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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화. 손이 따뜻해 (296/367)


296화. 손이 따뜻해
2022.12.28.



 
라틸의 질문에 타시르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전 폐하가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알아볼걸요.”

라틸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거짓말.”

타시르는 억울하단 투로 물었다.


“왜 거짓말이라 하시지?”

‘왜냐고?’

“거짓말이니까.”

‘내가 사디 모습일 때도 알아보진 못할 거잖아. 하긴. 이건 사람이라면 다 그러겠지만.’

“정말인데요.”

항의하는 타시르에게 이 문제는 넘어가라 손짓하고서, 라틸은 발코니 쪽을 힐긋대며 물었다.


“아까 봤느냐? 내가…….”

윌랑 왕자랑 있던 거.


“잔소리도 잘하시던데요.”

봤나 보다.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변명했다.


“일부러 데려온 거 아니야.”

이미 순애보 황제 이미지는 물 건너 가긴 했지만, 그것도 마음을 둔 상대들과 엮여야 그러려니 하지. 정말로 아예 생각도 없는 상대와 그런 이미지로 엮이고 싶진 않았다.

다행히 타시르는 라틸의 실수를 잘 아는 듯했다.


“압니다. 모르는 사람도 있는 거 같았지만요.”

“모르는 사람이라니?”

“알려드리지 않을 겁니다.”

“?”

“제가 말씀드리면 찾아갈 거 아닙니까. 다른 후궁이 질투하건 말건, 알려주고 싶지 않아요.”

“왜?”

“그럼 이번엔 제가 질투해야 하니까요.”

‘질투? 네가?’

“거짓말.”

라틸이 픽 웃으며 부정하자, 타시르가 섭섭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폐하는 왜 제가 하는 말마다 거짓말이라 하시지?”

“다 거짓말처럼 들려서.”

부정하는 대신 타시르는 우아하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바쁘십니까, 폐하? 같이 춤춰도 될까요?”

“잘 추느냐?”

“라나문 님보단 잘 추지요.”

타시르가 다른 사람을 비교 예시로 들었더라면 악의적이라 여겼을 텐데. 수많은 걸 잘하는 라나문이 의외로 못하는 걸 비교군으로 삼자, 그저 농담으로 여겨질 뿐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역시 얘는 말을 잘해. 라틸이 웃음을 터트리자 타시르가 재차 손을 내밀었다.

라틸은 조심스럽게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가 손에 힘을 주자, 두 손이 완벽히 맞닿았다.

그러고서 바로 내려가려는 타시르를, 라틸은 손을 잡아당겨 말렸다.


“가면 써야지.”

“써야 합니까?”

“가면무도회잖아. 남들한텐 가면 쓰라 해놓고 우리만 안 쓰면 어떡해.”

그 말에 타시르는 그렇다고 수긍하더니, 자신의 가면을 라틸에게 씌워주었다.

라틸은 갑자기 그의 가면을 쓰게 되자 놀랐다.

하지만 그가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걸 보자, 덩달아 장난치고 싶어서 자신이 쓰고 온 가면을 그에게 씌워주었다.

그러고서 계단을 내려가다가, 라틸은 타시르가 말한 질투하는 후궁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칼라인이었다. 계단 한쪽 난간에 몸을 기대어 선 그가 평소보다 좀 더 날카로운 시선으로 위쪽을 올려다보고 있던 것이다.

라틸이 타시르를 데리고 내려가자, 바로 알아보고는 또다시 쳐다보는데. 그 눈길이 확실히 평소보다 딱딱해 보였다. 그걸 질투라고 표현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그의 시선이 라틸이 붙잡은 타시르의 손에 가 닿자, 라틸은 괜히 머쓱해졌지만 타시르는 태연했다.

칼라인을 무서워하는 주제에, 타시르는 이번에는 개의치 않고 라틸과 무대 가운데까지 나아갔다.

마침 막 음악 한 곡이 끝난 참이어서, 무대 위에서 대거 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쉬고 싶은 이들은 무대 밖으로 내려갔고, 춤을 추고 싶은 새로이 올라왔다.

라틸은 무대에 올라오는 이들 중 혹시 아는 얼굴이 있나 살피면서, 한 손은 타시르를 꼭 쥐고만 있었다.

그러다 라틸은 여우 가면을 발견하고 흠칫했다. 여우 가면도 무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어느 쪽이지?’

여우 가면은 한 여자와 손을 잡고 올라오다가 힐긋 라틸을 보더니, 입꼬리를 짓궂게 올렸다.

근처로 다가오진 않았다. 세 쌍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설 뿐.

하지만 여우 가면을 본 이상 라틸의 정신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자꾸만 시선이 옆으로 이동했다.

화려한 옷차림 사이,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사이로 그의 가면이 나타났다 드러나길 반복할 때마다 라틸은 저절로 눈동자가 굴러다녔다.

차라리 저자가 진짜 여우 가면이라면 신경 쓰이지 않을 텐데.


‘진짜일까. 가짜?’

이걸 알 수 없으니 더욱 신경 쓰였다.

진짜라면…… 경계는 덜해도 되겠지만.

가짜라면? 가짜라면 왜 굳이 ‘지금’ 같이 무대로 올라온 거지? 마주 선 여자는 누구고?

아니, 진짜여도 이상하긴 하다. 부끄럽다면서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도 싫어하던 여우 가면이, 사람들 앞에서 춤추는 건 좋아한다고?


“폐하.”

타시르가 낮은 목소리로 부르고서야 라틸은 옆으로 자꾸 이동하던 고개를 붙잡았다.

타시르를 바라보자, 그가 왜 그러냐고 묻는 대신 장난스럽게 물었다.


“주목받는 거 좋아하십니까, 폐하?”

“별생각 없어. 받는 거나 안 받는 거나.”

“전 좋아합니다.”

“그래?”

“중앙으로 갑시다.”

“어? 여기서?”

아차 싶은 사이, 타시르가 라틸을 무대 가장 중앙으로 이끌었다.

중앙이라고 해도 단이 더 높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자신 있는 실력의 이들이 자주 오는 자리이다 보니, 쉬는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이 자리를 보곤 한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조금만 잘 춰도 주위 사람들이 ‘더 춰보라’ 하면서 자리를 비켜주고는 했다.

즉, 독무대가 되기 아주 쉬운 자리다.


‘아니, 이 정도로 주목받고 싶진 않은데!’

라틸은 당황했지만 타시르는 당당하게 웃고만 있었다.

옆으로 조금 옮기자고, 여기는 너무 가운데라고, 라틸은 슬쩍 그에게 말하기로 했다.

그러나 라틸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음악이 시작되었다.

타시르는 바로 움직였고 라틸은 박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고서 익숙하게 몸을 움직였다.


“네가 춤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춤을 좋아하진 않습니다.”

“그래?”

‘좋아하는 거 같은데.’

“제가 잘 췄을 때. 사람들이 환호하는 걸 좋아하지요.”

“넌 뒤에 있는 걸 선호하는 줄 알았다.”

“왜요?”

“약간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 같아서.”

타시르의 웃음소리가 음악을 뚫고 듣기 좋게 울렸다.

그는 본인의 말처럼 정말로 춤을 잘 췄다. 늘 발을 밟아대던 라나문과 달리, 라틸이 발을 움직이는 데 조금도 걸리적거리지 않았다.

라틸과 완벽하게 박자를 맞추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여우 가면을 신경 쓰느라 영 불편하던 라틸도, 타시르가 자신이 마음껏 움직이도록 맞춰주자 점차 즐거워졌다.

라나문처럼 심각하게 못 추지 않더라도, 이 정도로 자신을 잘 맞춰줄 수 있는 춤 상대는 찾기 힘들었다.

그러다 두 사람이 손을 놓고 몸을 빙글 돌리고 다시 붙어야 하는 순간.

라틸이 몸을 돌리며 타시르 쪽으로 가려는데, 웬 여자가 라틸 앞을 팽이처럼 핑그르르 돌더니 자기가 타시르에게 가버렸다.


‘어?’

얼떨떨해진 라틸이 웃겨서 그쪽을 보는 순간. 누군가 라틸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려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얼결에 다리를 따라 움직이고 올려다보니…… 여우 가면이었다.


 
가면 안에서 라틸의 눈이 커다래졌다.

가짜? 진짜? 가짜? 진짜? 이 두 개 단어만 연달아 서로를 밀어내며 자꾸 라틸의 정신을 산만하게 했다.

라틸은 더듬더듬 물었다.


“부끄럼. 많다며.”

“극복해보려고요.”

무슨 헛소리냐고 말하려 했으나, 사람들이 단체로 이동하는 바람에 라틸도 덩달아 이동하게 되었다.

아직 음악은 계속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었다.

이 대열에서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모든 사람들의 동선이 다 꼬이게 된다.

라틸은 타시르 쪽을 쳐다보았다. 타시르는 여우 가면의 파트너에게 잡혀서 이쪽을 불만스레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우 가면과 춤추던 여자. 여우 가면과 한패인 게 분명했다.

라틸이 불만스럽게 쳐다보자 여우 가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싫으십니까? 저랑 춤추는 거.”

‘이게 좋고 싫고의 문제인가?’

“파트너를 도중에 바꿔치기하는 거. 예의가 아닌데.”

“저자는 춤을 못 춰서요. 재미없으실까 봐.”

“무슨 소리야. 너보다 백배는 더 잘 춰.”

“그럴 리가요.”

“네가 춰봤어? 아니면서 왜 자만이야?”

라틸의 목소리가 차가워지자, 여우 가면은 바로 화제를 바꿔버렸다.


“생각은 끝나셨습니까?”

“뭐가.”

“제가 진짜인가. 가짜인가.”

“…….”

다시 파트너와 옆으로 멀찍이 떨어지는 구간이 오자, 옆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온 타시르가 라틸의 손을 다시 잡고 자신의 품으로 당겼다.

라틸은 눈 깜짝할 사이 다시 타시르와 파트너가 되었다.

그와 손을 잡자 타시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상한 커플이네요. 부인이 안 오고 엉뚱한 사람이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부인은 여우랑 손잡고 있고.”

“그치. 이상하지. 여우는 넌데.”

“그러게요. 기분 나쁘네요.”

라틸은 몸에서 힘을 빼고 간단하게 스텝만 맞추면서 여우 가면 쪽을 보았다.

여우 가면은 다시 자신의 파트너와 춤을 출 뿐.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이상한 사람. 라틸은 타시르의 손을 꼭 붙잡고 인상을 썼다.

그러다가 돌연 무언가를 깨닫고 휙 다시 여우 가면 쪽을 보았다.


“왜 그럽니까, 부인?”

사람들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타시르가 ‘부인’이라고 부르며 물었다.

라틸은 대답해주지 못하고 그의 손만 더듬거렸다.


“부인?”

라틸은 타시르의 손에서 느껴진 온기를 몇 번이고 더듬었다.

그 모습을 본 몇몇 귀족들은 상대가 황제와 후궁인 걸 모르고 자기들끼리 키득거렸다.

타시르도 평소라면 라틸을 놀렸을 것이다. 그러나 타시르는 라틸의 손길에서 조급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부인? 왜 그럽니까?”

라틸은 타시르의 손 여기저기를 조물거리다가, 씩 웃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 표정은 거만하고 의기양양해서 조금도 음심이 없어 보였다.


“알았다.”

“뭐를요?”

뭐긴 뭐야. 여우 가면의 정체 일부지.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여우 가면과 춤을 추고 나니 알게 됐다.

여우 가면은 손이 따뜻했다.

칼라인은 유난히 손이 차가운 편이었다. 서넛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역시 온기가 느껴지는 손은 아니다. 하지만 여우 가면은 손이 따뜻했다.


‘뱀파이어가 아니야. 식시귀도 아니다.’

식시귀 손을 잡아본 적은 없지만, 일단 그쪽도 죽었다 깨어난 거니 분명해. 그리고 라틸의 앞에 나타났던 여우 가면 둘. 이들은 한패일 확률이 높다.

방금 전 여우 가면은 자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맞추어 보라면서 놀려댔는데. 이건 사칭 피해를 입은 사람도 사칭하는 사람도 할 법한 말이 아니었다.

라틸은 타시르와 몸을 움직이며 여우 가면 쪽을 보았다. 여우 가면은 아예 춤을 멈추고서 라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이올린과 하프의 선율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데. 물결처럼 흔들리는 사람들 틈에서, 그만이 홀로 우뚝 멈추어선 채 라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둘 중 하나였다.

방금 자신과 춤을 춘 여우 가면이 ‘진짜와 손을 잡은’ 가짜 여우 가면이거나.

아니면 여우 가면이…… 사람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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