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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화. 연이은 충격에 몹시 심란 (299/367)


299화. 연이은 충격에 몹시 심란
2023.01.08.


그의 손가락이 느리게 라틸의 피부를 지나가자, 발목과 한참 떨어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라틸은 곤란해졌다. 차가운 손가락은 물에 젖어 더욱 축축했고, 라틸의 피부는 여기저기 밖을 돌아다니며 메말라 있었다.

그의 차갑고 촉촉한 손가락이 다리에 닿자 느낌이 이상했다. 하지만 이상한 느낌은 불쾌하기보다는 괜히 심장을 일렁이게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라틸이 발을 뒤로 빼자, 기르골은 손가락을 치우고서 웃었다. 바닥에 한 팔을 괴고 몸은 물 속에 담근 채, 기르골은 라틸을 올려다보았다.


라틸은 기르골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물었단 걸 떠올렸다. 뭘 물었더라. 머리가 잠시 돌아가지 않아서 라틸은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고 있자니 물방울이 뺨으로 튀었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자, 기르골이 씩 웃는 얼굴로 손가락을 위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물을 살짝 뿌린 게 분명했다.

뺨에 튄 물기를 손등으로 쓱 닦자, 기르골이 늘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은 안 해주면서. 왜 그렇게 예쁘게 쳐다봐?”

그냥 본 거다. 기억이 안 나서.

어쨌든 저 말을 듣자 정신이 좀 돌아왔다. 정신이 돌아오자 기르골의 질문보다 아까 얼핏 보았던 인어 꼬리가 먼저 떠올라서, 라틸은 황급히 물었다.


“아까 꼬리 뭐야?”

“내 꼬리야.”

‘어디서 저런 거짓말을!’

“그댄 꼬리가 없잖아.”

“그래서.”

기르골이 눈웃음을 지었다.


“하나 장만했어.”

매력적인 웃음이었지만 라틸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어디서?”

인어 꼬리를 시장에서 팔 리는 없다. 라틸이 알기로 저 꼬리를 그나마 구할 수 있는 건 하렘 호수에서 사는 피인어들 뿐이었다.

물론 인어들이 자기 꼬리를 팔 리 없을 테니, 그들에게서 꼬리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을 터. 방법은…….

라틸은 눈앞이 하얘졌다. 뜯었을까? 뜯은 거야? 뜯은 건가? 분노하는 므라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안 그래도 기르골을 죽일 거라고 씩씩대는 피인어 수장인데. 만약 자기 부하의 꼬리를 기르골이 뜯어간 걸 알게 된다면…….

머리가 지끈거려서 라틸은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기르골을 후궁으로 받아들이면 므라딤은 반응이 어떨까.

므라딤은 기르골을 죽이고 싶어서 이쪽에 붙었는데, 기르골까지 여기에 오면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일단 므라딤한테도 말을 해봐야 하나.

멍하게 있는데 다시 발목에 차가운 물이 닿는다. 라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기르골이 손바닥에 물을 담아 라틸의 발에 붓고 있었다.

라틸이 발을 치우자, 기르골이 아양을 부리듯 웃었다.


“무슨 생각해? 왜 내 말에 대답 안 해 줘, 아가씨?”

“……대답?”

“날 후궁으로 받을지 말지 고민해 보기로 했잖아.”

그가 물에서 몸을 조금 더 빼더니, 라틸의 발목을 한 손으로 감싸 쥐고 복숭아뼈에 입을 맞추었다.


“응? 제자님?”

입술이 닿은 것뿐인데 힘이 풀려서 라틸은 비틀거렸다. 물가에서 미끄러졌다간 큰일이어서, 라틸은 비틀거리다 그냥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균형은 잡혔지만 기르골의 시선이 더욱 가까워지고 말았다. 붉은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라틸은 마른침을 삼키고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내가 볼 땐 말이야, 아가씨.”

“뭐가.”

“아가씨도 나한테 관심이 있는데.”

“!”

“왜 허락을 안 해?”

네가 미쳤으니까.

뻔뻔하고 자신만만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질문에 라틸은 입술을 씹었다. 왜 갑자기 기르골을 찾아 다녔는지, 자신이 멍청하게 여겨졌다. 아직 그를 후궁으로 받을지 말지 결정도 못 했으면서.

하지만 그가 멀쩡히 있는 걸 보지 않으면 신경이 쓰이고 불안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기르골은 보이면 보이는 대로, 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대로 존재감이 강했다.

그의 손이 라틸의 발목을 매만졌다. 손길은 부드러웠으나 라틸은 그가 갑자기 눈이 돌아가 자신의 발목을 부러뜨릴까 봐 염려되었다.

슬그머니 발목을 빼내자 기르골은 굳이 따라오는 대신 손을 도로 집어넣고는, 라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양처럼 웃었다.


‘양은 무슨. 양의 탈을 쓴 늑대겠지.’

주저하다가 라틸은 말을 돌렸다.


“그대 방에 가보았다. 그대가 없었어. 꽃들도 없고.”

“슬슬 아가씨가 올 거라 생각해서. 이사 준비를 했어.”

“어디로?”

“칼라인 옆방으로 줘, 제자님.”

칼라인이 죽으려고 할 텐데. 아니면 죽이려고 할 텐데. 아니, 왜 대답도 듣기 전에 당연히 하렘에 들어올 것처럼 구는 거야?


“안 돼.”

“그럼 우리 대적자…….”

“안 돼!”

그건 절대 안 되지. 라틸이 단호하게 외치자 기르골이 마음에 드는지 만족스레 웃었다. 라틸이 질투라도 한다는 태도였다.

절대로 질투가 아니었지만 라틸은 기르골이 행복에 젖어 있도록 놔두기로 했다.


“대체 날 어디에 보내고 싶은 거야, 제자님?”

기르골은 흐뭇하게 웃었으나, 라틸은 그의 동공이 조금 커다래진 걸 알아차렸다.

라틸은 그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닌 일을 떠올렸다. 그가 자기 방에 없고 꽃화분을 다 치워두었을 뿐인데도 심장이 철렁하고 오싹하던 일을. 빈방 안에서의 그 긴장감을.

라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어쩌면 선택지가 없었는지도 몰랐다.


“온실…… 줄게.”

“온실?”

마음에 드는지 기르골의 동공이 도로 작아졌다.


“온실?”

 

* * *



“기르골을 후궁으로 받고 온실을 주신다고요?”

다음날. 라틸은 식당에서 만난 서넛에게 기르골에 관해 이야기했고, 서넛은 듣자마자 놀라 되물었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평소보다 두 배는 커져 있었다.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았는데 숙취가 올 수도 있을까. 라틸은 욱신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넛이 자연스럽게 컵에 얼음과 음료수를 따라 건넸다. 라틸은 그걸 받아 한 모금을 마시고서 한숨을 뱉었다.


“기르골은 꽃 사이에 있을 때 행복해하는 거 같습니다. 어차피 지금도 온실이랑 화원을 쓸고 다니니까. 그냥 온실을 주고, 거기서 살 수 있게 일부를 개조해 줄 생각입니다.”

온실에 붙어 있는 휴게실이 제법 크기가 넓었다. 라틸은 거기를 침실로 개조하기로 했다. 그러면 쉬다가 밖에 나와서 꽃 뜯어 먹다가 하겠지.

서넛은 반대하고 싶은지 표정이 굳어져서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자기도 달리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는 않는지, 말을 꺼내진 못했다.


“나도 좋아서 받아들이는 거 아닙니다.”

“……사람들에겐 뭐라고 하실 생각이십니까.”

“기르골 얼굴 보면 다들 이유는 알아서 찾을 겁니다.”

‘내 이미지가 더욱 호색한이 되겠지만.’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스푼을 내려놓고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래도 차라리 결정을 내리고 나자 마음이 좀 편했다.

일단 어제 기르골에게 신신당부를 하긴 했다. 그가 다른 후궁을 죽인다거나 크게 다치게 하지 말라고.

기르골은 라틸의 말에 내내 실실 웃고 있었지만, 라틸이 “나한테 잘 보인답시고 누구 머리를 잘라 온다거나 누구를 납치해 온다거나 하면 안 돼.”라고 말하자 표정이 굳었다.

이미 입가는 깨끗했지만 라틸은 상념에 빠져 계속해서 입술을 문질러댔다.

그러다 서넛의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가는 걸 보고 옆을 보니, 서넛이 무표정하게 선 채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서넛은 서 있고 라틸은 앉아 있는 터라 그 모습이 정면에서 보였다.


“그렇게 싫습니까?”

그걸 본 라틸이 묻자, 서넛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긴. 서넛 경은 나이트니까. 본능적으로 싫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가까스로 손수건을 내려놓았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됐으니…… 진짜로 잘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적자와 대적자 편들, 로드와 로드의 편들 죄다 모였습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여기가 전쟁의 시발점 됩니다.”

하지만 잘하면 500년 주기로 터지던 그 전쟁을 하렘 안에 꽁꽁 묶어둘 수도 있다. 이 목숨을 무사히 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갑자기 긴장감에 손바닥이 간지러워져서, 라틸은 몇 번이고 연거푸 한숨을 몰아쉬었다.

서넛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굳이 부정적인 말을 더 얹는 대신 물었다.


“그럼 기르골은 언제 들어옵니까?”

“온실 정비가 끝나고 적당히 후궁을 더 받을 만할 때가 되면.”

“……그럼 기르골은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 * *

기르골은 지금 신이 나서 자신의 미로 저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기르골은 아주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 긴 세월을 살면서 단 한 번도 후궁 노릇은 해보지 못했으나, 온갖 귀족 노릇은 다 해보았다.

사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일단 한 단추만 끼우고 나면, 이후로는 계속 자신이 후계자 역할을 거듭하면 되니까.

예를 들어 500년 전. 한때 안야가 후계자로 있었고 이후 도미스가 후계자 자리에 오른, 영구한 영광의 자리를 약속받은 그 빛나는 클레랜드 가문의 초대 대공은 사실 기르골 본인이었다.

기르골도 그 가문을 제법 아끼는 편이었다. 도미스 클레렌드가 로드였다는 게 알려지면서 그 가문의 영광도 끊어지고 말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기르골이 궁중 예법에 익숙하단 점이었다. 물론 500년이 지나면서 그 예법이란 데도 변화가 여러모로 찾아왔겠지만.


“기르골 님!”

기르골이 나타나자, 앞치마를 두르고 집안일 중이던 자이오르가 반갑게 인사했다.


“이번엔 빨리 돌아오셨네요. 그렇지 않아도 기르골 님이 자리를 비웠을 때 누가 왔는지 아십니까? 아주 놀라운 분이 오셨습니다.”

기르골은 쌩하니 그의 앞을 지나갔다. 전혀 관심 없는 태도였으나, 자이오르는 먼지떨이를 들고 졸졸 쫓아가며 말했다.


“황제입니다 황제. 타리움 황제가 여길 와서 기르골 님을 찾지 뭡니까. 제가 보고서 심장이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아, 제가 전에 레안 황자를 따랐던 거 아시지요? 전 그거 알고 복수하러 오신 줄…… 뭐 하십니까?”

자이오르는 기르골이 자신의 방 안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물건을 챙겨 가방에 담자 어리둥절해 물었다.

기르골은 그제야 행동을 멈추고 허리를 펴더니 행복하게 웃었다.


“장가간다.”

“…….”

자이오르는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끔뻑이다가 뒤늦게 황당해 되물었다.


“예?”

뱀파이어가 장가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물론 뱀파이어는 독신으로 살아야 한단 법은 없지만, 그래도 이질적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그 기르골인데.

하지만 기르골의 입가에 맺힌 행복한 미소는 분명 새신랑의 미소에 흡사했다.

자이오르는 떨떠름해서 물었다.


“누, 누구랑 결혼하시는데요?”

“네가 방금 말한 사람.”

“레안 황자님이요?!”

“그 앞에.”

“황제요?!”

자이오르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다래졌다.


“그래.”

기르골은 별거 아니란 듯 말하고서 다시 짐을 쌌다.

자이오르는 질문할 게 산더미같이 몰려와서 먼지떨이를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뒷모습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그러고 있자니 기르골이 휙 돌아서서 그를 위아래로 훑다가 명령했다.


“너도 빨리 가서 짐 싸. 뭐 해?”

“짐이라니요?”

자이오르가 멍하게 물었다.


“저는 왜 짐을…….”

“내가 잘 관찰해 두었지. 거기 후궁들은 다들 시종을 하나씩 달고 다니더라. 나도 하나 챙겨가야 할 거 아니냐.”

“예? 제, 제가 시종인가요?”

자이오르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한 번 더 놀라 되물었다.


“후, 후궁이 되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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