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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화. 라틸은 모르는 이야기 (298/367)


298화. 라틸은 모르는 이야기
2023.01.04.



 
게스타는 주춤주춤 다가갔다.

하지만 까치발을 들어도 게스타 역시 아이에게 손이 닿지 않았다.

게스타 역시 아이였으니까.


“손, 손이 닿지 않는데.”

게스타는 울상을 짓고서 말했다.


“이런.”

아이는 말랑한 이마를 찌푸리고서 푹 한숨을 내쉬었다.


“재상 아들이 착하고 순한데 용맹하지 않다더니.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구나.”

“어?”

게스타는 맹하게 되물었다.


“나? 내가 용맹하지 않다고 소문이 났어?”

“그래.”

아이는 단호하게 말하고서 머리를 축 늘어뜨렸다.

게스타는 여전히 아이가 못 미더웠다. 왜냐면 그는 어렸으니까. 그 같은 어린아이를 두고 누가 용맹하니 어쩌니 이야기한단 말인가. 겁이 많다면 몰라도.

하지만 지금은 아이와 그런 사소한 일로 입씨름을 할 게 아니었다.


“잠시만. 어른들을 불러올게.”

“안 된다!”

돌아서 달려가려는 그를, 아이가 간절하게 불렀다.

돌아보자 아이가 빠르게 고개를 젓더니 이리 오라고 손가락을 까딱했다.

다가가서 뒤꿈치를 들자 아이가 작게 비밀을 이야기하듯 말해주었다.


“나는 지금 몰래 나왔다. 들키면 안 돼.”

“몰래 나오다니? 어디서?”

“어디겠느냐. 내 말투가 무엇 같으냐.”

“노인…….”

“떽!”

오리 같은 호통을 친 아이는 거들먹거리면서 웃었다.


“이건 황제 말투다 황제 말투.”

“설마.”

“너 황제 본 적 있느냐?”

아이가 도끼눈을 떴다. 게스타가 고개를 젓자, 아이는 그것 보라며 더욱 고개를 번쩍 들고 웃었다.


“이건 황제 말투다. 나는 황제다!”

황제를 본 적은 없지만 황제 나이가 자기 아빠와 비슷하단 건 안다. 게스타는 터무니없는 아이의 거짓말에 입이 쩍 벌어졌다.

그때. 누군가 “도련님? 도련님!”하고 외쳤다.

놀란 게스타가 고개를 돌리는데, 뒤에서 퍽 소리가 났다.


“!”

게스타가 놀라서 옆을 보니 담벼락에 매달려 있던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놀란 게스타는 허둥지둥하다가 울음을 터트렸다.


“도련님?”

그를 찾아온 건 유모였다. 유모는 게스타가 울고 있자 당황해서 얼른 가까이 와 무릎을 굽히고서 눈을 맞추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우세요? 넘어지셨어요? 악몽을 꾸셨어요?”

“저, 저기에. 유모 저기에 누가 매달려 있었는데 떨어졌나 봐.”

“도둑이요?”

놀란 유모가 벌떡 일어났다.


“도둑이 왔어요?”

“아니 내 또래 여자애였어! 유모, 확인해 봐. 떨어졌어! 죽을지도 몰라!”

유모는 황급히 하인과 사다리를 가져왔다.

하인은 재빨리 담벼락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게스타는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도련님, 저 아래엔 아무도 없습니다.”

“어? 그럴 리가.”

“정말입니다. 저…… 멀리 빨간 머리 남자애 하나뿐이에요.”

  

* * *

게스타는 그로부터 한동안 그 어린애 유령이 나오는 악몽에 시달렸다.

아이는 게스타가 재빨리 자신을 잡아당겨 주지 않아서 죽은 거라고, 게스타를 쫓아다니면서 꿈속에서 괴롭혔다.

똑똑하다지만 아직 어렸던 게스타는, 아이가 담벼락에서 너무 빨리 떨어져서 바닥을 파고 들어가 저 지하 깊숙한 곳에 한 번에 도달한 거라고 여겼다.

아니라면 그 높이에서 떨어진 아이가 갑자기 사라질 리가 없었다.

가까스로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을 즈음. 게스타는 어머니를 따라 궁전에 가게 되었다.


“트라탈라 황자님을 보게 될 거야. 황자님은 너희 또래란다.”

어머니는 마차 안에서 게스타와 게스타의 형에게 당부시켰다.


“황자님에게 공손히 대해야 한다. 알았지?”

게스타의 형이 물었다.


“황자님 이름은 레이시안 아니었어요?”

어머니는 깜짝 놀라서 입술에 손을 댔다.


“황자님은 그분 하나가 아니란다. 트라탈라 황자님은 레이시안 황자님 동생이야. 아낙차 후궁의 아이고.”

게스타는 후궁이니 뭐니 하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냥 황자1과 황자2 정도로 생각하고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아낙차 후궁을 뵈면 ‘아낙차 님’이라 부르고, 절대로 황후 폐하라고 하면 안 된다. 알았어?”

어머니는 아이들의 태도를 보자 불안해져서 거듭 당부했다.

마침내 마차가 멈췄고, 게스타는 어머니와 형을 따라 처음으로 궁전에 들어갔다.

긴장했지만 어머니를 따라 도착한 곳은 그냥 넓은 들판처럼 보였다.

귀부인들이 다 게스타 형 또래의 아이들을 데려온 터라, 궁전 같은 느낌도 많이 없었다.

트라탈라 황자는 놀라울 정도로 예쁜 황자였고 얼굴만큼 친절했다.

하지만 게스타보다는 형 또래였고, 황자의 주위엔 다른 아이들도 많았다.

게스타는 한 번 인사를 한 후로 내내 밀려 있었다.

모인 아이들 대부분이 게스타보다 나이가 많아서, 나중에는 게스타는 혼자 들판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그러다 게스타는 매일 꿈에 나타나는 그 유령을 보았다.

아니, 유령이 아닌 모양이다.

아이는 멀쩡히 두 발을 땅에 딛고 있었고, 아까 본 트라탈라 황자와 싸우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이가 일방적으로 황자를 울리고 있었다.


‘황제 말투 안 쓰네.’

게스타는 나무 뒤에 숨어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아이가 아주 건강해 보이자 안심했다.

어찌어찌 거기서 무사히 돌아간 모양이다.

하지만 대체 저 아이는 누구길래 황자를 저리 뻥 걷어차는 걸까?

그때. 서럽게 울고 있는 황자와 여자아이 곁에 ‘아낙차 님’이 나타났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자 여자아이에게 화를 냈다.


“어쩌면 성질머리가 황후 폐하를 아주 쏙 닮으셨군요! 고약해! 지독해! 나이도 어린 게 참으로 못됐습니다!”

‘아낙차 님’은 날카롭게 소리 지르고서 아이를 휙 떠밀었다.

아이는 연못에 아슬하게 서 있지 않았지만, 떠밀리면서 균형을 잃은 듯했다.

비틀거리면서 옆으로 물러나더니, 아이는 뭘 밟고서 연못에 그대로 풍덩 빠져버렸다.

‘아낙차 님’은 당황한 듯했으나 곧 트라탈라 황자를 안고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게스타는 ‘아낙차 님’이 보이지 않게 되자 얼른 그쪽으로 달려갔다.


“야? 야?”

게스타는 연못을 향해 불렀으나 연못은 평온했고 아이는 올라오지 않았다.

주저하고 있자니 저 안쪽에서 뭔가 치맛자락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게스타는 주저하다가 꿈속에서 몇 달 내내 나타난 아이의 유령을 떠올리고, 용기를 쥐어짜 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황궁에 간다며 이것저것 온갖 치장을 다 해둔 옷은 수영을 하기엔 적합하지 못했다.

수영을 배웠지만, 게스타의 옷은 빠르게 물을 먹어 무거워졌다.

사실 연못은 그리 깊지 않았지만, 깊지 않은 연못조차 위험할 정도로 게스타는 키가 작았다.

게스타는 헤엄을 치지도 위로 뜨지도 못하고 허우적거리다가 마침내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옷이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나아가지 않는 몸을 이끌고 게스타는 허둥지둥 그쪽으로 다가갔으나, 이미 온몸은 물을 먹어 무거워져 있었다.

허우적거리면서 먹은 물 탓에 코가 메웠다.

정신이 희미해질 즈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이대로라면 둘 다 죽겠네.]

놀리는 목소리였다. 물 안에서도 너무나 명료한 목소리.

멍한 시선에, 아이의 머리카락이 물결을 따라 흔들리는 게 보였다.


[살려줄까?]

누군가 다시 말을 걸었다. 일단 저 황제 말투 쓰는 아이는 아니었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낮고 부드러운.

게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는 목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러려고 노력은 했다.

하지만 도움을 주려는 건지 마는 건지, 목소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홀로 여유로웠다.


[내가 널 구하면, 너도 내게 뭔가를 줘야 해.]

‘뭐를……?’

[네 생명.]

구해줄 테니 생명을 달라는 게 무슨 뜻일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차피 죽음이 당장 코앞에 와 있었다.


[이름이 뭐야?]

‘게스타.’

게스타가 자기 이름을 속으로 말하는 순간.

바로 눈앞에 여우 가면을 쓴 이가 나타났다.

놀라서 몸을 뒤로 빼려는데, 여우 가면은 자신과 겹쳐지며 환상처럼 사라지고, 갑자기 호흡이 돌아왔다.


 
팔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몸도 움직였다.

게스타의 몸은 저절로 움직여 황제 말투를 쓰는 아이에게까지 갔다.

게스타가 아이의 옷이 걸린 돌에 손을 대자, 돌이 대번에 부서졌다.

게스타는 혼란스러워졌다. 이게 자기가 움직이는 건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같으면서도, 몸이 저절로 움직이고 자기는 거기에 휩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어느새 자신의 ‘몸’은 아이를 구해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마침내 연못 밖으로 나온 게스타는 아이를 내려놓았다.

너무 시간을 오래 끌어서 죽은 건 아닌가, 겁이 났는데. 놀랍게도 아이는 차분하게 호흡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거지? 내가…… 살린 거지?

그럼 유령이 되어 찾아오진 않겠구나. 안심하고 있는데, 누군가 이쪽으로 오는 소리가 났다.

게스타는 황급히 그 자리를 피했다.

자신이 뭘 잘못했단 생각이 없으면서도 얼결에 달아났다.

아무도 없는 수풀 사이에서 콜록거리다가 보니 옷이 전부 다 말라 있었다.

이쯤 되자 어린 게스타도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게스타는 자신의 옷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겁이 나서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다리를 끌어안고 있자니, 아까의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안녕, 게스타.]

게스타는 그 목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알아차렸다. 그 목소리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게스타는 다리를 끌어안고 덜덜 떨다가 물었다.


‘넌 누구야?’

나지막한 웃음소리와 함께 대답이 들려왔다.


[게스타.]

 

* * *

라틸은 어두컴컴한 길을 걸어가며 계속해서 기르골을 생각했다.

기르골의 위치가 파악되지 않으니, 게스타와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오자마자 질문만 퍼붓고 가는 자신을, 게스타가 미련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걸 알았지만, 껄끄러운 가시가 신발 어디에 박혀 있는지도 모른 채 게스타와 좋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라틸은 초조하게 길을 걸어가다가, 다시 한번 기르골의 방에 가보기로 했다.

그러다가 라틸은 화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

이상하게 그곳에 신경이 쓰였다. 화원과 온실. 둘 다 기르골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니까.

라틸은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부근은 이전처럼 여전히 꽃들이 풍성했다.

그리고 안쪽은…….


‘멀쩡해졌네.’

정원사가 어떻게 한 건지, 땜빵처럼 움푹움푹 파였던 곳을 모두 메꿔 두었다

지금은 팬 부분이 없이 모두 멀쩡했다.


‘그럼 기르골이 여기 있진 않은 건가.’

기르골이 있었다면 멀쩡했던 꽃밭도 다시 패였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고서 몸을 돌리려는데, 어딘가에서 뭔가를 퍽 퍽 파헤치는 소리가 났다.

라틸은 기척을 죽이고서 그쪽으로 천천히 가보았다.

일직선으로 쭉 걸어가다가 옆으로 휘어진 곳을 보니, 그곳에 흙이 가득 쌓여 있었다.

하지만 기르골은 보이지 않는다. 분명 뭔가 소리가 났는데.


‘잘못 들었나.’

한숨을 내쉬고서 몸을 돌리는데, 이번에는 물소리가 났다. 라틸은 호수를 쳐다보았다.


‘꼬리……?’

그곳에 인어 지느러미 끝부분이 보였다.

인어가 아닐 수도 있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피인어들이 이쪽에 와 있나? 그런데 뭘 하기에 지느러미 끝부분만 저렇게 나와 있지?

주저하다 그쪽으로 다가간 라틸이 지느러미를 툭 건드리려는 순간.

지느러미가 아래로 쑥 들어갔다.

놀라서 뒤로 넘어지자, 길고 하얀 두 손이 나오더니 호숫가를 짚고 천천히 머리를 내밀었다.

라틸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기르골이었다.

당황해서 쳐다보고 있자니, 기르골이 눈웃음을 지으면서 라틸의 발목을 한 손가락으로 살짝 긁었다.


“결정은? 내렸어,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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