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5화. 이렇게 셋 (305/367)


305화. 이렇게 셋
2023.01.29.



 
식사를 마친 라틸은 게스타를 돌려보낸 후 생각에 잠겨 집무실로 돌아왔다.


‘어떻게 할까.’

자신이 카리센에 직접 가는 걸 고려해보진 않았으나, 게스타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게스타는 심약했다. 상단에 끼어 들어가 카리센에 가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거기서 일이 생기게 되면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어쩌면 너무 덜덜 떨어서 게스타가 수상하단 생각을 다른 사람이 할지도 모른다. 다가 공작은 그 영리한 하이신스에게조차 벌써 두 번이나 승리하지 않았던가.

식시귀가 자신을 두려워하는 건 헤움 황자의 반응을 보아도 알 수 있고…….

그런데 생각에 잠겨 집무실 책상에 앉으며 보니, 시종장이 입술과 얼굴 근육을 이리저리 움찔거리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이상해 라틸이 “왜 그래요?” 하고 묻자, 시종장은 흠칫하더니 라틸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블레 후작?”

왜 사람을 저렇게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보지? 라틸이 떨떠름해서 재차 부르자, 시종장은 주저하다가 털어놓았다.


“실은 폐하. 아까 기르골이란 자를 보고 왔습니다.”

라틸은 마지막으로 보다 만 서류를 한 손으로 펼치다가, 놀라서 종이에 손을 베일 뻔했다. 얼른 손을 떼고서 쳐다보자 시종장이 콧잔등을 씰룩였다.

라틸은 시종장이 무사한가 목덜미부터 살폈다. 물린…… 흔적은 없는데. 죽었다 깨어난 것 같지도 않다. 그럼 괜찮은 건가?

‘괜찮아요?’라고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라틸은 억지로 눌렀다. 그러면 기르골이 위험인물이라는 게 너무 티 나니까.

대신 라틸은 시선을 서류 쪽으로 내리며 흥미로운 척 물었다.


“어떻던가요?”

“…….”

‘왜 대답이 없지?’

기르골이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거 아냐? 라틸은 억지로 서류에 고정했던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시종장은 묘한 눈으로 라틸을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조심스레 물었다.


“성격이 특이하던데요.”

“아. 성격이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성격이 특이해도 괜찮으실 만큼 외모가 마음에 드시는 건지, 성격이 특이해서 더 관심이 가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기르골이 평범하게 굴진 않았나 보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좀 걱정이 되어 라틸은 대놓고 묻고 말았다. 질문을 던지자마자 시종장의 낯빛이 붉게 변하고 입이 오므라들어서 더욱 신경 쓰이게 되었지만.


‘뭐야. 왜 얼굴이 빨개지는데!’

 

* * *

시종장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몇 번이나 물어도 그가 입을 굳게 다물어서, 마침내는 라틸도 더 묻기를 포기하고 그냥 일에만 몰두했다.

안 그래도 내내 열심히 일했던 라틸은, 카리센에 다녀와야 할지도 모른단 생각을 한 후부터 더욱 일에 집중했다.

나흘 정도를 그러고 나자 드디어 결심이 섰다.

온실은 아직 공사 중이라 당장 기르골을 들일 수 없었고, 후궁 중 제일 사고뭉치인 클라인이 조용한 탓에 다른 후궁들도 조용했다.

대적자와 만나고 싶어 하는 귀족이며 상인들이 라나문을 찾아댔지만, 라나문은 자신을 찾는 이들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괴로워하는 듯했다. 당장 뭘 하고 싶진 않은 게 분명했다.

나라는 안정을 찾았고, 틀라 황자를 지지하던 국민들도 대적자 셋 중 둘이 황제와 후궁에서 나오자 조용해졌다.

신전에 갔던 어머니를 모시고 오면서 라틸의 비정한 성품에 대한 이야기도 줄어들었고, 가장 인기 좋은 가십 잡지는 늘 세 가지 이야기를 두고 돌려가며 사람들의 정신을 빼었다.

하나는 대적자 셋 중 누가 진짜 대적자, 혹은 더 강한 대적자이냐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적자는 나타났는데 로드는 왜 없냐’라거나 ‘로드와 대적자가 싸우면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 같은 이야기였다.

마지막 하나는 후궁들 중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 현명한지, 누가 국서가 되는 게 좋은지, 누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지, 귀족들은 누구를 따르는지, 국민 여론은 누구를 선호하는지 등이었다.

시종장이 라틸의 허락하에 살짝 정보를 흘린 덕에, 새로운 후궁이 들어오는데 그 후궁은 평민 부자도 귀족도 왕족도 아닌 사람이란 소문도 은근히 돌고 있었다.

다른 나라들은 카리센과 타리움 사이에서 조용하게 사태를 파악하는 상황.

라틸은 나흘 정도 일에 몰두하며 지켜본 다음, 카리센에 잠시 다녀와도 좋겠다고 확신했다.


‘카리센에 갈 때는 상단을 따라 이동했다가, 돌아올 때는 그리핀을 타고 돌아오면 돼. 그러면 날짜가 훨씬 단축된다.’

가면이 있으니 다가 공작이 얼굴을 알아볼 염려도 없고.

결정을 내린 라틸은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후궁들과 재상, 아트락시 공작, 시종장, 거기에 어머니까지 같이 부른 다음, 급한 일이 있어 게스타를 데리고 며칠 자리를 비워야 한다고 알렸다.


“일은 전처럼 맡아서 처리해주고. 급히 내게 전해야 할 일이 있거든 칼라인에게 알리면 된다. 칼라인의 용병들은 몹시 빠르니 내게 바로 말을 전할 수 있을 거야.”

아트락시 공작은 라틸이 게스타를 데리고 어디에 다녀온단 소리를 듣자 표정이 굳었지만, 재상은 흐뭇해져서 대답했다.


“염려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폐하. 우리 게스타가 폐하를 잘 보필할 겁니다. 우리 애가 순하고 착해서 여행길 동무로 참 좋지요.”

“덜덜 떠느라 말이라도 몇 마디 꺼내겠나.”

아트락시 공작이 빈정거렸지만, 너그러워진 재상은 넘어가지 않았다.


“떤다고 말을 못 하면 가엾고 귀엽기라도 하지. 일부러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누구보단 훨씬 낫네.”

“자네 지금 우리 라나문을 욕한 건가?”

“찔리나? 난 라나문 이름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이름만 빼면 그게 다른 사람 얘기가 되나? 누가 들어도 라나문 얘기면 라나문 욕을 한 거지!”

“아니, 내가 언제 라나문 얘길 했다고 그러나?”

“그만.”

라틸은 떠들어대는 공작과 재상에게 조용히 하라 손짓하고서, 어머니를 바라보며 부탁했다.


“어머니가 중심을 잘 잡고 있어 주세요.”

 

* * *

출발일은 이틀 뒤로 잡혔다.

원래 이 기밀은 라틸이 이야기한 몇몇만 아는 비밀로 남아야 했으나, 트리는 게스타를 따라갔다 와야 하기에 시종이지만 이 비밀 여행에 대해 듣게 되었다.

트리는 급하게 궁전 밖으로 나가 눈에 띄지 않을 의상과 평민들의 복식, 신발 등을 구해와 게스타의 치수에 맞게 수선하기 시작했다.

평민 의상을 준비하라 해서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황제가 같이 가다 보니 어느 정도는 멋을 부려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바쁘게 바느질을 하고 여행 가방을 싸면서도 트리는 연신 한숨이 나왔다.


“우리 도련님께서 그 먼 곳까지 다녀오셔야 한다니.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황제가 게스타에게 카리센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카리센에 다녀올 처지가 되자 좀 겁이 났다.

게스타는 겁이 많고 몸도 약한데, 카리센에 다녀올 수 있을까?

저 망아지 같은 클라인 황자도 카리센에서 온갖 험한 꼴을 다 보고 왔는데, 혹시 그렇게 되진 않으려나?


‘폐하께서 같이 가신다니 아주 위험하진 않겠지만…….’

“괜찮을 거야. 너도 같이 가잖아.”

“괜찮게 해드려야죠, 제가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제가 같이 갈 수 있어서요.”

트리가 신중하게 하는 말을 들으며 게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는 게스타의 뺨이 복숭아처럼 붉어진 걸 보고 어이구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게스타를 걱정하느라 이렇게 골머리를 앓는데. 도련님은 폐하와 며칠간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저리 좋으실까. 하지만…….


‘분명 기회는 기회야.’

트리는 여행 가방들을 힘주어 꽉꽉 묶은 다음, 리본을 매면서 눈을 빛냈다.

다른 후궁들이 없는 곳에서 황제와 둘만 있을 수 있는 건 분명 큰 이점이었다.

방해할 사람도, 시선을 뺏어갈 사람도 없다.

게다가 같이 고생을 하고 나면 없던 정도 싹트는 법 아니던가.


“이 기회에 폐하 마음을 아예 꼭 잡으셔야 해요, 도련님.”

“으응…….”

“정말이에요. 이참에 폐하 마음을 꽉 움켜쥡시다.”

“응…….”

싫지는 않은 듯 게스타도 입술을 씹다가 얼굴을 붉히고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좋겠다.”

 

* * *

이틀 뒤. 마침내 일행은 카리센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트리는 석 달 정도 여행 가는 사람처럼 바리바리 싼 짐을 들고서 황제의 비서가 안내하는 대로 은밀히 짐을 옮겼다.


“이걸 다 들고 간다고?”

마부로 위장해 다나산까지 일행을 실어주기로 한 근위기사는, 트리가 가져온 짐을 보고 뜨악해 물었다.


“이게 다 뭐야?”

“필수품입니다, 필수품.”

기사는 당장에라도 짐을 반쯤 내던지고 싶어 하는 눈이었으나, 트리는 꿋꿋하게 마차 짐칸 한곳에 짐을 꾸역꾸역 실었다.

그러면서도 용케도 황제의 짐을 실을 자리를 만드는 모습에, 근위기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마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트리는 몇 번을 더 그렇게 이동한 다음에야 게스타를 데리러 갔다.

게스타는 트리가 꾸며준 대로 치장하고서 의자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트리가 옷이 구겨지거나 머리카락이 헝클어질까 봐 미동도 하지 말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한 탓이었다.


“이제 가요, 도련님.”

“다 됐어?”

“네. 이대로 살살 내려가셔서 마차에 타시면 돼요. 그러면 폐하께서 마차에 들어오셨다가, 도련님을 보고 감탄하실 거예요. 이야, 평민 옷을 입으니까 색다른 매력이 있네! 이렇게요.”

“설마…….”

게스타는 중얼거리면서도 트리를 따라 조심조심 걸어갔다.

트리는 바람이 불면 온몸으로 바람을 막으며 이동한 뒤, 얼른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게스타는 얼른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고서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마차 안쪽, 그늘진 곳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던 선객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야, 평민 옷을 입으니까 색다른 매력이 있네.”

게스타와 트리는 동시에 흠칫했다.

게스타는 입을 떡 벌리고 대각선 옆에 앉은 타시르를 쳐다보았다. 선객은 타시르였다.

트리도 놀라 물었다.


“왜, 왜 여기 계세요?”

타시르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책을 덮으며 웃었다.

대답은 뒤에서 다른 여자가 해주었다.


“같이 간다.”

휙 고개를 돌린 트리는 멀뚱히 그 여자를 쳐다보다 물었다.


“누구세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완전히 낯선.

대답 대신 그 여자는 자신의 턱을 잡고 위로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놀랍게도 그렇게 하자 안쪽에서 황제의 얼굴이 나타났다.

황제가 손을 떼자, 다시 황제의 얼굴은 사라지고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 나타났다.

트리와 게스타는 물론, 이번에는 타시르도 마차 안쪽에서 탄성을 뱉었다.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폐하?”

“그냥 가면 들키니까.”

트리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황급히 몸을 숙였다. 황제에게 뚱하게 ‘누구세요?’ 했던 게 무서운 듯했으나, 라틸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마차에 올라탔다.


“전에 선황후 폐하께서 폐하를 흉내 낸 적이 있었지요. 같은 방식입니까?”

타시르는 놀랍기보다 호기심이 드는 듯 라틸의 새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캐물었다.

자세히 알려주는 대신 라틸은 손을 내저었다.


“출발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트리는 마차 문을 닫은 다음 마부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마차가 이동하기 시작하자, 밖에서 다그닥 소리가 나며 널찍한 안쪽 공간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라틸은 피로한 듯 창문에 팔을 괴고서 눈을 반쯤 감았다. 겉으로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요 며칠 이동 준비를 하느라 밤새 업무를 보아 몹시 졸렸다.

결국 라틸이 15분을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자, 가만히 움츠려 있던 게스타가 맞은편에 앉은 타시르를 노려보았다.

시선을 받은 타시르는 방긋 웃고서 키스를 날렸다.


“순둥이 도련님,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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