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토끼엔 관심이 없다
(302/367)
302화. 토끼엔 관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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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화. 토끼엔 관심이 없다
2023.01.18.
“설마. 그대는 여기서 떨어져도 안 죽잖아.”
“제가 죽는지 안 죽는지 어떻게 아시고요.”
“죽어?”
라틸이 조심스럽게 묻자, 칼라인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글쎄요. 시도해 본 적이 없어서.”
라틸은 창백해져서 지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높아서 아래쪽 일부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칼라인이 다시 물었다.
“후궁 이야긴 무엇입니까?”
“그 소문은 어떻게 들었어?”
“전 귀가 밝습니다, 주인. 인간들보다는요.”
라틸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디서 빠져나간 소식이야? 물론 기밀이라고 지시한 게 아니니 충분히 소문이 새어나갈 수 있다지만…….
“클라인이랑 라나문을 피해 왔더니 여기서 잡히네.”
훌쩍 난간을 뛰어넘은 칼라인이 라틸의 곁에 서자, 라틸은 구시렁거리길 멈추고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의외로 칼라인은 그리 기분 나쁜 내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라틸이 궁지에 몰린 쥐처럼 기죽은 걸 재밌어하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생각하고 있자니 서넛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칼라인 님. 기르골입니다. 들어온단 후궁.”
그 말이 끝나자마자 놀라울 정도로 칼라인의 따뜻한 눈동자에서 웃음기가 싹 빠져나갔다.
라틸은 황급히 서넛을 째려보았다. 그걸 왜 굳이 지금 말해?
서넛은 눈길을 피했다. 라틸은 이 문제에 있어서는 서넛도 적이란 걸 깨달았다. 아까 후궁들이 불쌍하니 뭐니 할 때부터 알아봐야 했는데!
다시 라틸은 칼라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렇게 돌처럼 있다가 돌처럼 물었다.
“기르골이요?”
“……그렇게 됐다.”
칼라인은 입을 다물었다. 라틸은 그의 눈치를 연신 살폈지만, 칼라인은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라틸은 계속 그의 눈치를 보다가, 이대로 있다간 안 되겠다 싶어서 나름대로 변명을 시도했다.
“사이가 안 좋은 건 알지만, 칼라인. 이건-.”
칼라인은 차갑게 말을 끊었다.
“사이가 안 좋은 거 아닙니다. 증오하는 겁니다.”
“!”
휙 돌아선 그가 단숨에 난간을 도로 넘어가 훌쩍 뛰어내렸다.
라틸은 놀라서 난간을 두 손으로 붙들고 고개를 내밀었지만, 까마득한 아래로 칼라인은 망토 자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라틸이 떨어질까 봐 염려되는지 뒤에서 서넛이 조심스레 라틸을 잡아주었다.
한숨을 내쉰 라틸은 고개를 도로 뒤로 뺐다. 머리가 아팠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했다는 거야? 당장 기르골을 상대할만한 실력자도 없으면서.
‘내가 각성하면 상대가 된다지만 기르골을 상대하기 위해 소중한 사람을 비참하게 죽이고 그 피를 먹고 싶진 않다고…….’
* * *
힘없이 지붕에서 내려온 라틸은 아무 생각 없이 방으로 돌아갔다가, 여전히 대치 중인 라나문과 클라인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말다툼을 하다가 라틸이 오자 고개를 거의 동시에 돌렸는데, 어두운 표정이 밖으로 드러났는지 좀 놀란 얼굴로 다들 입을 다물었다.
의도하고 이런 표정으로 온 건 아니었으나, 차라리 잘 됐다 싶어서 라틸은 더욱 지친 목소리를 냈다.
“지금 좀 힘든데. 나중에 얘기하지.”
무슨 일로 온 건지 묻지도 않고서 라틸은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고서 문에 귀를 대고 들으니, 라나문과 클라인도 일단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가는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라틸은 비척비척 침대로 걸어가 엎드렸다.
* * *
라틸은 일단 당장의 고비를 넘겼으나, 돌아가는 내내 클라인과 라나문은 계속해서 장소만 바꾼 2차전을 벌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클라인이 참지 못하고 라나문에게 성질을 내면, 라나문이 거기에 날카롭게 대꾸하는 식이었다.
목적지까지 비슷하다 보니, 둘의 말다툼은 끝이 없었다.
“너 때문이다. 네가 방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폐하가 지치셔서 그냥 가버린 거야.”
“황자님이 먼저 도착한 거라고 우기시더니. 그새 말이 바뀝니까.”
“너는 표정이 없고 사람이 삭막해. 옆에서 대화하면 사람을 질리게 하지. 그러니 너 때문이다.”
“…….”
“폐하는 나랑 있으면 늘 웃어.”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라나문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드러났다.
클라인은 그걸 보자, 자신이 라나문의 약점을 찔렀단 걸 깨닫고서 더욱 활짝 웃으며 자랑했다.
“차가운 미인이 좋은 건 거리를 두고 있을 때지. 차가운 배우자와는 오래 갈 수 없어. 정이 쌓이지 않으니까. 부부는 애정을 주고받는 거지, 네놈처럼 고고한 척 허리만 펴고 있는 게 아니거든.”
“그걸 아는 분이 창고 열쇠를 들고 달아나셨습니까.”
하지만 두 번 말을 주고받자 클라인도 최근 들어 가장 수치스러웠던 기억을 찔려 눈을 부릅떴다.
라나문은 그 옆을 휙 지나가버렸다. 옷깃조차 닿기 싫다는 듯 몸을 교묘하게 틀어가며.
“저, 저 쪽제비 같은 자식이!”
“진정하세요, 진정하세요 황자님.”
“진정이 되겠느냐! 저 쪽제비가 나한테!”
클라인이 고함 지르는 소리가 고요하던 밤거리를 울렸으나, 라나문은 반응하지 않고 걸어갔다.
조용히 그 뒤를 따르던 카르둔은,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힐긋 뒤를 돌아보면서 비웃었다.
“어쩌면 저렇게 무식하고 멍청하고 늘 꽥꽥 울어대는 황자가 있나 모르겠습니다. 황족 피가 아까울 정도입니다.”
열쇠를 들고 달아나기까지 했던 황자가 자국에서 살짝 고생 좀 했다고 황제의 챙김을 받는 꼴이, 요 며칠 얼마나 보기 싫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저렇게 오리처럼 항의하고 있는 걸 보니 유쾌해졌다.
카르둔은 역시 저딴 황자는 자기 도련님에게 상대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그렇지요, 도련님?” 하고 라나문을 보았다가 놀라서 딸꾹질했다.
“도련님?”
라나문의 고운 이마 가운데 뚜렷한 불쾌함이 새겨져 있던 것이다.
남들은 잘 구분하지 못하겠지만, 카르둔은 라나문의 표정을 잘 읽는 편이었다.
카르둔은 라나문이 좀 화났다는 걸 알아차리고 놀라 물었다.
“도련님? 설마 저 멍청이 황자 때문에 화나신 겁니까?”
“차가운 배우자와는 오래 가기 힘들다고.”
“예? 아…… 도련님, 저 황자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나오는 대로 다 지껄이는 겁니다.”
하지만 라나문의 긴 속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졌다.
라나문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저 망아지 같은 황자의 말 따위는.
하지만 자신만만하게 입궁했는데, 황제는 예상외로 그에게 넘어오지 않고 있어서 조금 걱정되는 시기였다.
대적자인 걸 드러내서라도 관심을 잡고 싶었는데, 그 대적자 숫자가 세 명이라 그런가. 황제가 의외로 거기에도 큰 신경을 안 쓰는 눈치라 더욱 초조했다.
그 와중에 관심도 없는 다른 귀족들만 줄줄이 찾아오니 영 번거로웠다.
그런데 새 후궁이 들어온다고 한다. 일 년도 못 되어 새 후궁을 받아들인다는 건, 기존 후궁들이 마음에 안 든단 이야기 아닌가.
거기에 대고 클라인이 ‘너는 그림의 떡’ 같은 소리를 해대는데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카르둔.”
“네, 도련님.”
“타시르를 불러와라.”
* * *
클라인과 라나문, 칼라인과 달리, 타시르는 새 후궁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평소처럼 상단 관련 서류와 여러 정보 보고서만 살폈다.
오히려 히얼란이 더욱 죽을상이었다.
“새 후궁이라니…….”
“왜 그래, 히얼란. 새 후궁이 오는 게 벌써 세 번째잖아. 슬슬 익숙해지지 그래?”
“익숙해지다니요? 세 번째니까 거듭 충격이 늘어나는 겁니다. 소단주님은 왜 이리 태평하십니까! 클라인 님이랑 라나문 님은 벌써 폐하께 따지러 갔다던데요!”
타시르가 미소를 짓자, 히얼란은 더욱 흥분했다.
“웃기세요? 이게 웃기세요?”
“진정해 히얼란. 진정하고 네가 폐하 입장이라 생각해 봐.”
“뭐 비슷해야 상상이 가고 생각을 해보죠. 하늘과 땅처럼 떨어진 처지에 뭘 입장을 생각해 봅니까?”
“네가 여자친구 8을 사귀기로 했는데, 네 여자친구 4랑 5가 와서 항의한다 생각해봐.”
“죽어야죠! 여자친구 4랑 5가 있는데 8까지 있으면 죽어야죠!”
“폐하께 그대로 전해드릴게. 잘 가, 히얼란. 넌 좋은 부하였고 충직한…….”
태연히 말하던 타시르가 갑자기 슬픈 목소리를 내자, 히얼란은 기겁해서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폐하 말고 저 같은 보통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니까 상상이 안 간다고요. 보통 사람은 후궁이 없잖아요. 폐하의 입장에서 생각이 안 가요.”
“그럼 내가 대신 생각해줄게. 클라인 님과 라나문 님이 폐하께 가서 뭐라 따지든,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폐하의 총애만 잃어. 왜냐. 귀찮고 번거로우니까. 됐어?”
간결한 대답에 히얼란은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그럼 어떡해요, 소단주님. 우리 소단주님은 폐하랑 입맞춤 한 번 못 해보고 사는데, 자꾸 밑으로 새로운 사람들은 들어오고…….”
히얼란의 목소리가 다 죽어가자, 그제야 타시르의 입가에 미소가 올라왔다.
“물론 나도 가만히 있진 않을 거다. 이제 거의 다 분석했거든.”
“분석하다니요?”
“하이신스 황제…….”
타시르가 무어라 더 말하려 했으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대화가 끊어졌다.
타시르가 눈짓하자, 히얼란은 얼른 문가로 다가가며 물었다.
“누구냐.”
호위가 대신 대답했다.
“라나문 님의 시종인 카르둔이 왔습니다.”
카르둔? 히얼란은 제 주인만큼 재수 없는 시종을 떠올리고서 타시르를 보았다.
타시르는 어느새 책상을 말끔히 치우고 일어나고 있었다.
“라나문 님이 애가 타긴 타나 보네. 가자. 내게 도움을 청하는 걸 거다.”
* * *
카르둔이 전한 말은 라나문이 타시르를 만나고 싶어 한단 이야기였다.
타시르가 라나문의 방으로 가자, 라나문은 타시르가 예상한 그대로 말했다.
“폐하께서 새 후궁을 들이려 하는데. 막을 방법을 찾아봐.”
히얼란은 반은 놀라고 반은 감탄하며 타시르 쪽을 보았으나, 타시르는 평소처럼 웃고만 있었다.
문득 히얼란은, 라나문이 타시르와 한배를 타기로 했다지만 그래도 같은 후궁인데 저렇게 명령질을 하는 게 아니꼬워졌다.
그래도 표정을 관리하고 있자니, 타시르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찾아봐야지요. 그런데…….”
그러다 타시르가 말끝을 흐리며 묘한 미소를 짓자, 라나문이 물었다.
“왜 그러지?”
“실은 라나문 님. 며칠 전, 클라인 황자님이 부탁하셨습니다. 제가 황자님이 국서가 되는 걸 도왔으면 좋겠다고요.”
“황자가?”
“예. 아시다시피, 이 타시르는 평민 출신이다 보니 국서 자리에 오르기 어렵지요. 그래서 제게 부탁하신 모양인데…….”
타시르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조적인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받아들일 건가?”
라나문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타시르가 대답하기 전. 라나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대답보다 먼저 대답이 나왔다.
“받아들여도 상관없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습니까?”
“단, 나와 한배를 타진 못하게 되겠지. 그리고 날 찾아온 건 네가 먼저란 걸 기억해라, 상인.”
라나문이 일부러 타시르를 상인이라 부르자, 히얼란은 움찔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 와중에도 타시르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럼요. 하지만 저도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아시다시피, 평민인 저는 황자님의 명령을 어길 만한 처지도 아닌지라…….”
거기에 심란한 척 한숨까지 내쉬자, 라나문은 짧게 웃었다.
“역시 상인은 상인인가. 나와 황자 사이에서 저울추라도 달아보고 싶은 모양이야?”
짧은 웃음만으로도 서늘한 분위기가 동강 나면서, 라나문의 미소는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다.
라나문 아트락시의 최고 무기는 확실히 얼굴이구나. 히얼란은 기분이 상한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어 물끄러미 소단주를 보았다.
“…….”
게스타의 시종이 용하다는 미용 도구들을 사들이고 있다는데. 히얼란은 아무래도 자기도 나서야 할 것 같다고 다짐했다.
소단주님이 잠들면 살짝 얼굴에 머드팩이라도 올려놔야지.
저 다크서클만 없애면 우리 소단주님도 경쟁이 될 거 같은데. 다크서클 때문에 좀 밀리는 듯해 억울했다.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한 마리도 못 잡을 수 있단 이야기. 되새겨 봐라, 상인.”
* * *
늦은 저녁이었지만, 라틸은 여전히 다가 공작을 게스타에게 보일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하이신스를 대신관이 보게 하는 건 다가 공작이 게스타 손에 들어오면 저절로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다가 공작과 게스타를 만나게 할 방법이 영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시름에 젖어 걸어가고 있자니, 어디서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틸은 멈칫하고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그쪽으로 가보았다.
정원 벤치에 타시르가 미소 띤 얼굴로 앉아 있고, 옆에서 히얼란이 화를 내고 있었다.
“라나문 님은 진짜 너무하세요. 말끝마다 상인 상인. 소단주님이 상인 출신이라고 무시하는 거잖아요.”
라나문이 타시르한테 뭐라고 했나? 라틸은 조금 더 가까이 가보았다.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해야죠. 상인이 뭐 어때서요. 라나문 님은 그냥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거뿐이잖아요. 소단주님도…… 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얼마나 열심히 일하시는데요. 라나문 님은 만인이 인정하는 게으름뱅이면서 잘난 척…….”
타시르 시종이 내뱉던 끝도 없는 비방은, 시종이 라틸을 발견하고 기겁해 말을 돌리면서 끝났다.
“하실 만 하시죠, 라나문 님은.”
황제의 후궁을 욕하다가 걸려서인지, 시종은 얼른 허리를 숙였다.
타시르는 아까와 별다를 바 없는 얼굴로 벤치에서 일어났다.
라틸은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히얼란이 화내는 걸 듣고 봐서 그런가. 타시르의 웃는 얼굴이 좀 슬퍼 보이기도 했다.
“방금 네 시종이 한 말. 정말이냐, 타시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