게 작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중요한 일을 한다니 캐묻진 않겠네. 하지만 절대로 소란을 피우면 안 돼. 알았지?”
“그럼요. 염려 마세요. 일이 잘되면 어르신은 영웅이 되는 거라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며 라틸은 타시르가 저 상단주와 제법 친한 사이라고 확신했다. 아니면 이제 후궁인 타시르에게 저 상단주가 저렇게 편하게 대할 리 없었다. 타시르야 계속 ‘어르신’이라 부른다 하더라도.
* * *
이후 근위기사는 다시 돌아갔고, 일행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달라진 점이라고는 상단 사람이 마부 역할을 대신했단 것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더 간 끝에 트리가 지쳐서 쓰러질 즈음. 드디어 일행은 카리센에 도착해 수도까지 쭉 올라갔다.
수도에 도착한 상단주는 단골인 듯한 여관에 자리를 잡은 다음, 다가 공작가로 보낼 마차 두 대를 따로 골라냈다.
이 두 대 가득 싣고 온 물품들을 다가 공작가에 보이고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르게 하려는 것이다.
공작가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상단주는 깔끔하게 씻고 나온 다음, 라틸과 타시르, 게스타에게 또 당부했다.
“타시르 님. 했던 말을 계속 또 해서 미안한데, 정말로 조심해야 하네. 자네들은 이번에 상단에서 새로 고용한 사람들인 거고, 훈련 겸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는 이들이야. 사람들과 말을 많이 섞지 말게.”
“하하, 염려 말라니까요. 그냥 어르신은 평소처럼 하면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상단주는 마차 안 내용물을 한 번 더 확인한 다음, 일 처리를 진행할 비서와 마차를 지킬 호위 다섯 명, 라틸 일행을 데리고서 다가 공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이미 익숙한 얼굴인지, 공작가 앞에 서 있던 병사들은 상단주를 보자 웃으면서 바로 들여보내 주었다.
“오랜만입니다.”
“수고들 하게.”
상단주는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하인 두어 명이 뛰어왔고, 일행은 모두 마차에서 내렸다. 이제 저들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막 마차에서 내리고 있자니, 안쪽이 몹시 소란스러웠다.
라틸은 소매를 걷고서 짐 나르는 걸 도우려다가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상단주도 무슨 일인가 싶은지, 하인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려다 말고 멈추어 섰다.
안내를 하러 온 하인들도 멈추어선 걸 보니, 갑자기 무언가 일이 터진 듯했다.
일행은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경비병 몇 명이 소란이 일어난 쪽에서 대문으로 급하게 뛰어오는 게 보이자, 상단주는 얼른 그중 하나를 잡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
경비병은 상단주를 뿌리치려다가,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잠시 멈추어 서서 초조하게 대답했다.
“또 안쪽에서 시체가 발견됐습니다.”
“시체?”
상단주는 되물었지만, 경비병은 상단주에게 죄송하다면서 돌아서더니 입구를 지키고 선 병사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문을 닫아! 문을 닫아!”
라틸은 게스타 쪽을 쳐다보았다. 게스타 역시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라틸과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상단주는 어리둥절해 있다가 뒤늦게 그걸 보고는 놀라 경비병을 붙잡았다.
“잠시만. 우리가 나가고 닫게. 우리는 나중에 오겠네.”
하지만 경비병은 단호하게 자신의 팔에서 상단주의 손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공작부인께서 문을 닫고 출입을 금지하라 했습니다. 범인이 도망가는 걸 보셨다고요.”
상단주는 기가 막혀 외쳤다.
“우린 방금 왔네!”
경비병은 그래도 조금의 융통성도 발휘해주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공작부인께 따로 말씀드리면 조치해주실 겁니다. 하지만 저는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합니다.”
상단주는 ‘허 허’ 탄식하며 이마에 손을 올렸다.
라틸은 다가 공작가의 커다란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바탕에 드문드문 파랗게 장식한 저택은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흉흉한 느낌이었다.
거센 바람이 불 때마다 저택에 꽂아둔 카리센의 깃발이 부러질 듯 흔들거렸다.
라틸은 도미스의 전생 기억에서 본 무슨 백작의 영지를 떠올렸다. 도미스가 몇 년간 하녀로 일했던 곳. 이곳 영지는 꼭 그때와 흡사한 분위기였다.
상단주는 기가 막힌 지 두 손으로 머리를 짚고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경비병들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라틸은 게스타를 자기 쪽으로 쓱 끌어당긴 다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시체가 ‘또’ 나타났다 했잖아. 한두 번 나타난 게 아니란 건데. 혹시 다가 공작이 범인일 수 있어?”
공작부인은 범인이 달아나는 걸 보았다 했지만, 방금 막 정문을 통과해 온 라틸은 이 근처를 지나가는 이는 아무도 없는 걸 분명 보았다. 뒤쪽이나 옆쪽은 눈으로 본 게 아니라 뭐라 할 수 없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어 보여요.”
게스타는 확신하진 못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라틸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혹시 오해를 살까 봐 얼른 놀란 표정을 짓고 게스타의 팔을 붙잡았다.
* * *
“우리만 모르는 뭐가 있는 거 같지?”
그 모습을 마차 하나를 두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며 타시르는 히얼란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히얼란은 게스타를 붙들고서 작게 속삭이는 황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네요. 둘이서 비밀 얘기를 하는데요?”
말을 하고 나니 더 불쾌한 듯 히얼란의 표정이 퉁명스러워졌다.
“우리 소단주님 덕에 여기까지 왔는데 왜 소단주님만 쏙 빼놓으시고. 저 겁보는 무슨 일이건 별 도움이 안 될 거 같은데요.”
하지만 히얼란과 달리, 게스타를 붙잡고 선 황제를 보는 타시르의 표정은 오히려 즐겁게 변해갔다.
히얼란은 황당해 물었다.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으세요?”
“왜. 난 이런 거 좋아해. 알아내는 거.”
* * *
상단주가 열심히 애썼지만 결국 일행은 이곳에 하루 발목이 잡히게 되었다.
상단주는 값비싼 물품들이 한가득 든 마차를 가져가는 하인들을 보며 영 찝찝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단주는 한숨을 내쉬고 있다가 타시르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일이 이렇게 돼서 미안하네. 이게 대체 뭔 일인지.”
“괜찮습니다. 어르신 탓이 아닌걸요.”
“그래. 우리가 막 온 걸 본 사람이 많으니 내일쯤이면 나갈 수 있겠지.”
그러는 사이, 다가 공작가의 집사가 나와서 일행에게 일이 꼬인 걸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조금…… 사건이 터졌는데, 범인이 아직 밖으로 나가지 못한 거 같아서요. 출입을 막고 범인을 찾을 생각이니 곧 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내일은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집사가 손님용 방에 머물라며 하인들을 붙여주었고, 라틸도 게스타와 타시르의 방 사이에 자기 방을 하나 받게 되었다.
몇 개 되지 않는 짐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온 라틸은 문을 잠그고서, 제자리에서 넓지도 작지도 않은 방을 둘러보았다.
‘다가 공작을 보러 올 생각은 했지만, 설마 다가 공작가에서 하루를 머물게 될 줄은 몰랐는데.’
라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단주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라틸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만약 시체가 발견된 게 다가 공작의 소행이라면, 다가 공작이 여기에 있단 걸 테니까.
한 번 더 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한 라틸은 창가로 걸어가 밖을 둘러본 다음, 커튼을 꼼꼼하게 치고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작지만 잘 닦여서 깨끗한 거울 앞에 서자 ‘사비 양’이라고 불리는 얼굴이 나타났다.
라틸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가면의 한쪽을 짚었다. 그러자 거울에 비추어진 라틸의 얼굴이 도미스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윽고 그 모습은 다시 아이니의 모습으로 변했다.
‘연습해뒀지.’
그러다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를 듣자, 가면은 사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기본 모습이 사비가 되어 버린 건지, 아직 제대로 집중하지 않으면 의식적으로 바꾼 모습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라도 충분했다. 다가 공작을 만나기에는.
라틸은 거울을 보며 웃었다.
‘다가 공작. 정말로 내 발밑에 엎드려 빌게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