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담벼락의 황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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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화. 담벼락의 황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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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화. 담벼락의 황녀님
2023.01.01.
“한 곡 더 추실 겁니까. 폐하?”
타시르가 은근히 붙잡았지만 라틸은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어지럽단 핑계를 대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타시르도 줄레줄레 쫓아 내려왔다.
그러고는 라틸이 목이 마르단 말을 하기도 전에 눈치 좋게 먼저 마실 거리를 찾아 가져다주었다.
라틸은 이번에는 ‘진짜로’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쉬기 위해 2층 발코니로 들어가 가면을 벗고 음료수를 마셨다.
‘여우 가면이 사람이란 정보. 별거 아닌 정보 같지만 제일 중요한 정보다.’
차가운 음료수가 계속 춤을 추느라 울렁거리던 속을 가라앉혀 주었다.
하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들떴다.
라틸은 타시르에게 빈 잔을 건넨 다음 칼라인을 찾아갔다.
칼라인은 가면을 써도 칼라인인 티가 났기에, 멋진 자태를 드러내고 의자에 그림처럼 앉아 있어도 다가오는 이가 없었다.
귀족 여자들은 그가 황제의 후궁이기 때문에 접근하지 못했고, 귀족 남자들은 그가 소문 무서운 용병왕인 데다 평민 출신이라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라틸이 그에게 다가가자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길이 쏠렸다.
라틸이 칼라인의 옆에 앉았을 때는 다들 놀라지도 않고 알아차렸다. 아, 저분이 폐하구나.
사람들은 황제가 후궁을 희롱하는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제각각 다른 방향을 쳐다보았다.
“주인.”
칼라인은 라틸이 갑자기 다가와 옆에 앉자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앉아 있어. 괜찮다.”
라틸은 그의 배를 눌러 도로 의자에 앉게 하고서,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물었다.
“물어볼 게 있어 왔는데.”
“네.”
“중요한 건 아닌데 남들이 들으면 안 돼.”
칼라인은 고개를 기웃하다가 미묘하게 웃으며 다시 대답했다.
“예.”
이윽고 그는 자신의 얼굴을 라틸 쪽으로 가져갔다.
귀를 달라고 한 말은 아니었으나, 맑은 수정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갑자기 코앞에 들이밀어 지자 라틸은 괜히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는 얼굴을 반만 드러내도 아름다움을 가리지 못했다.
“구겨질걸요.”
칼라인이 알려준 뒤에야 라틸은 드레스를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자 괜히 성질이 난다. 칼라인은 안 그럴 것처럼 생겨서, 자신의 빼어난 외모를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그가 자신의 외모를 무기처럼 휘두른단 의심이 들었다.
게다가 라틸은…… 요즘 들어 조금씩 인정하고 있는 거지만, 자신은 미인계에 좀 약한 것 같았다.
“주인?”
그가 놀리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투로 재차 라틸을 불렀다.
라틸은 얼른 그의 귀를 잡았다. 그래, 귀를 주니 사용해야지.
라틸이 그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자, 슬쩍슬쩍 여기를 보던 사람들이 동시에 ‘허!’ 하는 소리를 낸다.
애써 그 놀란 시선을 모른 척하며 라틸은 작게 물었다.
“내 편이라고 할만한 이들 중에서. 종족이 사람인 건 흑마법사뿐이냐?”
칼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틸의 손안에서 그의 머리가 작은 새처럼 살짝 움직였다.
라틸은 그의 귀를 잡았던 손을 펼치고서 칼라인의 귀를 빤히 보다가 얼른 손을 내렸다.
칼라인은 라틸이 갑자기 손을 내리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면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가면 아래 드러난 라틸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 * *
‘기르골도 분명 참석한다고 했는데…… 왜 나타나지 않을까.’
연회장에서 빠져나가 하렘으로 걸어가다가 라틸은 잠시 주춤했다.
기르골이 여우 가면을 흉내 내는 게 아닐까, 잠시 걱정했는데.
여우 가면이 한패를 데리고 다니던 걸 봐서인가. 기르골이 여우 가면을 흉내 낸 것 같진 않았지만, 그가 나타나지 않는 게 영 신경 쓰였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라틸은 고개를 젓고서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갔다.
목적지는 게스타의 방이었다.
후궁들이 전부 다 연회에 참석한 터라, 하렘 내부는 한적하고 조용했다.
몇몇 궁인들이 자기들끼리 산책하고 있을 뿐이고 요란스럽게 노는 이들이 없었다.
라틸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히 걸어가 게스타의 방 앞까지 왔다.
“폐하?”
게스타의 방문을 지키는 경비병은 황제가 연회장에 있지 않고 홀로 돌아오자 깜짝 놀랐다.
“내가 여기 온 건 비밀로 해라. 게스타를 놀라게 해주러 온 거니까.”
라틸은 일부러 장난치는 것처럼 둘러대고는 게스타의 방 안에 들어가 불도 켜지 않고 창틀에 앉았다.
커튼을 다 쳤지만, 워낙 커튼이 얇다 보니 달빛이 커튼을 통과해 들어와 라틸의 앞으로 까만 그림자를 만들었다.
라틸은 들뜬 마음에 자꾸 배가 아프고 손바닥이 가려워졌지만, 이런 감각을 꾹 참고서 게스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 상태로 거의 세 시간을 기다렸을 거다.
마침내 문밖에서 무언가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허리를 굽히고 거북이 같은 자세로 편안히 있던 라틸은, 얼른 몸을 똑바로 펴고서 다리 모양도 바꿨다.
느긋한 척 여유로운 척 앉아 있자니, 마침내 문이 열리고 게스타가 나타났다.
한 손으로 가면을 대충 벗으면서 들어오던 게스타는 세 걸음 만에 라틸을 발견하고서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 폐하?”
연약한 목소리가 충격받은 듯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아까 가면을 벗을 때 슬쩍 드러났다 사라진 무표정과 전혀 달라서 라틸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니, 어쩌면…….
“전에는 도와줘서 고마웠다 게스타.”
“!”
게스타가 여유만만한 여우 가면이란 걸 알게 되어서 웃음이 나오는 건지도 몰랐다.
굳은 표정으로 게스타는 라틸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라틸은 더 그 이야기를 하는 대신, 그를 찾아온 가장 중요한 목적을 밝혔다.
“아낙차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게스타.”
일부러 세 시간이나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린 건 놀리기 위해서이지만, 찾아온 목적은 이게 더 컸다.
게스타는 아직도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는 평소처럼 소심한 얼굴로 라틸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계속 힐긋거렸다.
라틸은 일부러 아까 자신이 한 말을 모른 척했다.
여우 가면은 뱀파이어나 식시귀가 아니라 사람이고, 로드의 패거리 중 사람은 흑마법사뿐이고, 흑마법사가 게스타뿐이라면 여우 가면은 게스타일 확률이 높다……고 추측하긴 했으나 아직 추측일 뿐이니 미리 나섰다가 놀림거리가 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일단 게스타를 여우 가면이라 여기고 나자 몇 가지 옛날 일들이 떠올라서, 더욱 이 생각이 옳게 여겨졌다.
여우 가면을 벗기는 순간 게스타가 나타났던 적도 있지. 당시 라틸은 게스타를 잠깐 의심했으나, 칼라인이 게스타 곁에서 게스타와 말을 맞춰 주었다. 게스타가 산책하고 있었는데, 라틸이 여기 쓰러져 있었다고.
당시엔 게스타와 칼라인이 한패란 걸 모르니, 칼라인의 증언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라틸은 정말로 자신이 몽유병에 걸려서 잠결에 돌아다녔다고 여겼다.
그러나 게스타가 여우 가면이고 칼라인이 여우 가면과 한패라면 이 모든 건 딱딱 아귀가 들어맞았다.
게다가…….
‘게스타의 추억 속엔 내가 있는데. 내 그 기억 속에 게스타는 없어. 여우 가면은 자기 가면을 뺏기자마자 바로 사라져버렸지. 여우 가면 능력은 몸을 감추는 것이라거나, 하여튼 그런 거 같아.’
깊은 고민에 잠기느라 잠시 라틸의 표정이 꿍꿍이 가득한 염소처럼 변했다.
게스타는 라틸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방 안으로 더 들어와 가면을 화장대에 올려두며 불렀다.
“폐하.”
라틸은 자신이 게스타에게 아낙차에 관해 묻던 중이란 걸 다시 떠올리고서, 얼른 표정을 관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게스타. 아낙차가 흑마법을 익혀서 다가 공작을 흑마법으로 깨웠다면 말이야. 혹시 네가 그사이에 끼어들 수 있어?”
“끼어들다니요?”
“네가 흑마법으로 그걸 방해할 수 있어?”
“방해라면…….”
“구체적으로 뭘 할 수 있는진 난 모르지. 난 흑마법을 모르니까. 예를 들면 식시귀가 된 다가 공작이 다시 죽게 한다거나? 적한테 피해 주는 방향이면 뭐든 좋은데.”
게스타가 여우 가면이라고 반쯤 확신한 라틸은, 일부러 아낙차가 여우 가면의 지하성에서 흑마법을 익혔다던가 하는 말은 생략했다.
그가 여우 가면이라면 어차피 알고 있을 테니까.
게스타는 라틸의 눈치를 힐긋 살피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론적으론 가능하지만…….”
“하지만?”
“제가 그 식시귀 상태를 직접 봐야 알 수 있어요.”
“보기 전엔 할 수 없어?”
“네. 아낙차 님이 단시간에 흑마법을 익혔다면 아마 불완전할 텐데. 그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하고요.”
자신의 말이 너무 부정적이라 여겨졌는지, 게스타는 굳이 한 번 더 덧붙였다.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든, 확인만 되면 제가 거기에 개입할 수 있어요 폐하.”
‘반쪽짜리 희망이네.’
하이신스도 대신관이 직접 봐야 치료할 수 있고, 다가 공작도 게스타가 직접 봐야 뭘 해도 할 수 있다니.
라틸은 혀를 차고서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카리센과 정면충돌을 하는 것보다는, 다가 공작 쪽을 공략하는 게 훨씬 나은 방법이긴 하다.
아직 앞길이 막막하지만, 갈피는 잡을 수 있었다.
“네가 다가 공작을 만날 기회를 만들어야겠네.”
* * *
볼일을 마친 라틸이 쌩하니 나가버리자, 순식간에 방 안에는 게스타가 홀로 남았다.
게스타는 방 안에 우두커니 홀로 서 있다가, 창밖에서 들려오는 방정맞은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창문을 보니, 까만 새가 낄낄거리며 그를 비웃고 있었다.
인상을 찡그리고서 손을 까딱하자 순식간에 창문이 열리며 까만 새가 죽 끌어 당겨져 왔다.
그래도 그리핀은 그를 계속 비웃어댔다.
[아이구. 우리 로드는 그쪽한테 관심이 없나 보오?]
“…….”
[우시오? 울 거요? 엉엉 울 거요?]
“나가.”
[난 밖에 있었소. 그쪽이 날 이리로 끌어당겼지.]
그리핀은 깐죽거리면서 새실새실 웃더니, 날개를 허리에 붙이고서 신나게 춤을 췄다.
[애정을 못 받는다네, 애정을 못 받는다네, 여우가 꼬리치길 잘한다더니 이제 다 옛말이네, 여우 꼬리는 이제 한물갔다네!]
그리핀이 보란 듯 엉덩이를 내밀고 자신의 사자 꼬리를 붕붕 돌리자, 게스타는 성큼성큼 걸어가 새를 휙 던져버리고 창문을 쾅 닫았다.
그래도 그리핀은 창문에 딱 달라붙어 깐죽거렸다.
“헛소리하지 말고 카리센에 가서 다가 공작이란 자가 사람인지 아닌지나 확인하고 와라.”
게스타는 커튼을 다 내려버리고서 침대로 걸어가 슬리퍼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드러누웠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침대 천장에 달린 휘장을 보고 있자니, 하얀 안개 같은 장막 사이로 옛날 일이 떠올랐다.
* * *
‘높으신 분들’이 온다는 이야기에, 그는 혼자 후원에서 그네를 타며 놀고 있었다.
게스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부끄러워서 손님이 찾아올 때면 늘 구석이나 인적 드문 곳에 숨어들곤 했다. 오늘처럼.
게스타는 멍하게 땅을 몇 번 발로 차면서 아주 조금씩만 그네를 움직였다.
그는 모험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모험은 책 속에 들어있을 뿐이고, 그 밖으로 나가는 건 취향이 아니었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 역시 게스타에겐 모험이었다.
그런데 그네를 까딱거리며 놀고 있자니, 뒤에서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재상 아들내미냐?”
게스타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후원 담벼락에 조막만 한 어린아이가 걸쳐져 있었다.
“!”
팔을 이쪽에 있는데 다리는 저쪽에 있다. 담벼락은 성인도 넘어가지 못할 정도로 높은데.
떨어지면 크게 다칠 높이라, 남 일에 관심 없는 게스타도 놀라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기겁해서 허둥대고 있자니, 담벼락에 걸린 어린아이가 재차 근엄하게 명령했다.
“잘 되었다. 나를 좀 당겨라. 이 자세는 몹시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