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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화. 기르골의 기준에서는 (304/367)


304화. 기르골의 기준에서는
2023.01.25.


오전 일과를 하러 가기 전, 라틸은 비서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게스타한테 점심은 나랑 같이 먹자고 전해.”

“예, 폐하.”

비서가 나가자 라틸은 집무실로 들어갔고, 이후 오전 일과를 착실하게 해나갔다.

너무 일에만 매달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몰두하는 모습이어서, 며칠 전 새 후궁을 들인단 일로 표정 관리를 못 한 시종장이 감동할 정도였다.

그 기르골이라는 후궁이 대체 어떤 성격이길래, 그 후궁을 들여보내려고 이리 열심히 업무를 보실까.

시종장은 자신이 새 후궁 이야기에 떨떠름해 하자, 라틸이 새 후궁에게 불똥이 튈까 봐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이는 거라 생각했다.

황제가 제대로 일하지 못하면 화살은 으레 후궁들에게로 날아가곤 하니까.

여기에 감동한 시종장은 며칠 전 새 후궁에 대해 안 좋은 반응을 한 걸 사죄할 겸, 직접 예비 후궁 기르골을 만나보기로 했다.

온실을 후궁이 쓸 방으로 개조하고 있으니, 그자를 만난 다음 원하는 스타일이라거나 좋아하는 색상이 있나 물어보면 더욱 좋겠지.

결정을 내린 시종장은 적당히 틈을 보다가, 빠져나갈 여유가 생기자 기르골을 만나기 위해 손님들이 머무는 궁전으로 얼른 걸어갔다.

라틸을 놀라게 해주기 위해 일부러 기르골을 만나볼 거란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다.

윌랑에서 온 사절단은 시종장을 보자 몹시 반갑게 맞아 주었지만, 시종장이 기르골이란 자를 만나러 왔다고 하자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시종장은 그걸 보자 좀 안 됐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선황 때부터 시종장 역할을 해온 그가 윌랑 사절단이 진짜로 왕자를 유학하러 보낸 건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진짜 유학생은 딱 봐도 티가 났다. 하이신스 황제처럼. 얼마나 공부할 준비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왔던가.

하지만 윌랑은 힘으로 후궁을 밀어 넣을 만큼 강한 나라도 아니었고, 외교 문제가 까다롭게 얽혀 있지도 않았다.

윌랑 왕자는 단정하고 깔끔하니 잘생긴 편이긴 했으나, 라트라실 황제가 가장 처음 들인 두 후궁이 라나문과 클라인이었다.

비교군이 너무 우월하게 아름다우니, 윌랑 왕자가 황제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사적인 동정은 동정일 뿐. 사실 동정을 하는 것도 상대는 자존심 상해 할 입장이라, 그는 아무것도 모른 척 우두커니 길을 알려주기만 기다렸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마침내 윌랑 사절이 기르골이 머무는 방을 알려주었다.


“방 안에 잘 없기도 하니까…… 네.”

사절은 제발 기르골이 저 안에 없었으면 좋겠단 투로 알려주고는 돌아갔다.

시종장은 큼큼 헛기침을 한 다음 문을 직접 노크했다.

노크를 두 번 하자마자 누구냐는 질문보다 앞서 문이 덜컥 열렸다.

문이 열리고 드러난, 밤새 쌓인 눈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듯한 외모에 시종장은 라틸의 안목에 찬사를 보냈다.

즉위 선물로 받은 아름다운 남자들은 그냥 다 하인으로 보내 놓고서, 난데없이 유학 온 왕자의 친구를 후궁으로 들인다고 할 때부터 뭐가 있다 싶었지.

멀리서 보아도 대번에 눈길을 사로잡았던 기르골이란 남자는 가까이서 보니 훨씬 인상적이었다.

머리카락을 몇 가닥을 빼고 죄다 뒤로 넘겼는데, 그러고서도 드러난 이목구비는 조화롭다 못해 감탄사가 일 정도였다.

티 하나 없는 피부는 신기할 정도였고, 붉은 눈동자는 보석을 가공해서 박아 넣기라도 한 듯 아름다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건 양 입꼬리가 짓궂게 올라간 입술이었다. 과연 황제가 갑자기 후궁으로 들이겠다 조를 만하다고, 시종장은 홀로 납득했다.

라틸이 지금 시종장의 생각을 듣는다면 ‘내가 언제 졸랐냐’고 억울해하겠지만, 지금 이 자리엔 라틸이 없었다.


“누구?”

기르골이란 자가 목소리까지 좋자, 시종장은 속으로 다시 한번 황제의 안목을 감탄하며 친절하게 말했다.


“저는 황제 폐하의 시종장인 사블레 후작입니다, 기르골 님.”

“시종장?”

기르골은 문가에 옆으로 기대어서 시종장을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찰나 기분 나쁜 시선이었으나, 곧 기르골의 눈이 시원스레 휘어지며 보기 좋은 미소가 떠오르자 시종장은 자신이 뭘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기르골이란 청년은 입술이 예뻐서 그런가, 미소 짓자 안 그래도 아름답던 얼굴이 활짝 더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폐하 사람이네. 여기는 무슨 일로?”

대답하기 전, 시종장은 기르골의 어깨 너머 방을 가득 채운 꽃화분들을 발견했다. 단순히 방 분위기를 바꾸려 기른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꽃들이었다.

그걸 잠시 멍하니 보고 있자니, 기르골이 재차 물었다.


“무슨 일로 왔냐니까, 도련님. 응?”

시종장은 눈길을 꽃화분에 둔 채 방을 어떻게 꾸미고 싶은지 물으려다가, 뒤늦게 놀라 흠칫했다. 도련님?


“도련님……이요?”

시종장은 떨떠름해서 물었다. 후작 작위에 오른 후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한 20년쯤은 들어보지 못한 호칭인데.

질문을 던지자, 기르골은 뭐가 문제냐는 듯 그를 보았다.

시종장은 ‘전 후작인데요’라고 말하려니 평민 출신인 청년을 압박하는 느낌이 날까 봐 살짝 말을 바꿔 알려주었다.


“하하, 저는 40대입니다 기르골 님.”

“그럼 아가네.”

“?!”

“아가라고 할까? 무슨 일로 왔어, 아가?”

속삭이듯 묻는 목소리에 시종장은 소름이 오소소 돌아서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는 건너편 복도에 등을 딱 붙이고 서서, 아직도 문가에 기대어 선 채 웃고 있는 청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 * *

시종장이 기르골의 ‘도련님’과 ‘아가’ 소리에 간만에 충격에 빠져 있는 사이.

라틸은 오전 업무를 끝내고 게스타와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 안에 들어가 보니, 게스타는 초조하게 테이블 주위를 서성이고 있고, 게스타의 시종인 트리는 그 뒤에서 빗을 든 채 연신 잔소리 중이었다.


“제발 좀 가만히 계세요, 도련님. 자꾸 움직이니까 머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이잖아요. 그 부분을 누르려 하는데 자꾸 옆으로 가시면 어떡해요?”

게스타는 트리의 말을 듣고서도 계속 초조하게 굴다가, 라틸이 문 옆에 서서 웃고 있는 걸 발견하자 얼굴이 새빨개져서 인사했다.


“폐, 폐하.”

트리도 얼른 빗을 내려두고 허리를 꾸벅 깊게 숙였다.


“일어나라.”

라틸은 손을 젓고 안쪽으로 들어가며, 트리가 누르려고 애쓰던 게스타의 머리 한 가닥을 살짝 잡아당겼다.


“왜. 이 부분이 귀여운데.”

게스타가 귀까지 벌게지자, 트리는 흐뭇해하며 뒤로 물러섰다. 사실 저 부분은 트리가 일부러 세워둔 부분이 맞았다. 포인트로.

라틸이 자리에 앉자 게스타도 슬그머니 엉덩이를 붙였고, 대기 중이던 하녀들도 웨건을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하녀들이 다양한 음식을 탁자에 내려놓는 사이. 게스타는 눈을 내리깔고 있느라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하녀들이 나간 뒤에도 마찬가지여서, 라틸은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아니, 쟤는 저래서 어떻게 흑마법을 익힌 걸까. 하긴. 흑마법은 책 보고 익히는 거라 했지. 그러면 게스타처럼 여린 사람도 익힐 수 있겠지만.

하녀들이 나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게스타는 움츠렸던 어깨를 조금 내리고서 라틸을 바라보았다.


“언제쯤 날 봐주려나 했다.”

“그게…… 죄송합니다.”

“죄송할 필요는 없어. 그대가 쑥스러워하는 모습도 좋으니까.”

“!”

게스타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눈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생선 좋아해?”

“네? 네.”

라틸은 그 앞으로 생선 요리를 좀 더 가까이 밀어주고, 다시 물었다.


“샐러드는?”

“좋아해요…….”

샐러드도 앞으로 밀어주자, 뒤에 선 시종이 초조하게 발을 움찔거렸다.


“많이 먹어라, 게스타.”

“네에…….”

많이 먹고 있는 거 같은데, 왜 게스타를 보면 더 먹여야 한단 생각이 들까. 라틸은 넓은 어깨와 균형 잡힌 몸을 가진 게스타를 보며, 자신의 편견이 어디에서 오는 걸까 잠시 고민했다.

어쨌든 게스타가 잘 먹는 걸 보니 뿌듯했다. 카리센에 상인으로 잠입하는 일 이야기는, 일단 다 먹인 다음에 꺼내야지.

라틸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게스타가 포크를 들고 눈치를 보며 “폐하께서는 안 드십니까?” 하고 묻자, 그제야 자신도 포크를 쥐었다.


“먹어야지.”

그런데 음식을 먹고 있자니, 게스타가 연신 이쪽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래?”

유난히 티가 나는 시선이라 라틸이 묻자, 게스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중얼거리다가, 라틸이 다시 식사하려 들자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저 담벼락…….”

하지만 막상 라틸이 쳐다보자, 게스타는 곧 입을 다물고 도로 고개를 저었다.


“담벼락?”

의아했지만, 상대가 입을 꾹 다물고 말하지 않으려 하는데 굳이 캐내고 싶진 않았다. 말하기 싫은데 말하게 했다가 뒤늦게 게스타가 후회하면 어쩐단 말인가.

라틸은 더 물어보는 대신, 게스타가 식사를 적당히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타시르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실은 게스타. 타시르가 다가 공작가에 물건을 대는 상단과 친분이 있대.”

“다가 공작가요?”

게스타는 거의 다 비어버린 샐러드 접시에서 양배추를 잘라 먹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정체를 감추고 그 상단에 살짝 넣어줄 수 있다는데. 어때? 그렇게 해서 다가 공작을 한 번 보고 올 수 있겠어?”

질문을 던지면서 라틸은 걱정스럽게 게스타를 보았다.

다가 공작가와 거래하는 상단이라지만, 다가 공작을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곳에 간 뒤에도 눈치껏 다가 공작을 만날 방도를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걸 게스타가 잘 할 수 있을까?

게스타는 생각보다 강한 흑마법사이긴 했지만, 여전히 심약했다. 어제 타시르에게 저 상단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저 좋기만 했는데.

막상 게스타를 보고 나니, 라틸은 게스타가 신분을 감추고 상단을 잘 따라갔다 올 수 있을지 염려되었다.


“불안하면 다른 사람을 같이 보내줄게. 네 안전이 가장 중요하니까.”

라틸의 제안에 게스타는 주저하며 힐긋 뒤를 보았다.

트리는 다가 공작 이야기에 놀라 서 있다가, 게스타와 라틸이 동시에 자신을 보자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폐하. 저희 도련님은 마음 약하셔서 누구 속이고, 그런 건 잘 못 하십니다. 하물며 다가 공작이라니요.”

라틸은 게스타에게 다시 물었다.


“할 수 없어, 게스타?”

게스타는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라틸은 게스타가 당연히 바로 가겠다고 할 줄 알았던 참이라, 조금 당혹감을 느끼며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심약하긴 해도 로드의 편이니 당연히 이런 일은 잘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그렇다고 겁 많은 게스타를 억지로 적진에 보내는 것도 못 할 일이었다.


“안 되겠다 싶으면 하지 않아도 돼, 게스타.”

결국 게스타의 창백한 낯빛을 보다 못해 라틸이 웃으면서 말을 바꾸었다.


“네가 안 되면 다른 사람한테 시키면 되지.”

그 ‘다른 사람’이란 말에 위기를 느낀 건가. 계속 주저하던 게스타가 갑자기 조급하게 “할게요.”라고 말했다.

라틸은 눈썹을 찡그렸다.


“게스타. 억지로 하진 않아도 된다.”

“아니에요. 하고 싶어요. 폐하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

“저…… 대신, 폐하. 폐하께서 같이 가 주시면…… 안 될까요?”

게스타의 요청에 트리의 눈이 아까보다 몇 배로 커다래졌다. 당장 게스타의 입을 틀어막고 싶단 표정이었다.

게스타가 그 표정을 보고 주춤하자, 라틸은 트리에게 나가라 지시하고서 계속 말하라 손짓했다.

트리가 문을 다고 나가자, 게스타는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강하지 않아서…… 다가 공작이 진짜 식시귀가 되었다면 그자한테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식시귀들은 본능적으로 폐하를 두려워하니까…… 폐하께서 같이 가주신다면 안심될 거 같아요.”

라틸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곤혹스러워졌다.


‘내가. 한 번 더. 카리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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