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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화. 모두가 얼굴을 가려서 (294/367)


294화. 모두가 얼굴을 가려서
2022.12.21.



 
라틸은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꽃 화분을 하나씩 가져다 놓는다고 했지.’

그런데 다 치워놨다는 건 무슨 뜻일까. 꼴도 보기 싫단 건가.

보기만 해도 생각나서 그냥 죄다 치웠나?

아니면 그냥 다 먹었나? 그러나 꽃을 다 먹어버렸다고 하기엔 화분조차 없다.

그도 아니면, 너무 오래 안 와서 결국엔 기다리기도 귀찮아진 건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변덕?

라틸은 입술을 씹으면서 기르골의 방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방 안 인테리어 좀 바꾸었다고 라틸을 이렇게 초조하게 만들 수 있는 인간은 그 하나뿐일 것이다. 물론 인간도 아니지만.


‘어디 간 거야?’

우선 좀 기다려보자. 이전에는 와도 없어 못 보았지만, 오늘은 기다렸다가 가자.

라틸은 침상 위에 주춤주춤 앉아 무릎에 얌전히 손을 두었다.

* * *

그러나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기르골은 돌아오지 않았다.

거의 두 시간은 기다렸을 거다. 라틸은 초조하게 시계를 확인하다가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인내심은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 더 기다릴 수야 있지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일을 미루면 미룰수록 해야 할 게 쌓이고 덩달아 비서들까지 고생길에 함께하게 될 테니, 슬슬 돌아가야 했다.

결국 라틸은 방을 나와서 윌랑 왕자를 찾아갔다.


“황제 폐하! 어서 오십시오!”

왕자의 문 앞으로 가자, 전에 왕자랑 소풍 가던 호위가 놀라서 황급히 인사했다.


“왕자는?”

라틸의 질문에 호위가 두 손으로 문 안을 가리키며 보고했다.


“폐하께서 보내주신 스승님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 안에서 “좋지 않아!”라는 고함이 들려오는 걸 보니, 잘 배우는 모양이었다.


“왕자님을 모시고 나올까요?”

호위가 기대를 품고 물었으나, 라틸은 손을 저었다.


“아니. 괜찮다.”

기르골 행방에 대해 물어보러 온 것이니, 꼭 왕자 본인에게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이런 정보는 그 아래의 시종이나 호위가 더 잘 알지도 모르고.


“기르골에 대해 물으려 하는데.”

라틸이 기르골 이름을 꺼내자 호위의 낯빛이 한 번 불어 꺼진 촛불처럼 변했다.


“아아. 기르골이요.”

호위는 못마땅한 듯했으나, 황제에게 서운한 내색을 할 수는 없기에 마지못해 대답했다.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폐하.”

“기르골이 어디 있지?”

“예? 방에 없습니까?”

그러나 호위의 대답은 질문이었다.


“없던데. 요 며칠 계속. 어디 갔는지 몰라?”

라틸이 재차 묻자, 호위는 더욱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근처잖아. 왜 그걸 몰라.”

“그게…… 죄송합니다.”

호위는 황급히 변명했다.


“최근 폐하께서 보내주신 스승들과 바쁘게 수업하시느라, 왕자님은 거의 방에만 계셨습니다. 저희는 늘 왕자님과 함께 행동하느라 그자에게까진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럴듯한 말이어서 라틸은 더 캐묻는 대신 몸을 돌렸다.


‘대체 어디 갔을까.’

라틸은 망설이다가 수도 외곽 쪽에 기르골의 미로 저택이 있던 걸 떠올렸다.

혹시 그쪽으로 돌아갔을까?

기르골을 대하는 일이라 심부름꾼을 보낼 수도 없어서, 라틸은 시간을 확인한 후 직접 잠행 차림으로 그쪽에 가보았다.

말을 타고 바쁘게 달려가 미로 저택 부근에서 내려서, 고삐를 쥐고 저택 앞으로 가자 굳게 닫힌 문이 들어왔다.

라틸이 문고리를 잡고 쾅쾅 흔들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에 본 기르골의 하인인지 뭔지 모를 사람이 나타났다.


‘이름이 자이오르였던가?’

“네.”

고저 없이 대답하고서 문을 연 자이오르는 모자를 눌러 써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은 라틸을 멍하게 바라보다 물었다.


“누구세요?”

라틸은 모자를 내리고서 물었다.


“기르골은?”

자이오르는 기르골 이름에 잠시 흠칫하고서 대답하려 했으나, 라틸을 보자 놀라서 그대로 우뚝 멈췄다.


“!”

얼마나 눈을 커다랗게 뜨던지, 조금만 크게 움직여도 눈알이 굴러 나올 것 같았다.


“이봐?”

라틸이 재차 부르자, 자이오르가 입을 뻐끔거렸다.

라틸은 그제야 자신이 자이오르와 이 모습으로 본 적이 없단 걸 알아차렸다. 너무 급하게 오느라 전에는 ‘사디’로 왔던 걸 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곧 의아해졌다. 이 모습을 처음 보는 거야 그렇다 치고. 왜 저렇게 얼어붙었지?


“폐, 폐하.”

그 대답은 자이오르가 알아서 해주었다.


‘아. 내 얼굴을 아는 자구나.’

하지만 어떻게? 라틸의 초상화가 타리움 수도 여기저기에 나오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림과 실물은 좀 다른 편이라 머리 모양과 의상만 바꾸어도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이 보는 라틸의 초상화는 황제의 위엄을 드러내도록 아주 미화된 그림이지 않던가.

그런데 보자마자 알아차리다니. 눈썰미가 좋은 사람인 걸까, 아니면 실제로 얼굴을 본 적이 있는 걸까?

의심스럽게 보고 있자니, 라틸도 전에 이자를 어디에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한 게 떠올랐다.

곧 라틸은 이자를 본 곳을 떠올렸다. 마법 아카데미. 그래. 분명 거기서 봤다. 이자는 마법사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쳐도 이자의 반응은 너무 커서, 라틸은 자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달달 떠는 이자에게 무어라 말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기르골은?”

참다못해 다시 묻자, 그자는 그제야 안심한 듯 어깨를 떨구더니 다급히 보고했다.


“기르골 님은 가면무도회인가, 거기 가신다고 가면 챙기셔서…….”

“가면?”

라틸은 문득 여우 가면이 떠올라서 흠칫했다.

하지만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단 걸 알고 긴장을 풀었다.

그건 절대로 아니었다. 여우 가면이 지하성에 아낙차와 틀라를 숨겼는데, 기르골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그 일을 망친 거니까.


“무슨 가면을 챙겼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 묻자, 자이오르가 얼른 대답했다.


“그냥 평범하고 화려한 가면입니다, 귀족들이 쓸 거 같은 모양이요.”

“……동물 모양은 아니지?”

“예? 아니요. 아닙니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다가 다시 돌아서서 물었다.


“기르골 표정이 어땠어?”

“예?”

“젠가, 그러니까, 멀쩡해 보였어?”

자이오르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분은 멀쩡한 얼굴로도 안 멀쩡한 짓을 하시니까…….”

“그렇지. 맞다.”

진짜로 돌아선 라틸은 다시 말에 올라타고 모자를 풀 눌러 쓴 다음 궁전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속은 갑갑했다.


‘그냥 내게 말하고 참석해도 될 텐데. 기르골 그놈, 왜 나 몰래 참석하려는 거지? 혹시 가면무도회에서 얼굴 가리고 장난질이라도 치려는 거 아냐?’

 

* * *

다음날.

간만의 연회이기 때문인지, 시녀들은 준비 직전부터 손가락을 풀더니, 준비를 시작하자 날쌔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소 라틸은 머리를 하나로 묶고 제복 중 제일 편한 차림으로 돌아다녔다.

이따금 기분 전환하듯 드레스를 입기도 하지만 혼자서 입고 벗고 할 수 있는 편안한 드레스여서, 시녀들이 나설 틈이 없었다.

그리 손이 가지 않으니 담당 시녀들은 편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불편하기도 했다.

라틸의 차림새는 모두 다 의상과 머리를 담당하는 시녀들의 몫이니, 라틸이 엉성하게 하고 다니면 다들 라틸이 아니라 시녀들을 탓하니 말이다. 라틸이 일부러 편하게 다니는 걸 알 때에도.

이런 상황인데, 라틸은 그나마 연회조차도 잘 열지 않고, 행사가 있을 때도 화려한 예복을 입지 드레스는 잘 입지 않았다.

그러니 시녀들은 오늘같이 기회가 있을 때 솜씨를 발휘해서, 수많은 귀족 여인 중 왜 자기들이 황제의 시녀일 수 있는 건지 모두에게 보여주어야 했다.

다행히 날 때부터 황녀였던 라틸도 이런 걸 모르진 않기에, 시녀들이 마음대로 자신을 치장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나자 시녀들은 작품 하나를 막 완성한 예술가들처럼 자기들끼리 손바닥을 마주쳤다.

실제로 그들이 라틸을 치장해 준 건 거의 예술에 가깝기도 했다.


“가면을 쓰고 벗을 때 이 부분을 조심하십시오, 폐하.”

“귀랑 가면이 닿지 않게 하셔야 합니다. 아니면 귀 쪽 머리카락이랑 실이 끊어져서 우스워지니까요.”

“혹시 실이 끊어지면 바로 저희를 부르셔야 합니다.”

라틸은 자신의 까만 머리카락이 반짝이게 된 걸 신기해서 쳐다보다가, 알겠다고 몇 번이나 거듭 말하고서 가면을 집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고 나가자 서넛도 평소보다 훨씬 꾸며 입은 예장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린 서넛은 잠시 입을 우물거리더니 고개를 푹 숙여버려 라틸을 당황하게 했다.


“아니, 왜 사람을 보고 고개를 숙여버립니까?”

“……인사하는 중입니다.”

“인사 그만하고 고개 들지.”

라틸이 타박하자 서넛은 고개를 들긴 했으나, 역시 라틸 쪽을 쳐다보지 않아서 괜히 신경 쓰이게 했다.


“이상합니까?”

“아닙니다. 머리에 뭘 이것저것 달고 계셔서. 빛이 반사될 때마다 눈이 부셔서 그럽니다.”

 
저건 칭찬인가 아닌가. 라틸이 빤히 쳐다보았으나 서넛은 이미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서넛 경. 나랑 같이 가야지?”

라틸이 황당해서 따라가며 부르자, 그제야 걸음을 멈추긴 했으나 여전히 라틸 쪽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렇게 이상합니까?”

라틸은 혀를 차면서 가면을 들어올렸다.


“하긴. 이상해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이거 쓰고 들어갈 겁니다. 서넛 경 가면은요?”

“저는 가면 안 쓸 겁니다.”

“서넛 경이 가면 안 쓰고 날 따라다니면 누가 봐도 내가 황제인데.”

“……무난한 걸로 구해 쓰겠습니다.”

라틸은 픽 웃다가, 주위에 사람이 완전히 없어질 즈음. 서넛에게 작게 경고했다.


“어제도 말했지만, 기르골이 가면무도회에 들어오려는 거 같습니다. 평범하게 화려한 가면 차림이라지만, 도중에 바꿨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경비 숫자를 배로 늘려 두었습니다. 그리 효과는 없겠지만요.”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손에 들고 있던 가면을 천천히 쓴 다음, 서넛의 팔을 살짝 떠밀었다.


“난 저쪽으로 들어갈 겁니다. 경은 가면 구해서 다른 근위병들이랑 같이 이동해요.”

 

* * *

자신이 황제라는 걸 남들이 알 수 없도록, 라틸은 일부러 궁전을 돌아 돌아 이동해서 다른 귀족들과 같은 문으로 연회장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간만에 황실에서 열린 무도회에 몹시 즐거워 보였다.

여러 가지 나쁜 소문이 많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이런 분위기에 안도하는 듯했다.

라틸은 춤을 추는 대신 계단 위쪽에서 사람들을 빤히 내려다보며 여우 가면을 찾았다.

집중해서 살피자 아는 얼굴들이 몇몇 보였다.


‘몸을 보니 저쪽은 대신관이고. 사람들이 가까이 못 가는 걸 보니 저기가 라나문인가. 피부가 창백한 걸 보니 저쪽이 칼라인. 옷을 보니 서넛이고. 악시안이랑 바닐이 따라다니는 걸 보니 저기가 클라인이네. 타시르는 어디 있지?’

므라딤은 아예 오지 않은 듯한데. 타시르는 왔을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다. 교묘하게 자기를 감추고 잘 숨어들어 간 모양이었다.


‘게스타는…… 저쪽 같은데.’

구석 자리에 웅크리고서 두려운 듯 떠는 커다란 다람쥐를 보니 게스타는 확실히 저쪽이다.

라틸은 인상을 구겼다. 아무리 봐도 여우 가면은 보이지 않았다.

기르골이 썼을 법한 ‘화려하게 평범한’ 가면은 너무 많아서 아예 짐작도 가지 않고.

그때.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로드.”

라틸은 확 돌아섰으나,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

의아해서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로 웃으면서 이쪽으로 왔다. 인기척을 느끼고 자리를 피한 것 같았다.


‘사람들을 죄다 피해 다니나 보다.’

부끄러움이 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라틸은 혀를 찼다.


‘그럼…… 내가 사람들 없는 곳으로 가면 알아서 나타나려나?’

라틸은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이 상대를 찾을 게 아니라 상대가 자신을 찾는 게 더 빠르겠단 생각을 하고서 사람이 없는 발코니를 찾아다녔다.

마침내 적당한 곳을 찾은 라틸은 커튼을 쳐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고서 여우 가면이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다려도 여우 가면이 오지 않았다.


‘너무 외진 데로 왔나?’

다시 나가야 하나, 걱정되어서 초조해하던 라틸은 문득 아래층 발코니에서 이상한 장면을 보고 눈을 비볐다.


‘어?’

라틸은 슬그머니 머리를 좀 더 내밀었다.


‘어어?’

여우 가면이 둘이었다.

여우 가면 둘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리 좋지 않은 분위기로.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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