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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화. 가장 국서에 가까운 성품 (303/367)


303화. 가장 국서에 가까운 성품
2023.01.22.


타시르는 평소처럼 눈이 가늘게 휘어지도록 웃으면서 가볍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그저 대화를 좀 나누었을 뿐인걸요.”

타시르의 시종은 억울한 듯 볼이 부풀었으나, 제 주인이 아니라는 데 차마 나설 수는 없어서 눈을 내리깔고만 있었다.

라틸은 히얼란과 타시르를 번갈아 보다가 그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재차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좋아, 타시르. 너나 라나문이나 모두 다 내 후궁이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무시하게 둘 순 없어. 정말 라나문이 널 상인이라 많이 무시했어?”

‘많이 무시하다’라고 쓴 건 라나문이 기본적으로 모두를 늘 무시하기 때문이었다. 라나문은 약하고 권력 없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강하고 권력 높은 사람도 똑같이 무시하니까.

타시르는 이번에도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겼다.


“정말로 아니니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폐하.”

“하지만-.”

“카리센 일로 머리 아프실 텐데. 거기에 신경 쓰셔야지요. 후궁이 몇인데 폐하께서 이런 일까지 다 신경 쓰십니까?”

타시르의 목소리는 배려라기 보다는 정말 ‘후’ 불면 휙 날아갈 버릴 만큼 가벼워서, 오히려 더욱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게 고마워서 라틸은 괜히 마음 한구석이 찡해졌다. 첫인상에 쌍욕을 박아서 성격이 안 좋다고 생각했는데. 얘가 알고 보면 참 착했다.


‘아니, 물론 암살자긴 한데…… 암살자니 착하진 않겠구나. 배려심이 깊은 걸로 하자.’

“폐하?”

“고맙다. 이런 걸 신경 써주는 건 너밖에 없네.”

타시르는 배부른 여우처럼 웃었다.

약간의 습기가 섞인 축축한 밤바람이 불어와 괜히 라틸의 머리카락 끝을 대롱거리게 만들었다.

서넛이 묶어준 머리카락 끝이 말꼬리처럼 흔들거렸다. 타시르는 조금 엉성하게 묶은 그 머리끈을 보다가 웃으며 물었다.


“머리는 직접 묶으신 겁니까? 끈이 이상하게 꼬여 있는데요.”

“어? 아니, 이건 서넛 경이 해준 거라.”

“아. 서넛 경이.”

타시르의 말투에 묘하게 웃음기가 짙어져서, 라틸은 ‘이 말은 괜히 했나?’ 싶어졌다.

서넛이야 그저 좋은 마음으로 머리를 묶어준 걸 테지만, 아무래도 후궁인 타시르 입장에서는 웬 생뚱맞은 남자 이름이 나온 걸 테니까.

그렇게 약간의 후회를 하고 있자니, 타시르가 옆으로 돌아앉으며 라틸의 머리카락을 야무지게 모아쥐었다.


“제가 새로 묶어 드리겠습니다. 끊어질 거 같아서요.”

“그래?”

잘 묶여 있는 거 같은데. 의아하면서도 라틸이 머리를 조금 돌리자, 타시르는 머리끈을 풀고서 손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라틸의 두피를 살살 긁었다.

밤중에 갑자기 타시르에게 머리를 맡기고 있자니 좀 머쓱해서, 라틸은 괜히 자기 무릎만 만지작거렸다.

주먹으로 무릎을 치다가 문지르기를 반복하고 있자니, 타시르가 머리카락을 연신 그러모으면서 물었다.


“아까 보니 시름이 있어 보이시던데. 카리센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라틸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나는 사각사각하는 소리를 들으며, ‘응응’ 하고 아무렇게나 대답하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응?”

타시르의 손길이 생각보다 부드럽고 좋은데, 좀 부끄럽기도 하다 보니 잠시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다.

뒤에서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가 났다.


“카리센 일로 뭐가 고민이십니까?”

“아, 그게…….”

라틸은 별 게 아니라고 대답하려다가 주춤했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약간 돌려서 털어놓았다.


“실은 고민이 있다. 다가 공작이 어쩌면, 사람이 아닐 수도 있거든.”

꽤 놀랐는지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이 삐끗했다.


“정말입니까?”

“어. 내 추측이라, 아닐 수도 있고. 그냥 그렇단 거지.”

“진짜라면 카리센 입장이 난처해지겠군요.”

“그렇지. 그래서 한번 확인을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게스타가 다가 공작을 좀 봐야 해.”

“게스타 님이요?”

여기서 게스타의 이름은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듯 타시르가 물었다.


그가 머리카락을 단단하게 모아 잡아당기고서 끈으로 돌돌 마는 바람에, 라틸은 공처럼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다.

서넛은 그러모아서 대충 묶는 거 같았는데. 타시르는 야무지게도 묶는구나. 어디서 배운 거지?


“게스타 님이 보면 압니까?”

“응. 게스타는 마법 공부를 해서 알 수 있다.”

“그런 거라면 아카데미에 마법사들이 많을 텐데요.”

“기밀로 해야 해서. 쓸만한 패 중 가장 큰 패일지도 모르는데, 남들은 모르게 해야지.”

“게스타 님을 믿으시는군요.”

“착하고 순하고…… 안 믿을 이유가 없지.”

흑마법사란 걸 알고서 좀 놀라긴 했지만, 그냥 흑마법을 쓰는 게스타가 되었을 뿐. 달리 더 이상해진 것도 없고.

게스타는 여우 가면의 모습으로도, 게스타의 본래 모습으로도, 어쨌든 내내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던가.

타시르가 다시 한번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렇죠. 게스타 님은 착하지요. 저도 게스타 님이 좋습니다. 재밌어서.”

“친한가 봐?”

“그럼요.”

“아, 어쨌든 게스타가 다가 공작을 봐야 하는데. 방법이 잘 떠오르진 않아. 지금 카리센과 우리나라는 사이가 좀. 그러니까.”

대신관이 하이신스 황제 만나는 것도 막힌 상황에서, 다가 공작, 그것도 식시귀가 된 다가 공작이 타리움의 후궁이자 재상 아들을 만나주려 할까? 잔뜩 날을 세우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을 텐데?

생각하니 재차 한숨이 나왔다.


“다 됐습니다.”

그 사이, 타시르는 라틸의 머리를 꼼꼼하게 묶고는 다시 돌아앉으면서 웃었다.

라틸은 손을 뒤로해서 타시르가 묶은 머리를 매만져보았다. 시녀들이 묶어준 것만큼이나 깔끔하게 묶여 있었다.


“넌 머리도 잘 묶는구나? 그림도 잘 그리더니.”

“대체적으로 다 잘하는 편이지요.”

라틸은 옆을 보았다가 타시르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닌데, 그냥 얼결에 흘러나온 웃음이었다.

마약상 같다고 자주 놀리긴 하지만, 좀 위험한 일을 하는 인상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는 감탄할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도 그의 이목구비는 또렷또렷했고, 음영조차 그에겐 분위기를 살려줄 뿐이었다.

아니, 어두워서 다크서클이 잘 안 보여서 그런가. 오늘따라 좀 은은한 매력도 느껴지는 게, 더 잘나 보이기도 했다.


‘내려가라 광대야.’

라틸은 자꾸만 위로 올라가는 광대를 내리기 위해 두 손으로 뺨을 문지르다가, 이마에 물방울이 떨어지자 하늘을 보았다.


‘착각인가?’

설마 새가 지나가면서 오줌 싼 건 아니겠지, 생각하고 있자니 다시 물방울이 뺨 위로 떨어졌다.

라틸이 그걸 닦기 전, 타시르가 먼저 손으로 물방울을 닦아주며 말했다.


“비가 오려나 보네요.”

말이 끝나자마자 툭 툭 떨어지는 물방울 수가 눈에 띄게 많아져서, 라틸은 그의 손을 잡고 회랑 지붕 아래로 데려가며 지시했다.


“비가 더 거세지기 전에 얼른 들어가라. 미끄러질라.”

회랑으로 이어진 길을 쭉 따라가면, 평소 다니는 길보다는 멀어져도 하렘까지 갈 수는 있으니 비를 맞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회랑에는 아무래도 지붕뿐이고 벽이 없다 보니, 비가 오면 바닥이 축축해졌다.

회랑 바닥은 모두 매끈한 돌이라, 이런 밤에는 미끄러지기도 쉽기에 라틸이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러겠습니다.”

타시르는 웃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라틸은 그를 배웅해주기 위해 제자리에 서서 그가 먼저 떠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타시르는 돌아서는 대신, 잠시 뭔가 생각하는 척하더니 오히려 라틸 쪽으로 다가와 허리를 조금 숙였다.

귓가에 입이 다가오자 저절로 간지러운 소름이 돋아나서, 라틸은 몸을 움찔했다.

볼에 입을 맞추려는 건가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폐하. 상인들은 일부러 ‘적을 가장한 아군’을 두기도 합니다.”

라틸은 간지러운 기분에 싸여 있다가 난데없는 상인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인?”

게다가 적을 가장한 아군이라니?


“남들이 보기엔 사이가 나빠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이득을 추구하는 이들 말입니다. 저희 상단에도 그런 상단이 몇 군데 있는데요.”

‘몇 군데나?’

“그중 한 곳이 다가 공작가에 여러 물품을 정기적으로 대고 있답니다.”

뜬금없는 상인 이야기에 멀뚱히 있다가, 다가 공작가 이야기가 나오자 라틸은 놀라서 휙 돌아섰다.


“정말이냐?”

타시르가 이미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던 터라, 순식간에 눈과 눈이 몹시 가까워졌다.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입술이나 코가 부딪칠 거리였다.


“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거기에 게스타 님이 들어갈 수 있게 주선해드리겠습니다. 물론 그쪽에선 게스타 님의 정체를 모르도록요.”

이럴 수가 있나! 라틸은 너무 기뻐서 타시르를 꽉 끌어안았다.


“넌 정말. 최고다, 타시르. 네가 최고야.”

“더 해주세요. 더 칭찬해주세요.”

“타시르 최고. 네가 최고. 세상에서 제일 잘난 남자!”

“더요. 더 해주세요.”

그 귀여운 조름에 라틸은 낄낄 웃으면서 타시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가,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놀라 돌처럼 굳어버렸다.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코앞에 대고 있으려니, 그의 외모가 지나칠 정도로 아찔해 순간 심장이 뚝 떨어지는 듯했다.

머쓱하게 손을 내리자, 타시르가 라틸의 이마 위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칭찬받아 갑니다.”

“!”

 

* * *

라틸이 타시르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자리를 피해 있던 서넛은, 라틸이 기분 좋은 얼굴로 돌아오자 잠시 심란한 눈으로 보다가 눈이 마주칠까 봐 얼른 시선을 내리며 물었다.


“타시르 님이 폐하게 웃음을 드렸나 봅니다.”

“타시르는 날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그래서 날 더 편안하게 하는 거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머리도 좋고. 함께 의논하고 걸어갈 수 있는 사람 같습니다.”

“…….”

“사실 사적인 감정을 빼고 보면. 타시르는 후궁보다 국서에 어울리는 사람이죠.”

라틸의 말에 서넛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암살자가요?”

“아…… 뭐.”

암살자이긴 한데. 그것도 암살 집단 대장이긴 한데. 사실은 암살 집단으로 위장한 다른 집단 아닌가.

라틸이 어색하게 웃자, 서넛은 바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라틸은 아니라고 손을 젓고서 계단을 계속 올라갔다.

서넛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라틸은 타시르가 다른 후궁들에 관해 자신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는 점 역시 국서답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국서가 없고, 라틸 역시 후궁들의 갈등을 바라기도 하기에 하렘 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나중에 국서가 생긴다면 그쪽에서 작은 사건들은 알아서 조율해야 했다.

의무는 아니지만, 그렇게 해주는 편이 관리하기 좋았다.

그러면서도 신분 높은 후궁들이 화가 나서 다른 사고를 치지 못하게 달래며 가지치기도 해야 할 텐데, 라틸이 보기에 지금 후궁들 중 그런 일을 할 만한 건 타시르 정도였다.

게스타는 너무 순하고, 칼라인은 다른 후궁들을 방치할 테고, 클라인은 자기가 나서서 죄다 잡을 것 같고, 라나문은 전부 쫓아낼 것 같고, 대신관은 너무 착해서 휩쓸릴 것 같아서.

기르골과 므라딤은 아예 예외다. 그 둘은 카테고리가 다르니까.

방 안에 들어온 라틸은 게스타 건에 대해 나아갈 길이 보이자 기쁘고 가벼운 마음에 콧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방 안에 따라 들어가지 못하고 선 서넛에겐, 닫히는 문 너머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너무나 괴로웠다.

언제까지나 자신은 이 문 뒤에 있어야 한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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