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방심하지 않기로 했잖아
(293/367)
293화. 방심하지 않기로 했잖아
(293/367)
293화. 방심하지 않기로 했잖아
2022.12.18.
나름 용기를 가지고 진지하게 꺼낸 말에 타시르가 웃자, 클라인은 얼굴이 벌게져서 항의했다.
“왜. 후궁으로 왔으니 국서 자리 노리는 게 당연하잖아.”
혹시 타시르도 내가 멍청한 황자라고 여겨서 저러나, 클라인은 속으로 민망해졌다.
원래 그는 누가 자신에게 뭐라 하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국서를 노린다면 앞으로는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데 처음으로 회유하려 든 사람이 저렇게 크게 웃어대자 조금 부끄러웠다.
“물론이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타시르는 달래는 투로 말하면서도 더욱 미소를 크게 지었다.
“그저 좀 놀라서 그럽니다.”
“왜. 나랏일에 관심도 없는 멍청한 황자가 국서 자리를 노려서?”
“나랏일은 어차피 폐하가 하실 텐데 좀 멍청하면 어떻습니까. 정 안 되면 좋은 비서를 두어도 되는걸요.”
“그렇지?”
웃으면서 되묻던 클라인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주춤했다.
타시르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제게 그런 걸 물어보십니까?”
클라인은 주저했으나, 타시르의 신뢰를 얻기 위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예전엔 나 혼자 강하면 끝이라 생각했는데. 이번에 여러 가지 일을 겪고 나니 목소리에도 힘이 필요하더라. 나를 따르는 귀족이나 관리들이 없지만, 지금까진 불편할 게 하나도 없어서 몰랐어. 나는 황자니까.”
“그렇지요. 지금도 황자님입니다. 고귀한 황자님.”
“아니.”
클라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서 과거를 훑듯 허공을 초점 없이 응시했다.
“형님이 쓰러지고 나서 알게 됐다. 아바마마가 살아 계실 땐 아바마마의 위세 덕에, 형님이 건재하실 땐 형님과 사이가 좋으니까 다들 내 눈치를 봤던 거였어.”
“…….”
“하지만 형님이 쓰러지고 나니 황자란 건 아무 소용이 없었어. 제대로 수사를 받기도 전에 끌려가 바로 감옥에 갇혔으니.”
“그렇군요.”
“내가 황자로서 힘을 가지는 건…… 남들이 나를 황자로 대우할 마음이 있을 때뿐이더라. 설령 그게 아버지의 눈치를 봐서건, 형님의 눈치를 봐서건.”
타시르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냥 국서가 좋으니까 하겠다며 달려온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번 사건으로 저 철부지 황자도 많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황자님. 황자님이 마음고생 한 이야기를 들으니, 이 친우는 눈물이 다 나옵니다.”
타시르가 눈물 닦는 시늉을 하자 클라인은 멋쩍은지 얼굴이 더욱 벌게졌다.
타시르는 손을 다시 아래로 내리며 물었다.
“황자님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제게 도와달라 하십니까?”
사실 처음에 한 질문도 이거였는데, 클라인이 잘못 알아듣고서 다른 대답을 한 것이다. 하지만 클라인이 민망할까 봐 타시르는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넌 능력도 있고 머리도 좋고 폐하의 신뢰도 얻었지만, 국서가 절대 될 수 없잖아. 안타깝지만 평민이니까.”
타시르는 미소를 지으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마, 타시르. 네가 평민이라 무시하는 게 아니야.”
클라인은 얼른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잖아. 평민 출신 국서는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어.”
남자 후궁을 거느린 여자 황제도 나온 적이 없었죠. 이전까지는. 타시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넌 뛰어난 책사가 될 수 있는 데다 나랑 가장 절친한 친구잖아, 타시르. 그러니 우리가 한편이 되면 아주 좋을 거 같아.”
“그렇군요.”
타시르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클라인은 희망에 찬 눈으로 물었다.
“나와 한 편이 되어줄 거냐?”
그러나 타시르의 입에서 나온 말은 클라인이 여기에 오면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런데 어쩌지요, 황자님. 며칠 전에 라나문 님도 제게 같은 부탁을 했는데요.”
클라인은 기가 막혀서 외쳤다.
“그놈은 너랑 친하지도 않잖아?”
“그렇지요. 제 절친한 친구는 우리 황자님이시지요.”
“정말 어이가 없군!”
클라인은 씩씩거리면서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켜다가 혓바닥이 데었는지 눈시울이 붉어져서 얼른 잔을 내려놓았다.
“그 말을 받아들인 건 아니지?”
타시르는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안타깝지만 황자님. 황자님 말씀처럼 저는 평민인지라, 대단한 공작가 도련님이 그렇게 제안하면 거절하기가 어렵습니다.”
“뭐야?”
클라인은 놀라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럼 그놈이랑 한배를 탈 거야? 넌 내 친구인데?”
타시르는 한숨을 내쉬고서 웃었다.
“물론 승낙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직은요.”
그 말에 클라인이 주춤주춤 엉덩이를 도로 내렸다.
“그럼?”
“말은 그러겠다 했지만, 속으로는 제대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황자님이, 제 절친한 친구께서 이렇게 도와달라 하시니…….”
“내 편이 될 거야?”
“마음이야 백번 천번 황자님의 편이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먹여 살리는 식구들이 무수히 많지 않습니까. 라나문 님이 황자님의 식구들에게 해를 끼치진 못해도, 죄다 평민인 제 식구들에겐 해를 끼칠 수 있거든요. 제가 줄 한번 잘못 섰다가 피해 볼 우리 식구들을 생각하면 쉽게 결정할 수가 없답니다.”
“그럼…….”
대체 뭘 어쩌겠단 거지? 클라인은 타시르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아름다운 눈만 끔뻑거렸다.
타시르의 눈동자가 교활하게 휘어졌다.
“그러니 황자님께서 먼저 보여주십시오. 제가 어느 분을 돕는 게 이득일지.”
“어?”
“그래야 저도 황자님을 믿고 따르지요.”
“그, 그런가?”
클라인은 타시르의 말이 뭔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여기서 모르겠다고 하면 자기가 정말 멍청이처럼 여겨질까 봐 어영부영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네 말이 옳다.”
“황자님 같은 친구가 있어서 이 타시르는 참 든든합니다. 아시지요?”
“알지! 당연히!”
* * *
클라인 황자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떠난 후.
일부러 시간을 오래 끌며 간식을 가져온 히얼란은, 자기가 챙겨온 간식을 먹으면서 클라인 황자가 무슨 말을 하고 갔는지 뒤늦게 전해 들었다.
히얼란은 이야기가 끝나자 기가 막혀서 외쳤다.
“아니, 왜 다들 우리 소단주님은 절대로 국서가 못 된다고 무시하죠?”
타시르가 좀 음흉하고, 좀 마약상처럼 생겼고, 좀 속내를 알 수 없어 미심쩍긴 하지만 그래도 나머지는 죄다 훌륭하지 않던가.
그런데 평민이란 이유로 계속 무시를 해대니 너무 화가 났다.
“평민이니까.”
“너무하네요! 평민이든 귀족이든 이제 다 같은 후궁이잖아요! 밖에서 도는 잡지 후궁 순위를 보세요. 소단주님이 평민이란 이유로 초상화를 작게 싣지 않는다고요!”
“그걸 보고 있어?”
“당연하죠. 매달 챙겨 봅니다. 그것도 정보이고 여론이니까요.”
“내 순위는 높아?”
“…….”
“낮구나.”
“중간 정도…….”
“1순위가 누군데?”
“인어요. 신기한가 봐요. 잡지 기자들이 인어 얼굴 구하려고 난리도 아니에요.”
히얼란은 혀를 찼다.
“얼굴을 알게 되면 한동안 더 순위가 고정돼 있겠죠. 잘생긴 인어니까.”
타시르가 피식 웃기만 하자, 히얼란은 괜히 자기가 골이 나서 과자를 와삭와삭 부숴 먹다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데요, 소단주님? 누구를 도울 생각이세요?”
내내 간식에 손도 대지 않고 있던 타시르는, 마지막 남은 과자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바삭, 기분 좋게 부서지는 소리가 그의 입속에서 들려왔다.
“두 사람이 나를 돕게 될 거다.”
“!”
* * *
‘여우 가면 자식. 너무 도도한데?’
후궁들끼리 삼각관계가 벌어지는 줄도 모른 채, 라틸은 잔뜩 골이나 분노를 업무로 승화하는 중이었다.
‘도도한 여우 가면! 여우 가면을 쓴 이유가 있구나! 도도해서 그런 거야! 도도한 여우 가면!’
라틸은 한 자 한 자 퍽퍽 힘을 가해 글자를 쓰면서, 여우 가면을 흉봤다.
칼라인이 여우 가면에게 물어보자고 하길래, 라틸은 그 미스테리한 여우 가면을 드디어 만나게 되는 줄 알았다.
자신이 로드인 것도 여기저기 알게 되었으니, 이제 여우 가면도 자신에게 가면 아래 얼굴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칼라인은 즐겁게 여우 가면을 만나러 나서는 라틸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자는 부끄러움이 많아 얼굴을 쉬이 안 보이려 하니, 제가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라틸은 칼라인이 물어보고 올 동안, 집무실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세 시간 후. 칼라인은 이렇게 알려주었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니, 폐하께서 가면무도회를 열어주시면 가면 쓰고 오겠답니다.
라틸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가면 아래를 보고 싶다고 했지, 누가 뭐 옷이라도 벗으라고 했나. 뭐가 어떻다고 그 아래 얼굴을 안 보여주겠단 건지.
하지만 그자의 얼굴을 확인하러 만나는 게 아니라, 지하성에서 아낙차가 흑마법을 익힌 건지 물어보려는 것이기에 라틸은 마지못해 알겠다고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럼 그냥 네가 물어보고 와’라고도 말해보았지만, 칼라인은 또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머리가 아둔해 중간에 자신의 말을 잘 못 전하니, 폐하께 직접 말씀드리고 싶답니다.
화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대체 누구길래.”
라틸이 중얼거리자, 시종장이 서류를 한 팔로 안은 채 다른 팔로 빠르게 정리하다 말고서 쳐다보았다.
“예?”
“아니. 아닙니다.”
라틸은 얼른 둘러대고서 다 서명한 안건을 옆으로 밀어 넣으며 지시했다.
“시종장. 조만간 가면무도회를 할 테니 작은 규모로 열어야겠습니다.”
“가면무도회요?”
“요즘 무도회를 연 지도 오래잖습니까. 카리센과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우리나라 귀족들을 한 번 보듬어야죠.”
귀족들도 자기들끼리 무도회를 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황실에서 열어주는 무도회와는 규모가 달랐다.
궁전에서 여는 무도회는 귀족들을 모으고 분위기를 살피고 여러 정보를 캐고 사람들을 묶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여러 일이 연달아 터진 데다가, 이런 걸 주도할 국서가 아직 없기에 라틸은 즉위 후 역대 황제 중 가장 행사를 적게 열고 있었다.
아마 사교계 활동을 좋아하는 귀족들은 지금쯤 갑갑해서 죽으려고 할 것이다.
이런저런 걸 고려하고 나니, 시종장도 무도회를 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얼른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러면 폐하, 준비는 어느 후궁께……?”
“어머니한테 맡겨요.”
“아아. 예.”
그렇구나. 이제 선황후께서 오셨으니, 국서가 해야 할 일은 선황후께서 해주시면 되는구나. 시종장은 괜히 아쉬워서 작은 목소리로 한 번 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 *
선황후 셰이트는 황후로서의 역할이라면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그녀는 딸의 부탁을 받자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내면서 무도회 준비까지 해냈다.
이 모든 게 일주일 만에 처리되었다. 작은 무도회이기에 준비가 빨리 끝나기도 했지만, 선황후가 창고에 어떤 물건들이 이미 있는지, 어떤 물건을 가져다 쓸 수 있는지 이미 모든 걸 파악한 덕이기도 했다.
그렇게 여우 가면 만나기를 하루 앞둔 날.
라틸은 최근 갈 때마다 보이지 않던 기르골이 떠올라 손님용 궁전으로 가보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갈 때마다 늘 마주치는 그 윌랑 왕자가 보이지 않았다. 선생 열 명을 붙여둔 보람이 있었다.
라틸은 늘 윌랑 왕자와 시비가 붙던 자리를 벗어나, 기르골이 머무는 방으로 걸어갔다.
아직도 라틸은 기르골을 후궁에 넣어야 할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그를 풀어놓고 싶진 않은데. 품에 들이기엔 또 너무 위험한 뱀파이어니까.
기르골의 방 앞에 서자 목 안을 긁는 듯 긴장감이 빠르게 솟았다.
그에게 다가갈 때는 늘 이랬다. 가장 처음, 꽃다발을 내밀었을 때를 제외하고.
짧게 숨을 들이쉰 라틸은 노크를 하고서 “기르골. 들어갈게.” 하고 말한 다음 문을 열었다.
“기르골?”
대체 어디를 다니는 건지. 기르골은 오늘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없어.’
그가 방 안 가득 늘어놓았던 꽃 화분 역시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방에 화분이 없을 뿐인데. 라틸은 그걸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