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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화. 벌써 두 명이나 (292/367)


292화. 벌써 두 명이나
2022.12.14.



“왜 그래?”

막 대화를 하려고 앉았는데, 칼라인이 갑자기 소파에 앉다 말고서 문 너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아주 미묘하고 이상해 보여서 라틸이 묻자, 칼라인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라나문과 서넛이 같이 이동했습니다.”

“라나문?”

라틸은 되물었다.


“진짜 라나문?”

서넛이야 방문 앞에 있었겠지만, 뜬금없이 라나문이라니?

라틸의 질문에 칼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나문이 와서 서넛에게 얘기 좀 하자고 데려갔습니다. 수다 떨러 간 건 아닌 것 같던데요.”

“괜찮나?”

서넛이 라나문을 노린 적이 있단 걸 아는 라틸이 중얼거리자, 칼라인은 웃으면서 소파에 제대로 앉았다.


“괜찮을 겁니다. 둘이 나갔다가 하나가 죽으면 누가 의심받을지 뻔하니까요.”

그 말을 듣고서야 라틸은 안심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칼라인은 다리를 꼬고 앉아 라틸에게 물었다.


“그래, 우리 주인은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습니까?”

“황제가 후궁을 찾아 노는 데 일이 필요한가?”

“하지만 폐하는 일이 있을 때만 후궁을 찾으시죠.”

“…….”

뼈 있는 말에 라틸은 괜히 헛기침을 하다가 종을 집어 흔들었다.

칼라인의 뱀파이어 용병 시종이 안으로 들어오자, 라틸은 마실 걸 가져와 달라 지시하고서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해 얼른 머리를 돌렸다.

시종이 나가자 라틸은 큼큼 다시 헛기침하고서 둘러댔다.


“주색에 빠져 일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안 그러냐.”

“하긴. 주인이 오늘은 이놈에게 가시나, 내일은 저놈에게 가시나, 베개를 끌어안고 걱정하는 것보단 아무에게도 안 가시는 게 낫긴 합니다.”

“내가 안 오면 베개를 끌어안아?”

“안고 흐느낍니다.”

농담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말에 라틸이 의심스럽게 바라보자, 칼라인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차가운 소리를 들어 놓고서도 도미스가 사랑한 사람답게, 그가 미소를 짓자 주위가 등불을 켠 듯 같이 환해졌다.

귀여운 고양이나 강아지를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저절로 탄성이 나오듯, 칼라인의 미소를 보자 라틸의 입도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라틸은 자신도 모르게 히죽 칼라인을 따라 웃다가, 칼라인이 입술에 힘을 주고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짓자 얼른 정색하고 딱딱하게 말했다.


“볼일이 있어서 왔다, 칼라인.”

“네. 말씀하시지요, 주인.”

“네 지지자가 오셨어.”

“?”

“내 어머니.”

‘그게 무슨 볼일입니까?’ 하는 시선으로 라틸을 보던 칼라인은 뒤늦게 말을 알아듣고서 탄성을 뱉었다.


“선황후폐하께서 오셨습니까?”

“그래. 방금 막. 오자마자 네 얘기부터 하시더라.”

라틸이 놀리듯 말하자 칼라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고였다.


“공수표가 아니었군요.”

“잘됐네, 칼라인.”

라틸의 축하에 칼라인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축하해주시는 겁니까?”

“당연히 축하해야지. 이걸로 네 입장이 유리해졌는데.”

하지만 라틸이 대답을 해도 칼라인의 장난스러운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왜 그러냐 묻기 전, 문이 열리고 시종이 음료수 몇 잔을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전부 다 라틸의 앞에.


“…….”

라틸이 쳐다보자, 뱀파이어 시종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많이 드세요, 로드. 대장은 어차피 인간 음식은 안 먹습니다.”

인간 음식은 안 먹어도 네 머리는 먹으려 할 것 같은데. 라틸은 흉악해진 칼라인의 눈빛을 살폈으나, 뱀파이어 시종은 그 무서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태연했다.


“고마워.”

칼라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지자, 라틸은 웃으면서 인사하고 얼른 시종을 내보냈다.

시종이 물러가자 라틸은 머쓱하게 웃고서 칼라인에게 물었다.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거로 가져가라. 나 혼자 다 못 마시니까.”

“괜찮습니다. 다 드십시오. 저는 인간 음식을 잘 안 먹습니다.”

“삐져서 그러는 건…….”

“아닙니다.”

하긴. 입궁 전에 칼라인을 미리 살피고 싶어서 여관에 찾아갔을 때도 이런 이야기를 들었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화장실도 안 가고 방에만 있다고.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오렌지 향이 강하게 나는 음료수를 몇 모금 들이켰다. 시원한 과일 음료가 목 안으로 넘어가자 갈증이 싹 사라졌다.

라틸은 잔을 내려놓고서 여기에 온 이유를 밝혔다.


“사실 어머니 얘기를 해주러 온 게 맞는데. 다른 해줄 말도 있어, 칼라인.”

“무엇입니까?”

“혹시 틀라가 가짜 로드로 있고 아낙차가 같이 지낼 때 말이야. 무슨 은거지 같은 데 있었잖아. 혹시 그때, 아낙차가 흑마법을 익혔어?”

라틸은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본 죽은 틀라를 떠올렸다. 어머니를 구할 거라며 걸어가던 틀라가 있던 장소. 아주 일부만 보았을 뿐이지만, 척 보기에도 그냥 조그만 집은 아니었다.

라틸의 질문이 영 뜬금없게 여겨지는지 칼라인이 “네?” 하고 되물었다.


“흑마법이요? 아낙차가?”

“어.”

칼라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아낙차는 영리해. 늘 발전하려 하는 사람이고. 싫은 사람이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

“아낙차는 아들이 식시귀가 됐는데 ‘와, 우리 아들은 죽었다 깨도 멀쩡하네!’ 하고 그냥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야. 틀라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무엇이든 배울 사람이고.”

“그럼……?”

“어. 그래서 물어봤어. 거기서 아낙차만 사람이었을 텐데. 그러면 가장 접근하기 쉬운 게 흑마법 아니었을까, 싶어서.”

칼라인은 아직도 영 어리둥절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바로 흑마법사 이야기가 나오나, 신기한 눈치였다.

사실 라틸이 흑마법을 떠올린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전에 카리센에 클라인을 구하러 갔을 때, 다가 공작을 봤는데 목이 뜯겨 있었다 했잖아. 기억나?”

“예.”

“난 다가 공작이 죽을 줄 알았어. 그런데 공작은 안 죽었어. 장례식 이야기도 없고.”

“다가 공작이 흑마법으로 살아났을 거라 의심하십니까?”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다가 공작은, 깨어나자마자 아낙차, 틀라와 손을 잡았어. 뭔가 있어 보이지 않아?”

물론 아낙차가 다가 공작과 손을 잡았다는 증거도 아직 없지만, 이 역시 꽤 확률이 높은 일이었다.


“쇼버 후작 부인이 아낙차의 모친인데. 후작 부인이 다가 공작의 먼 친척이래. 후작 부인은 공작가에서 결혼식이 있다면서 그곳에 다녀왔어. 그곳에 다녀오기 전엔 차녀인 메이시 쇼버에게 장거리 심부름을 시켜서 며칠간 집을 떠나 있게 했는데, 메이시 쇼버는 그런 심부름을 간 게 처음이라 하고. 아, 메이시는 내 사람이거든? 그 부모도 알고 있어.”

확실한 건 단 하나도 없지만, 그 뭉툭한 바늘은 모두 한곳을 가리켰다.


“있지, 칼라인. 내가 흑마법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만약 아낙차가 흑마법을 익히고 다가 공작이 죽을 뻔한 걸 흑마법으로 치료했다면…… 여기 어디에 파고 들어갈 틈이 있을 거 같거든.”

라틸의 입술이 아까 칼라인의 미소를 볼 때와 다르게 히죽 올라갔다.

라틸의 말을 심각하게 듣던 칼라인은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성에 있던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낫겠습니다.”

“누구?”

“……여우 가면이요.”

“여우 가면?”

그 말을 듣자마자 라틸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몇 번이고 자신을 도와주었던.


“만날 수 있어?”

라틸은 얼른 따라서 벌떡 일어났다.


 

* * *



“왜 갑자기 일어나세요?”

멀쩡히 보고서를 훑던 타시르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자, 히얼란이 깜짝 놀라 물었다. 타시르가 뭔가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것이다.


“신경 쓰이는 내용이 있어요, 소단주님?”

“신경 쓰이는 내용.”

타시르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


“있지.”

“뭔데요?”

“아직 좀 더 확실하게 봐야 해.”

“?”

“하지만 이게 잘 되면…… 우리 폐하께서 약속을 지키시려나 모르겠네.”

이제는 눈꼬리가 내려간다. 흐뭇한 표정.

그래도 저리 웃는 걸 보니 이쪽에 나쁜 내용은 아니겠다 싶어서, 히얼란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정리하던 새 정보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자요. 그거 다 보셨으면 이거도 보세요, 소단주님.”

“뭔데?”

“구입하라 하셨던 신전 주위 건물들 소유증서요. 아직 다 된 건 아니에요.”

“잘했어. 더 잘해봐.”

타시르는 씩 웃고서 한 뭉치의 보고서를 받아 몇 장을 들춰보았다.

그런데 한참 두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난감한 목소리로 “타시르 님!” 하는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 신신당부했는데.

그렇다고 황제가 온 거라면 경비병이 저런 목소리일 리가 없다. 타시르는 히얼란에게 나가보라 눈짓했다.


“네.”

히얼란이 문가로 걸어가는 동안, 타시르는 책상 옆에 놓인 작은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책상 가운데가 열리며 순식간에 위에 있던 보고서들이 안쪽으로 떨어졌다.

타시르가 버튼을 다시 누르자 책상은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다만, 위에 가득 쌓여 있던 보고서들이 말끔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

중요한 서류들을 단번에 숨긴 타시르는 귀찮다는 듯 일어나 몸을 돌렸다.

문 쪽을 향해 서자마자 문이 발칵 열리며 클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시르!”

클라인이 자신을 부르자, 타시르는 그새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띠고 두 팔을 벌리며 같이 달려갔다.


“이게 누구야, 우리 황자님 아니십니까!”

고생을 하고 와서 방에 틀어박혀 잘 나오려 들지 않더니. 이렇게 찾아온 걸 보니 많이 회복된 모양이었다.

타시르가 반갑게 맞이해주자 클라인은 그를 잡고서 숨을 고르다가, 자기 방인 것처럼 그를 끌고 소파로 걸어갔다.

왜 멋대로 남의 방에 와서 저런데. 히얼란은 못마땅했지만 제 주인처럼 미소를 띠고 이런 감정을 감추었다.


“히얼란?”

“네, 소단주님.”

“황자님 드시게 커피.”

“네.”

히얼란이 나가자 타시르는 백년지기 같은 미소를 띠고서 클라인에게 물었다.


“많이 고생하셨다더니. 괜찮으십니까?”

“고생한 티가 나느냐?”

“어휴, 겉으론 전혀 안 납니다. 얼굴에서 광이 나세요.”

“다행이네. 몸 고생도 많이 하고 마음고생도 많이 했는데.”

“황자님 피부가 좋으셔서 그럽니다. 타고 나신 거죠.”

“그건 그래.”

잠시 뒤, 히얼란이 커피를 가져와 타시르와 클라인 앞에 한 잔씩 내려놓고 물러나자 클라인이 타시르에게 히얼란을 내보내란 표시를 눈으로 했다.


“히얼란, 황자님 드시게 간식.”

“……네.”

히얼란이 나가자, 타시르는 손을 깍지 끼고 그 위에 얼굴을 괴고서 물었다.


“섭섭하네요, 그냥 놀러 온 게 아닌 모양이십니다?”

클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대로 무언가 고민이 있긴 있는 모양새라, 타시르는 그가 말을 하기를 끈기 있게 기다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클라인이 입을 열었다.


“타시르. 자네는 내 친구지?”

“그럼요. 우린 단짝 친구잖아요.”

이 황자님이 왜 갑자기 친구 운운하는 걸까. 타시르는 호기심이 일어서 깍지낀 손을 내리고 다리를 꼬았다.

멋쩍은지 클라인은 괜히 얼굴이 붉어져서 볼을 긁다가, 안 되겠다 싶던지 얼른 본론을 던지듯 꺼냈다.


“내가 국서가 되게 네가 밀어줘.”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던 타시르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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